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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Dori Lee May 02. 2020

다시 오픈해주세요 네?

도리's Pick 서울 핫 플레이스 2: 익선동 독닙료리집

확 트인 거리보다 정겨운 골목길이 좋고, 번쩍번쩍 모던한 느낌의 건물들보다 오래되어 틈이 생긴 사이로 생명이 움트는 그런 건물이 좋다. 그래서 나는 익선동을 참 좋아한다. 그곳에 내가 너무도 가보고 싶었던 식당이 한시적으로 오픈했었다.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 100주년을 맞이하여 신한희망재단에서 2019년 6월부터 7월까지 한 달간 오픈한 독닙료리집이 바로 그곳이다. 아쉽게도 나는 그 기간 동안 한국에 갈 수 없어서 방문 기회를 놓쳤다. 


이미 영업을 종료한 상태라 방문할 수도 없는 공간을 자료로나마 엿보는 게 의미가 있을까… 오히려 아쉬움만 커지는 건 아닐까… 한동안 고민을 했지만, 비록 그곳을 직접 갈 수는 없지만, 100년이 지난 과거 속의 독립운동가들의 삶을 오감으로 만나볼 수 있는 아주 의미 있는 프로젝트였다는 생각에 다루는 게 맞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이번 편은 지금은 사라졌지만 또 오픈해주길 간절히 바라며 익선동 독닙료리집에 대해 소개해보련다.  


독닙료리집 음식들은 과거 독립운동가들이 먹던 음식을 여러 자료와 후손들의 증언을 통해 고증해내어 현대적으로 재창조해낸 것들이다. 메뉴판에는 김구 선생님이 일본 순사를 피해 쫓겨 다니며 드셨던 대나무 주먹밥 쫑즈, 지복영 선생님의 간식 총유병 등의 아홉 가지 음식이 있다.   


흔히 역사 공부를 할 때 한 인물의 일상을 가만히 들여다보기보다는 그 인물이 역사에 남긴 큰 발자취 위주로 공부를 한다. 그렇게 알게 된 인물들이 때로는 너무 멋있고 감동적이다 못해 영웅처럼 느껴져서 나와 너무 거리감이 있는 사람처럼 느껴질 때가 있다. 그러나 그분들이 즐겨 드셨던 음식을 맛보면 '그래도 나와 입맛 정도는 비슷하셨구나' 하고 위안 삼을 수 있다. 너무 멀게만 느껴졌던 분들을 음식으로 만나게 되면 좀 더 가깝고 친근하게 느껴질 수 있었을 것 같다. 우리는 밥심의 민족이 아닌가. 독립 영웅들이 즐겨 드셨던 음식들을 대중들에게 선보여 그분들의 취향과 입맛을 상상해보며 역사를 되짚어 보게 한다는 것은 정말 기가 막힌 아이디어다.  

독닙료리집 메뉴판 | 신한희망재단

1.     김구 선생님의 대나무 주먹밥 쫑즈 

쫑즈는 김구 선생님께서 일제의 탄압을 피해 쫓겨 다니시면서 드셨던 대나무 주먹밥이다. 대나무를 벗겨내면 약밥처럼 생긴 주먹밥이 들어있다. 드셔 본 분들의 후기에 따르면 대나무 향이 퍼지면서 짭짤하게 간이 배인 주먹밥 안에 잘게 다져진 닭고기와 밤, 호두 등 견과류가 들어있다고 했다.  


이 쫑즈는 나도 석사 시절 친하게 지내던 중국 친구가 만들어줘 먹어본 적이 있다. 사실 그 친구가 만들어 주었을 때는 찜기에서 막 나와 살짝 습기가 차있고 따끈따끈 했었다. 그러나 급히 수업을 가야 해서 바로 먹지는 못하고 지퍼백에 보관하고 한참이 지난 후에 집에 와서 먹어보려고 하니까 속이 다 식어서 밥이 딱딱하고 맛이 느껴지지 않았었다. ‘아 따뜻했다면, 막 만들었을 때 먹었다면 맛있었겠다’ 하면서 먹은 기억이 있다.  


