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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문준영 Oct 30. 2020

콘도띠에리 열전1

조반니 델레 반데 네레: 메디치 가문 출신의 용병대장

  상인, 은행가로 시작해 피렌체의 실질적인 지배자가 되는 메디치 가문은 르네상스를 대표하는 문화, 예술의 후원자로 유명하다. (역사적 현실과는 별개로) 지성과 문치, 덕치의 이미지가 강해 무인과는 거리가 멀 것 같은 메디치 가문이지만, 이 집안 출신 중에도 크게 이름을 떨친 용병대장이 한 사람 있었다. 바로 조반니 델레 반데 네레 (Giovanni delle bande nere)라는 이름으로 더 잘 알려진 루도비코(혹은 로도비코) 데 메디치(Ludovico/Lodovico de' Medici, 1498-1526)다. '반데 네레'는 영어로 옮기면 'Black bands'가 되는데, 그가 이끌던 부대의 군기에 검은색 줄무늬가 들어 있었기 때문에 붙은 별명이라고 한다.

  메디치 가문 출신이기는 하지만, 조반니의 무인 기질은 사실 외가쪽 혈통을 물려 받은 덕이라 할 수 있다. 그의 어머니는 밀라노 공작 갈레아초 마리아 스포르차의 딸 카테리나(Caterina Sforza, 1463-1509)로, 용병대장으로 일하다 밀라노의 권력을 장악하고 공작의 자리에 오른 프란체스코 스포르차의 손녀이기도 하다. 카테리나 스포르차는 세 번 결혼했고 8명의 자녀를 낳았는데, 조반니 델레 반데 네레는 그 중 마지막 결혼에서 얻은 막내다.

  메디치 가문이 피렌체 정계의 실력자로 부상하게 된 것은 조반니 디 비치(Giovanni di Bicci 1360-1429) 때였다. 그에게는 세 아들이 있었는데 장남이 코시모(Cosimo 코시모 일 베끼오 il Vechhio), 막내가 로렌쪼(Lorenzo)이고 코시모와 쌍둥이로 태어난 둘째는 일찍 죽었다. 피렌체의 실질적 지배자가 되는 것은 코시모와 그 자손들이고 로렌쪼와 그 후손들은 사업에 전념하며 정치에서는 제한적인 외교 임무만을 맡았다. 로렌쪼의 손자인 조반니 역시 피렌체의 사절로 포를리에 파견됐다가 실질적인 포를리의 통치자였던 백작의 미망인 카테리나 스포르차와 연인이 돼 결혼에 이르렀고, 둘 사이에 태어난 아들이 루도비코(조반니 델레 반데 네레)다.

메디치 집안 가계도

  그러나 아들이 태어난지 6개월도 안 돼 조반니는 병으로 세상을 떠났고 이듬해 겨울, 새 교황 알렉산데르 6세의 아들이자 교황군 사령관 체자레 보르지아의 침입에 맞서 싸우던 카테리나는 패전으로 포로가 돼 로마로 끌려갔다(카테리나 스포르차의 일대기는 '콘도띠에리와 여인들'편에서 자세히 설명하겠다). 카테리나의 미성년 자녀들은 여러 보호자에게 나눠 보내졌는데, 루도비코는 큰 아버지 로렌쪼가 맡았다.

  카테리나 스포르차는 아기 때 헤어진 막내 아들에 대한 애정이 각별했던 모양이다. 교황에게 모든 영지를 빼앗기고 1년 반만에 풀려나자 그녀는 다른 자식들을 제쳐두고 피렌체에 정착해 루도비코의 양육에 힘썼다. 그렇지만 몇 년 지나지 않아 폐렴에 걸려 갑작스레 사망했고, 아직 11살이던 루도비코는 카테리나의 절친인 루크레치아 데 메디치(Lucrezia de' Medici. 위대한 로렌쪼 Lorenzo de' Medici의 딸)와 야코포 살비아티(Jacopo Salviati) 부부에게 맡겨졌다.

