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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Dori Lee Mar 25. 2020

"Jane from Korea"

역사가 나에게 찾아왔다.

내가 다닌 비평준화 지역의 고등학교는 조금 유별났다. 학생들의 점수 스펙트럼이 매우 촘촘하게 분포되어 있어 1점 1점에 등급 차가 갈리는 그런 살벌한 내신 경쟁이 그 이유다. 그러다 보니 내신 시험을 보다 보면 더러 “무슨 이런 문제를 내냐” 하고 속에서 뜨거운 게 올라와 감독하는 선생님을 한번 무섭게 쳐다보기도 했다. 

선생님들은 치사한 문제들을 만들어 “변별력”을 쥐어짜내야 했다. 그래서 내신 시험기간에는 역사와 같은 과목들은 큰 줄기 큰 맥락으로 공부한 게 아니라 아주 헷갈리고 시험 문제로 내면 꼭 틀릴 법한 것들을 선생님 입장에서 실눈 뜨고 찾아가면서 공부를 하다 보니 졸업한 이후에는 머릿속에 남은 게 하나도 없었다.  


또 내가 입시를 했던 시기에는 한국사는 역사와 근현대사로 분리가 되었고, 필수가 아닌 선택과목이었다. 

문과 학생들 중 서울대를 목표로 하는 친구들에게만 국사가 필수 과목이었기 때문에 전국에 난다 긴다 하는 문과생들이 와글와글 몰려있는 과목이었다. 그래서 굳이 서울대를 목표로 하지 않는 문과생들은 한국사를 기피했다. 그러다 보니 한국사는 관심이 있더라도 입시를 위해서는 선택하지 말아야 하는 무섭고 두려운 과목이 되었다.  


나도 예외는 아니었다. 부끄러운 이야기지만, 고 1 때 역사 수업이 너무 지루해서 눈물이 그렁그렁 맺힐 정도로 하품을 하다가 선생님과 눈이 마주쳐 자리에서 일어나야 했던 게 한두 번이 아니다. 수업시간에 그렇게 창피를 당하고 나니 수업에 더 흥미를 잃었던 것 같다. 이렇게 역사와 멀어진 내가 20살이 되면서 다시 역사와 화해를 하게 된 계기는 내가 전공을 국제관계학으로 정하면서부터였던 것 같다.  


미국에서 배우는 국제관계학은 정말 다이내믹하고 재미있다. 국제관계에서 주역을 맡고 있는 미국의 시각에서 국제관계를 배우다 보면 자애롭고 인류애가 넘쳐흐르는 강대국의 이면에 숨겨진 철저히 이해타산적인 냉정한 외교의 참모습을 적나라하게 볼 수 있다. 또 국제관계학을 가르치는 교수님들은 세계 각국에서 온 분들이기에 수업을 하면서도 자국의 나라 이야기가 나오면 더 흥분해서 가르치는 모습을 보는 것도 흥미로웠다. 무엇보다 특정 현상을 좀 더 다양한 시각에 배울 수 있다는 것이 미국에서 국제관계학을 전공하는 가장 큰 매력이다.  


교수님들만 수업을 이끌어가는 것이 아니다. 국제관계학의 묘미는 듣는 학생들도 각기 다른 국가에서 왔기 때문에 같은 반 수업을 듣는 친구들의 이야기를 듣는 것도 좋은 공부가 된다. 고학년이 될수록 전공과목들 위주로 들으면서 교수님들도 친구들도 서로에 대해 더 잘 알아가며 이 학생은 어느 나라에서 왔고 저 학생은 어디에서 왔고를 빠삭하게 알게 된다. 그러다 수업 내용에 특정 국가가 나오면 자연스럽게 출신 국가의 학생의 의견이나 견해를 묻곤 한다.  


나 또한 예외가 아니었다. 전공 수업을 듣다 보면 빠지지 않고 나오는 주제가 한일관계다. 유럽을 비롯한 많은 국가들은 과거 서로 치고받고 싸운 역사가 있어도 오늘날 자국에 도움이 된다면 누가 먼저랄 것 없이 협력을 하는데 유독 그게 어려운 지역이 동아시아이고 그중에서도 한국과 일본이라는 것. 

더러 학생들이 이 부분에 대해 본인의 견해를 나누거나 교수님들께서 이야기를 하실 때 기분 탓인지 모르겠으나 일본 쪽에 동조를 하는 경우를 심심치 않게 봤다.   


이럴 때면 부족한 영어로 괜히 나섰다가 망신만 당하는 게 아닌가… 그냥 가만히 있을까… 내적 갈등이 없었던 게 아니지만 조용히 있으면 괜히 우리나라만 억울하게 될 것 같아 우리나라의 입장과 일본 역사 왜곡에 대해 힘줘서 말했던 적이 종종 있었다. 1학년 2학년 때 그렇게 몇 번 발표하고 난 뒤 “Jane from Korea”라는 이미지가 정착되었던 것 같다(이도리의 영어 이름은 Jane이다). 아예 3학년 4학년 때는 실라버스(교수요목)에 한국 관련된 주제로 수업이 있는 날이면 반 친구들이 앞줄을 비워두고 “Jane’s seat” 이라며 나를 앉게 했다. 