순간 이때가 생각이 났다. 김구 선생님은 찜기에서 갓 꺼낸 김이 모락모락 나는 쫑즈를 드실 수 있었을까…?

어쩌면 배 안에서 기차 안에서 제대로 앉지도 서지도 못하고 들고뛰는 와중에 정말 살려고 다 식은 이 쫑즈를 우걱우걱 드셨으리라 생각하니 좀 안타까웠다. 김구 선생님께서 맛있어서 즐겨 드셨던 음식이기보다는 쫓기는 입장에서 그래도 휴대하기 좋고 간편했기에 자주 드신 음식이 아니었을까 추측을 해봤다. 


2.     곽낙원 여사님의 돼지고기 김치찜 

김구 선생님의 어머니 곽낙원 여사가 자주 만드셨던 음식이 김치찜이다. 음식을 현대식으로 재현하는 과정에서 돼지고기가 맛의 풍미를 위해 더해진 것 같지만, 기록에 따르면 곽낙원 여사가 쓰레기통을 뒤져 버려진 배춧잎으로 만들었다던 김치찜이었으니만큼, 돼지고기 구하기는 쉽지 않았을 것이다. 상하이 임시정부 시절은 장제스의 후원을 받기도 전이라 살림이 지독하게 궁핍했다. 그러나 딸린 독립운동가 식솔들이 많아서 버려진 배춧잎 한 장도 그냥 지나칠 수 없었다. 다음은 김구 선생님의 백범일지에 나오는 곽낙원 여사의 김치찜에 관한 기록이다. 당시 김구 선생님의 아내는 폐병으로 돌아가시고 그에겐 두 아들 김인과 김신이 있었다.   


 “상해의 우리 생활은 극도로 곤란하였다. 그때 독립운동을 하는 우리 동지들은 취직자, 영업자들을 제하면 수십 명에 불과하였다. 어머님께서는 청년, 노인들이 굶주리는 것을 애석히 여기셨지만 구제할 방법이 없었다. 두 손자마저 상해에서 키우기 힘들어 환국코자 하실 때 어머님은 우리 집 뒤쪽 쓰레기통 안에 근처 채소상이 버린 배추 껍질이 많은 것을 보고 매일 저녁, 밤 깊은 후 그런대로 먹을 만한 것을 골라 소금물에 담가 두었다가 찬거리로 하기 위해 여러 항아리를 만들기도 하셨다. 아무리 생각해도 상해 생활을 유지하기 어려워지자 어머님께서는 네 살이 채 안 된 신(信) 이를 데리고 길을 떠나셨고 나는 인(仁) 이를 데리고 여반로(呂班路) 단층집을 세내어 석오 이동녕 선생과 윤기섭, 조완구 등 몇 분 동지들과 함께 살며 어머님께서 담가 두신 우거지김치를 오래 두고 먹었다.”


위의 기록만 봐도 상해 임시정부 요원들의 생활이 궁핍했음을 알 수 있다. 그 와중에 마음을 찡하게 만든 대목이 당장 자기 자식의 입에 들어갈 것도 없는데, 동지들과 부족한 음식을 나눠먹었다는 부분에 독립운동 앞에는 배고픔도, 자식도, 이기심도 다 내려놓고 오직 조국의 독립과 그 뜻을 함께하는 동지들이 최우선이었구나를 느꼈다.

 

곽낙원 여사는 버려진 배춧잎을 주워 만들었다지만, 독닙료리집에서 각색한 김치찜은 작은 배추 반 포기 정도의 김치와 삼겹살이 요리되어 나왔다고 했다. 비록 이 음식을 식당에 가서 먹을 수는 없지만, 조만간 삼겹살과 김치를 넣고 찜을 해서 만들어 먹으면서 곽낙원 여사의 김치찜 스토리를 신랑에게 알려줘야겠다.  

