취미가 뭐예요?
나는 굉장히 바쁜 백수다.
퇴사를 하고 더러 주변에서는 집에만 있는 게 지겹지 않냐, 심심하면 뭐하냐 등등의 대답하기 조금 난감한 질문을 한다. 그러나 나는 전혀 심심할 틈이 없는, 하루하루가 매우 알찬 백수다.
정확히 말하면 바쁜 백수가 되려고 노력하고 있다.
더 나은 조건의 원하던 회사로의 이직이 아닌 무거운 마음으로 퇴사를 하고 나니 온전히 나에게 주어진 많은 시간들을 어떻게 써야 할지 몰라 퇴사를 하고 나서 며칠은 우울감에 젖어있었다. 퇴사를 하기 전까진 매일 아침 눈뜨면 또 그 멀미 나는 지하철을 타고 힘겹게 워딩턴 디씨로 출근해야 하는 일상이 너무 싫었는데, 퇴사를 하고 나서는 여유로운 아침이 좋고 꼴 보기 싫은 사람 더는 안 봐도 되니까 마음은 편하긴 한데, 며칠이 지나니 뭔가 내가 져서 나온 것 같고 나만 멈춰있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그러기를 며칠, 잔뜩 움츠러든 내 모습을 발견하고 내 모습을 빳빳하게 펴줘야겠다고 마음을 먹었다.
내가 이러려고 퇴사한 게 아니라 당당하고 멋지게 살려고 용기 내서 그 대가로 선물 받은 하루인데 그 하루를 무력감에 내어주면 안 되었다. 더 깊은 우울감에 사로잡히기 전에 뭔가 해야 했다.
이렇게 나는 29살이 되어서야 취미를 발굴하기 시작했다. 한국에서 수험 생활을 한 사람들은 입시를 끝내기 이전까지는 이렇다 할 취미가 없는 게 대부분이다. 더군다나 내가 한국에서 살았던 지역은 당시에는 아직 비평준화여서 고등학교도 시험을 보고 들어가야 했다. 때문에 나는 중학교 1학년 겨울 방학부터 독서실 생활을 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만 13세부터 깜깜하고 숨소리조차 조용히 내야 하는 칸막이 독서실에서 창의적인 꿈을 키우고 재기 발랄한 취미활동을 갖기는 어려웠다. 열아홉 살까지 언 6년 동안 독서실에서 보내는 시간이 집에서 보내는 시간보다 길었고, 고등학교 졸업을 하고 나서는 바로 서울로 올라가 자취를 하며 재수를 하는 기간이 이어졌고, 그리고 스무 살에 미국으로 대학을 오게 되면서 나에겐 나 스스로를 탐구할 여유가 없었다. 고3 때까지 미국 유학을 전혀 생각해보지 않다가 스무 살 재수를 준비하던 도중에 미국을 가야겠다고 마음을 먹고 돌연 SAT(미국 대학 입학시험)로 방향을 틀면서 내 스무 살의 대부분을 SAT학원 자습실에 보냈다.
미국에 온 첫 1~2년은 나에겐 고3 수험 생활보다도 더 가혹한 시간이었다. 3년을 수능을 준비하면서 외국어 영역은 늘 상위권 수준이었지만, 그 수준으로 미국 대학 수업을 듣는다는 건 너무 무리였다.
대학시절 첫 일 년은 아예 한국 사람을 만나지 않고 미국 친구들하고만 어울려 다니면서 영어를 내 일상 모든 부분에 사용하려 했다. 교수님들께도 미리 찾아가 양해를 구해 수업시간 내용을 모두 핸드폰으로 녹음해 수업 시간에 처음 듣고, 수업이 끝나고 나서는 바로 도서관으로 가서 60분짜리 수업을 3시간 넘게 돌려 들었던 날들이 셀 수 없이 많다. (물론 대학교 4학년 때 구 남친 (현 남편)을 만나서 연애를 하는 바람에 이 루틴은 4학년 때까지 지켜지진 않았지만..)
그러다 보니 내가 쉴 때 무엇을 하는지, 무엇을 좋아하고 잘하는지 나는 자신 있게 대답하기가 어려웠다.
대학을 오고 나서 받았던 가장 난처한 질문은 “취미가 뭐예요?” 였던 것 같다. 그래서 퇴사하고 나서도 내가 나에게 온전히 집중할 수 있는 나만의 시간을 갖는 것 자체가 부담스러웠고 쉽지 않았다.
더러 내게 손재주가 있다고 베이킹을 배워보거나 손으로 무언가 만드는 일을 해보면 어떻겠냐고 물었다.
학부를 졸업하고 석사 입학하기까지 6개월 남짓 시간이 있어 잠깐 한국으로 돌아와 재봉틀을 배웠다. 재봉틀로 만든 소품들을 내가 사랑하는 지인들에게 선물을 했고, 동대문에 천을 많이 사러 가서 단골 아주머니가 내가 의상학과 학생인 줄 아셨을 정도로 한 때 재봉틀에 빠져 있었을 때가 있었다. 물론 손으로 무언가 만드는 일은 좋아하지만, 운전을 못하는 내가 미국에서 손쉽게 자주 할 수 있는 취미는 아니다. 일단 준비물이 필요하고 준비물을 구하러 가려면 쉬는 날 남편한테 졸라 이 가게 저 가게 운전을 부탁해야 하고 나가려면 옷을 입고 화장을 하고…으휴 생각만 해도 벌써 힘들고 지쳤다.
그래서 돈이 안 들고 온갖 핑계 대지 않고 쉽게 할 수 있는 취미를 만들어보자 해서 2020년에 본격적으로 시작한 게 역사 공부다. 내가 처음부터 역사 공부를 취미로 삼아야겠다고 생각한 건 아니다. 엄밀히 말하면 스무 살이 되기 이전까지, 더 정확히는 미국에 오기 이전까지는 역사랑 나는 사이가 좋지 않았다. 내가 필연적으로 역사와 화해를 하고 지금은 역사 공부가 내 취미 활동이 되었다고 말하기까지는 많은 과정이 있었고 많은 일이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