가을이 데려온 우울

by 심온

카페에 가득한 커피 향기가 연탄불 위에서 달여지는 한약 증기처럼 메케하게만 느껴진다.


노이즈캔슬링 이어폰에 헤드폰까지 덧씌워도 높은 톤의 웃음소리가 스며들어 짜증이 밀려온다.


더위를 식히는 에어컨 바람에 살갗에 소름이 돋는다.


음악 앱 재생목록을 이것저것 넘겨봐도 뇌를 만족시키지 못하고, 담배 한 개비를 물어도 구역질만 올라온다.


그래, 그 계절이 찾아온 거다.


여름의 끝자락과 가을의 시작이 맞닿은 이 미묘한 계절에 내가 무엇을 기대했던 걸까. 실망은 언제나 기대에서 비롯되는데, 나는 또 헛된 기대를 품었나 보다. 뻔히 알면서도 계절 탓을 하는 것은 결국 내 마음의 문제를 인정하기 싫어서일 테지.


사람들은 가을을 결실의 계절이라 부른다. 논과 밭에는 황금빛 곡식이 고개를 숙이고, 과수원에는 탐스러운 과일이 가지를 휘게 한다. 하지만 내게 가을은 포기와 공허가 영혼을 채우는 계절이다. 바깥세상이 풍요로워질수록 내 마음은 더욱 빈곤해진다. 누군가는 수확의 기쁨을 누리는 동안, 나는 텅 빈 창고를 들여다보는 기분이다. 아이러니하게도 세상이 가장 풍요로운 때에 나는 가장 결핍을 느낀다.


모두가 분주히 거두어들이는 이 계절에, 나는 무엇을 심고 거두었는지 의문이 든다. 빈 손을 마주하며 스스로에게 질문한다. '올해는 무엇을 이루었지?' 그리고 그 대답이 없음에 공허함이 밀려온다. 그렇게 포기의 씨앗이 내 안에서 자라기 시작한다.


가을만 되면 내 영혼이 옷을 한 겹 더 입는다. 마치 세상과 나 사이에 얇은 막이 생기는 기분이랄까. 불현듯 옷깃을 여미고 싶어지는 마음처럼, 내 마음도 조금씩 닫혀간다. 햇빛은 눈부시게 황금빛인데 내 시선은 자꾸만 땅으로 향한다. 떨어지는 낙엽들처럼 나의 마음도 바닥을 향해 천천히 낙하 중이다.


해마다 반복되는 이 감정의 굴레. 여름의 끝자락에서 이미 알고 있었던 거다—이 우울함이 다시 찾아올 것이라는 사실을. 그래서 커피 향기가 메케했고, 웃음소리가 짜증 났던 건지도 모른다. 이미 내 몸은 계절의 변화를 감지하고 방어기제를 작동시키고 있었는지도.


자책한다. 계절 따위에 이렇게 휘둘리는 나약한 정신. 매년 반복되는 일인데도 대비하지 못하는 어리석음. 이제 와서 누구를 탓하겠는가. 세상 모든 것이 제자리를 찾아가는 계절에 유독 나만 길을 잃는다. 그리고 이 길 잃음을 가을 탓으로 돌리는 비겁함까지.


어쩌면 가을은 내가 나 자신을 가장 솔직하게 마주하는 시간인지도 모른다. 화려한 여름의 가면이 벗겨지고, 겨울의 단단함을 준비하는 사이. 그 어중간한 시간 속에서 진짜 나를 보는 거울이 가을인지도.


남은 가을을 어떻게 보내야 할지—이 물음표 자체가 무거운 짐이다. 가을은 이미 시작됐고, 나는 또 준비되지 않은 채 그 안으로 떠밀려 들어왔다. 두려움이라기보다는 체념에 가깝다. 또 그 우울의 늪을 헤매게 될 것이라는. 지금의 나는 과거의 내가 예견했던 그 모습 그대로겠지.


그래도 어쩌겠는가. 계절은 돌고 나는 그 안에서 살아간다. 멜랑콜리는 내 그림자처럼 따라다니는 오래된 친구. 가끔은 이 친구를 끌어안고 함께 걷는 법을 배워야 할지도 모르겠다. 가을이 지나면 겨울이 오고, 또다시 봄이 올 테니. 내년의 가을에는 좀 더 현명해질 수 있을까?


아마도 그때도 난 오늘의 내가 쓴 이 글을 다시 읽고 있을지도 모르겠다.


같은 자리에서, 같은 마음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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