 

3.     오건해 선생님의 홍샤오로우 & 납작두부볶음

“독립운동가치고 오건해 여사의 음식을 먹어 보지 못한 사람은 독립운동가가 아니라는 말이 있을 정도로 음식 솜씨가 좋은 오건해 여사는 독립운동가의 뒷바라지에 평생을 보낸 분”


 오건해 선생님은 임시정부의 안살림과 독립운동가들의 수발을 드는데 정성을 다하신 여성 독립운동가다. 


만주의 거센 추위에서 오들오들 떨면서 조국의 독립을 위해서 애쓰는 임시정부 요원들을 포함한 독립운동가들이 집에 오면 오건해 선생은 아끼고 아껴두었던 기름기가 좔좔 흐르는 돼지고기 요리 홍샤오로우를 대접하셨다. 홍샤오로우와 함께 오건해 선생님의 납작두부요리 또한 임시정부 요원들 사이에서는 인기 만점이었다. 흔히 우리가 중국집에 가서 볼 수 있는 고추잡채요리를 연상케 하는 음식으로 피망, 양배추 등 각종 야채와 두부를 곁들여 속을 만들고 청양고추를 넣어 매콤하게 간을 한다. 이 매콤함을 꽃 빵에 넣어 먹으면 으~ 생각만 해도 벌써 맛있다.  


여성의 역할은 독립운동에서 빠질 수가 없다. 독립운동가들이 총과 칼로 싸울 때 여성들은 이들의 의식주를 책임지고 상처를 치료하고 간병을 했다. 이러한 여성들의 독립운동의 공로가 최근에 인정받기 시작했고, 오건해 선생님도 2017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받으셨다. 


4.     이동녕 선생님의 조선식 냉채 

일제강점기 신흥무관학교 소장을 맡으셨고 대한제국에서 대한민국이 될 때 대한민국 최초의 국회였던 임시의정원의 초대 의장을 맡으셨던 석오 이동녕 선생님. 대한민국 근대사를 아우르는 굵직굵직한 사건들 한가운데 계셨던 분이다. 일평생을 광복을 위해 헌신하셨지만, 결국 끝끝내 광복의 빛을 보지 못하시고 돌아가셨던 이동녕 선생님. 그러나 이동녕 선생님은 돌아가시는 순간까지 조국 광복을 바라셨고, 그의 유언으로 인해 오늘날 우리 역사 교과서에 등장하는 수많은 충칭 임시정부의 업적들이 생겨날 수 있었다.  


간략하게 요약을 하자면, 상하이 임시정부 시절 우리가 잘 아는 이봉창 의사와 윤봉길 의사의 의거로 우리 임시정부는 중국 장제스로부터 후원을 받으며 본격적으로 활동을 할 수 있었다. 그러나 그 말인즉슨, 일제의 감시가 훨씬 더 심해진다는 뜻이다. 식민지 국가의 조선인 한 두 명이 불러온 나비효과로 인해 중국의 지원을 받게 되었으니 일본은 눈에 불을 켜고 이 잡듯 독립운동가들을 색출해 내려고 혈안이 되었을 것이다. 이로써 임시정부는 오랜 시간 떠돌이 생활을 하며 숨어 지내야 했다. 이렇게 삼엄하고 숨 막히는 피란 생활 가운데 임시정부는 서서히 분열되기 시작했다.  


이제 그만 싸우고 분열되었던 3당을 합치자는 의미에서 회의를 하게 되었다. 이 기분 좋은 모임에 3당 합당을 반대하는 인물이 들이닥쳐 3명의 당 간부들을 쐈다. 그중에 김구 선생님도 있었다. (김구 선생님은 총상을 입고 급히 병원으로 실려갔지만, 중국 의사는 가망이 없다고 포기를 했다. 그러나 김구 선생님은 기적적으로 일어나셨고, 김구 선생님을 살뜰히 보살피고 간호한 인물이 바로 오건해 선생님이시다). 이 사건을 남목청사건이라고 한다.  