본의 아니게 대학 4년 동안 나는 한국 대표가 되어있었다.  

명색이 한국 대표라 종종 한복을 입고 캠퍼스를 활보했다

부담스러웠지만 자리가 사람을 만든다는 말이 있듯 그때부터는 혹시나 한국인으로서 안 좋은 모습을 심어줄까 더 조심하고 한국인에 대한 좋은 인상을 주기 위해서 더 많이 노력했던 것 같다.   


수업 전 읽기 자료나 과제에 “Korea”부터 검색해서 해당 사건이나 협약 내용 등을 더 깊게 파고들고 심지어 다음 수업시간에 읽기 자료와 관련해서 꼭 하고 싶은 말이 있으면 script까지 써가면서 자연스럽게 들리기 위해서 숨을 고르는 부분이나 효과적인 제스처까지 연구해가며 여러 번 읽고 연습해 가기도 했었다.  


역사가 나한테 화해하지고 찾아온 것 같았다. 내가 역사를 알아야만 했다. 

알아야 대답을 할 수 있고, 정확하고 깊게 알아야 더 설득력 있고 폭넓게 이해시켜줄 수 있으니까.  

인상 깊었던 수업이 있다. 4학년 동아시아 국제관계학을 담당하셨던 교수님께서 수업하시던 도중 안중근 의사에 대해 언급하신 적이 있다. 조금 당황스러웠다. 미국에서, 그것도 미국인이 안중근을 언급하리라고는 생각도 못했다. 더군다나 수업 전 읽기 자료에 나온 내용이 아니라 내가 미처 준비하지 못했던 부분이다.  


미국인이지만 일본 전문가였던 교수님은 학회 방문차 동아시아 국가들을 방문하셨을 때 남산에 있는 안중근 의사 기념관을 가보셨다는 것이었다. 수업 시간에 있던 한국인 학생들 (물론 나포함)에게 마치 도전 반 호기심 반으로 “혹시 가본 적 있니?”라고 물으셨을 때 나는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수업하던 시기가 9월이었는데 나는 그해 여름에 안중근 의사 기념관을 다녀왔기 때문이다. 3학년 때 장학금 지원 서류 에세이 주제가 “오늘날 만나고 싶은 위인이 누구인지, 그리고 그 이유를 서술하시오”라는 질문에 안중근 의사를 쓰면서 더 깊이 조사를 하다가 여름 방학 때 안중근 의사 덕분에 장학금을 받은 것 같아 감사의 마음으로 방문한 게 그 해 여름이었기 때문이다.  


번쩍 손을 들었다. 교수님께서 좀 놀라시는 눈치였고, 일본 전문 교수님이시다 보니 일본의 입장에서 바라보는 안중근 의사에 대해 설명하셨고, 이 인물이 한국과 일본에서 얼마나 다르게 평가되고 있는지 설명하시며, 이어서 한국의 입장에서 바라보는 안중근 의사에 대해서는 Jane이 설명하라고 하셔서 신나서 줄줄 말했던 기억이 난다 (당시 머릿속에 뮤지컬 영웅 “누가 죄인인가”가 BGM으로 깔렸다). 


나도 모르게 다소 흥분을 했었는지 말을 마칠 때쯤 얼굴이 벌게졌고, 옆에 앉았던 제일 친한 불가리아 출신 알렉스가 푹푹 웃으며 (내가 말을 할 때 표정이 너무 진지한 나머지 본인에겐 웃겼다고 했다) 박수를 쳐줬고 같은 반 친구들도 함께 박수를 쳐줬다. 이어서 교수님도 “너 정말 한국 대표 맞구나” 하셨다.  


석사 시절에도 교수님이 아예 한국 역사 관련된 부분만 나오면 장난스럽게 “This is Jane’s part”하시며 아예 본인은 청강을 할 테니 나보고 말해보라고 하시곤 하셨다. 이렇다 보니 내가 역사 공부를 안 하려야 안 할 수가 없었다. 석사 2년째에는 교수님께서 “comfort women advocate”라는 별명까지 붙여 주셨다. 

또 본인 오피스 아워에 오는 학생들에게 한국 역사에 관련된 질문은 Jane한테 물어보라고 되돌려 보내셔서 가끔 내가 공부하는 곳에 찾아와 “교수님이 너한테 가래”라는 친구들의 이야기를 들으며 당황스럽기도 하고 더 

책임감을 느껴 석사 때는 누가 시키지 않아도 한국사 박사과정 수업까지 들으며 공부를 해댔다.  

석사 졸업 사진

누군가 나를 어느 부분에서 전문가로 인정해주고 믿어주는 일들이 내가 더 역사를 가까이하게 되는 원동력으로 작용했고, 그래서 나는 자연스럽게 역사 공부를 내 일상에 넣기 시작했다. 밥 먹는 시간, 자기 전에 30분, 비행기 타는 시간, 시험이 끝난 후, 등등 내가 온전히 쉴 수 있는 시간들에 역사가 나에게 찾아왔다. 



간판 사진 thanks to 나의 벗 신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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