남목청사건을 듣고 이동녕 선생님은 매우 슬퍼하셨다. 돌아가시기 전에 모두를 부르셨다. 임시정부의 가장 큰 어른의 임종의 순간이라 3당 분열이고 뭐고 모두가 모인 자리였다. 이때 이동녕 선생님께서, 동지들, 우리가 나라를 잃고 광복을 하고자 한다면, 분열을 딛고 손에 손을 잡고 대동단결해주시오” 라는 말을 마지막으로 남기시고 1940년에 떠나셨다. 모두가 이 유언을 듣고 오열하고 반성을 했고, 결국 충칭으로 거처를 옮기고 임시정부는 다시 하나로 합쳐졌다. 모두를 단합시킨 이동녕 선생님이시다.  


이 임시정부의 대부 이동녕 선생님께서 상하이에서 독립운동을 하실 때 더위를 식히기 위해 즐겨 드셨다던 냉채를 독닙료리집에서 조선식 냉채로 재현했다. 이 냉채는 곽낙원 여사의 김치찜이나 오건해 선생님의 홍샤오로우 주문을 하면 같이 곁들여 나오는 음식이라고 했다. 늘 주역에 서기보다는 독립운동을 하는 후배들을 어른으로서 보살피고 옆에서 응원하셨던 이동녕 선생님처럼 냉채도 다른 음식들과 함께 곁들여 나왔던 것 같다.   


5.     지복영 선생님의 간식 총유병 

위의 이동녕 선생님의 유언대로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충칭에 가서 합당을 하면서 임시정부 최초의 정규군 한국광복군을 창설을 한다. 한국광복군에는 총사령관이셨던 지청천 장군이 있었고, 장군의 둘째 딸 지복영 선생님이 1920년에 태어나셨다. 


지복영 선생님이 태어났을 때 한국은 이미 식민지였다. 같은 시기 한성에서는 모던보이 모던걸들이 거리를 활보했다. 태어났을 때부터 식민지였기에 나라 잃은 서러움을 이해하기 어려웠던 젊은이들은 다방과 백화점을 누비며 신문물에 마음을 빼앗겼다. 그러나 지복영 선생님은 달랐다. 아버지를 따라서 5살 때부터 중국에서 생활을 하면서 전쟁의 처참함을 직접 두 눈으로 보며 한 명이라도 힘을 보태 하루빨리 이 전쟁을 끝내야겠다고 마음을 먹는다. 그리고 한국광복군 최초 여성 대원 중 한 명으로 입대를 하고 남성 대원들과 똑같은 훈련을 받는다.  


지복영 선생님은 여성이지만 자신도 남성과 똑같은 역량이 있다고 믿고 최전선에서 싸울 것이라고 다짐한다. 주변의 만류가 거셌다. 남편에 이어 딸까지 전쟁터에 내보내는 어머니의 마음은 어떠했겠으며 여자애가 혼기가 다 찼는데 시집은 안 가고 왜 그렇게 최전선에 나가려고 하느냐 주변에서 말렸다. 그러자 지복영 선생님은 아버지 지청천 장군께 긴 편지를 썼다.  


그리고 지청천 장군의 답장은 이러했다. 

 “남의 자식도 보내는데 내 자식이라고 못 보내겠느냐 잘 생각했다. 한국의 잔 다르크가 되거라.”  


일제강점기 때 많은 지식인들은 변절을 했고 남의 집 귀한 자식들을 전쟁터로 내모는 글을 썼다. 그들은 자신의 자식을 보호하기 위해 수십만 명의 남의 집 자식들을 전쟁터로 내보냈고, 그들의 죽음을 예찬했다. 부모가 아직 아닌 나로서는 백 퍼센트 다 이해할 수는 없지만, 당장 내 새끼 보호하기 위해서는 무슨 일이든 했을 부모의 심정이 이해가 안 가는 건 아니다. 


그러나 이러한 어려운 갈림길에 부끄럽지 않은 부모가 되기 위해, 그리고 당장의 안위보다는 자식에게 참된 가치를 알려주기 위해 피눈물을 머금고 아픈 선택을 한 부모들이 있다. 


안중근 의사의 어머니 조마리아 여사, 아버지 김구, 그리고 아버지 지청천이 대표적이다. 조마리아 여사는 아들 안중근에게 일제에게 비굴하게 목숨을 구걸하지 말고 겸허히 죽으라고 하고 아들의 수의를 지어 보냈다. 아버지 김구는 첫째 아들이 사경을 헤매는 와중에 약을 구해다 준다고 하는 임시정부 요원들을 말리며 다른 사람들도 약을 못 구해서 죽어가는 마당에 내 아들만 특별한 대우를 해줄 수 없다고 한다. 그리고 아들은 죽는다. 지청천 장군은 딸의 편지를 받고 눈물을 흘렸다. 그리고 딸에게 한국의 잔 다르크가 되라고 한다.  


그 순간의 선택 이후에 어떤 이는 돈과 명예를 얻었을 수도, 또 어떤 이는 피눈물을 흘리며 죽은 자식의 시체에 얼굴을 파묻었을 수도 있지만, 이들의 선택은 100년이 지난 오늘, 역사에서 냉정하고 분명하게 평가되었다.  


지복영 선생님과 관련된 음식을 소개하려다 잠깐 다른 길로 빠졌다. 여성 동지들의 독립운동 참여를 격려했던 지복영 선생님께서 평소 즐겨 드시던 간식으로 독닙료리집은 중국식 파전병을 소개하였다. 재료가 밀가루와 쪽파로 비교적 간단하지만 국내산 참기름을 곁들여 매우 바삭하고 고소했을 것 같다. 만들기 어려울 것 같지 않으니 한번 도전해봐야겠다.   


6.     서영해 선생님의 해산물 스튜와 밀빵 

서영해라는 존함은 정말 죄송하지만, 이번 편을 준비하면서 정말 처음 들어보는 이름이어서 조금 더 시간을 들여서 자료 수집을 했다. 서영해 선생님의 음식 또한 독닙료리집의 다른 중식 한식 요리와는 사뭇 다른 서양식 음식이었다.  


서영해 선생님은 당시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파리특파원으로 프랑스에서 홀로 한국 식민지의 부당함을 알리고 독립을 호소하기 위해 노력한 독립운동가다.  


서영해 선생님의 일생 또한 드라마 같다. 

어느 날 상하이 임시정부에 한 소년이 다급하게 찾아온다. 3.1 운동을 선동한 죄로 수배 중에 있던 열일곱 살의 서영해였다. 임시정부는 어린 서영해의 잠재성을 보고 프랑스로 유학을 보낸다. 서영해는 프랑스에서 빠르게 불어를 배우고 12년 정규과정을 6년 만에 끝내며 한국인 최초로 프랑스어 소설을 발간하기 시작한다. 

소설의 제목은 <어느 한국인의 삶과 주변>. 이 소설은 한국 독립 운동가를 주인공으로 한 역사 소설이었고 발간 1년 만에 5판을 찍어낼 정도로 엄청난 인기를 끌었다. 이렇게 서영해는 한국의 존재조차 모르고 있던 유럽에 식민지 국가의 국민으로서의 한을 프랑스어로 잘 구현해 알렸다. 서영해의 활약으로 프랑스인들을 포함한 유럽인들 사이에서의 한국에 대한 관심이 생겼다. 그리고 그의 글 한국의 문제는 국제정세 평론지 ‘에스프리’에 까지 실린다.   


“일본이 지배한 한국은 말 그대로 거대한 감옥이 되고 말았다. 일본은 조선인들의 가장 기본적인 자유조차 박탈했다." 


이때 기존적 자유라는 표현은 프랑스혁명을 경험한 프랑스인들에게 공감대를 불러일으키기 충분했다. 서영해 선생님은 어떤 독자들에게 어떠한 방법으로 공감대를 불러일으켜 호소를 해야 하는지 잘 알고 이를 실천했던 역사적 감수성이 있던 지식인이었다.  


1936년 9월 벨기에 브뤼셀 만국평화회의 홀로 참가를 해서 한국 독립의 당위성에 대해 역설하였고, 40 개국 대표를 일일이 방문해 한국 독립에 대한 지원을 호소하였다. 서영해 선생님은 말과 글로 일제의 총칼에 맞서 싸웠던 자랑스러운 임시정부 요원이시다. 


유럽에서의 독립운동은 생소했다. 김규식의 파리강화회의 그리고 헤이그특사를 제외하고서는 근대사에 등장하는 유럽의 비중은 극히 드물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이렇게 독립운동의 불모지와 같은 곳에서 홀로 외롭게 펜으로 우리나라의 독립을 위해 싸우신 서영해 선생님을 이제야 알았다는 게 너무 죄송스러웠다. 이 기회를 통해서 당시 1919년 이후의 파리에서의 대한민국 독립운동사에 대해서도 공부하게 되었다. 나중에 기회가 있으면 다뤄봐도 좋을 주제일 듯하다.  


이번에 서영해 선생님을 조명한 독닙료리집에게 새삼 감사하다. 유럽이라 동양 음식을 만들 식재료를 구하기 어려웠던 상황을 고려할 때 서영해 선생님께서는 비교적 쉽게 구할 수 있었던 해산물과 밀빵을 주식으로 드시며 활동하셨을 것이다.  


위에 소개한 음식들 외에도 하와이 노동자들이 즐겨 드셨다던 대구무침안중근 의사가 중국 하얼빈에서 즐겨 드셨다던 돼지고기 튀김 꿔바로우 등이 더 있지만, 나중에 따로 하와이 사탕수수밭에서 일했던 한인 노동자들과 효창공원을 소개할 때 안중근 의사에 대해 다루고 싶은 마음이 있어서 이 두 음식과 인물들은 아쉽지만 다음으로 미루겠다.  


독닙료리집은 지난 7월 21일에 성황리에 영업을 종료했고, 평일 평균 190명, 주말 250명 등 약 한 달간 6000명이 방문한 것으로 알려졌다. 평일 식사시간 대의 방문을 위한 사전 예약은 방문 2~3주 전에 모두 마감됐으며, 주말에는 한 시간 이상 대기해야 할 정도로 일반 대중에게 폭발적인 인기를 끌었다. 수익의 일부는 독립유공자 후손을 지원하기 위한 기부금으로 쓰였다니 더할 나위 없이 좋은 프로젝트였다

 

우리가 만약 나중에 돈을 많이 벌게 된다면, 그래서 당장 먹고 살 걱정이 없다면 (기분 좋은 상상) 무엇을 할 건지 가끔 신랑이랑 이야기하곤 한다. 그때 나는 내가 있을 학교에 (나는 나중에 미국 학교에서 가르치는 일을 하고 싶다) 소녀상을 세우는 일과, 한국에 있는 역사적 장소에 다국어 브로슈어를 제작하고 싶다는 이야기를 종종 한다. 그런데 나중에 내가 위의 일을 다 하고 나서도 조금 여유가 있다면, 뜻이 맞는 이들을 모아서 독닙료리집 2를 만들어보고 싶다. 내가 가지 못한다면 만들어보면 되겠지! 



간판 사진 신한희망재단


오늘도 긴 글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꾸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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