  남편이 죽은 직후인지, 피렌체에서 아들을 다시 재회하게 됐을 때부터인지 알 수는 없으나 카테리나는 루도비코를 본명 대신 조반니라고 불렀던 것 같다. 아무튼 십대가 되자 조반니는 온화하고 교양있는 살비아티 부부의 갖은 노력에도 불구하고 통제 불가능할 정도로 사고를 치고 다녔다. 어릴 때부터 말타기, 검술 등에 남다른 재능을 보이며 이를 열심히 연마한 것까지는 좋았으나 곧 또래들과 싸움을 벌이다가 상해, 치사 사고까지 일으킨 것이다.

  결국 적성을 살려 군인이 된 그는 불과 18살의 나이에 같은 메디치 가문 출신인 교황 레오 10세에게 고용돼 우르비노 공작 프란체스코 마리아 델라 로베레(Francesco Maria della Rovere)와 싸우는 전투에 참가했다. 이후 1520년 소규모 부대를 지휘해 교황청에 반기를 든 마르케 지방 영주들을 진압하는 공을 세워 레오 10세의 신임을 얻었고 이듬해 교황이 황제 카를 5세와 함께 프랑스에 대항한 전쟁을 하게 되자 사령관 프로스페로 콜론나(Prospero Colonna. 유서깊은 귀족인 콜론나 가문 출신의 용병대장. 마키아벨리 <전술론>에서 가상의 대화 속 화자로 등장하는 용병대장 파브리찌오 콜론나는 그의 사촌이다) 휘하로 참전한다. 그 해 12월 레오 10세가 갑작스럽게 사망하자 조반니는 거액의 보수를 약속한 프랑스왕과 계약을 맺고 하루 아침에 편을 바꿨다(1522). 그러나 조반니의 경기병을 활용한 빠르고 과감한 기동전술과 효율적인 보병활용 능력을 높이 산 황제는 더 좋은 조건을 제시하며 1년만에 그를 다시 교황-황제 연합군 편으로 데려온다(1523). 조반니는 반 년 뒤 베르가모 인근에서 적군의 프랑스 기병-스위스 보병 혼성부대를 완파하며 황제의 기대에 부응한다(카프리노 베르가마스코Caprino Bergamasco 전투, 1524).

추기경 줄리오 데 메디치(왼쪽. 훗날 클레멘트 7세가 됨)와 교황 레오 10세

하지만 이 때 예기치 못한 상황 변화가 일어난다. 또 다른 메디치 가문의 인물, 레오 10세의 사촌 줄리오가 교황의 자리에 오른 것이다(클레멘트 7세). 마침 조반니는 자신의 부대를 유지하느라 많은 빚을 지고 고민하고 있었는데, 클레멘트7세는 그 빚을 대신 갚아주고 그를 교황군에 고용했다. 문제는 새 교황 클레멘트가 편을 바꿔 프랑스 왕과 손잡았다는 사실이다. 따라서 교황군의 일원인 조반니는 이제 황제군과 싸우게 됐다. 결과적으로 이것이 그에게는 불운의 시작이었다.

 1524년 가을, 대군을 동원해 이탈리아로 다시 들어온 프랑수아 1세는 단숨에 밀라노를 점령하고 파비아로 진군했다. 밀라노에서 프랑스 왕과 합류한 조반니는 1525년 2월 중순 선발대를 이끌고 마주친 적 소부대와 교전하다 다리에 총탄을 맞고 중상을 입었다. 그가 긴급 수술을 위해 후방으로 이송된 사이 프랑스군 본대는 파비아에서 황제군과 큰 전투를 벌였으나 대패하고 프랑수아 1세는 카를 5세 황제의 포로로 붙잡힌다.

  하지만 전쟁은 이것으로 끝이 아니었다. 황제에게 순종하겠다는 약속을 하고 풀려난 프랑소아 1세는 곧바로 약속을 뒤집었다. 교황을 포함해 베네치아, 피렌체, 밀라노 등 이탈리아 주요 국가들과 동맹을 결성하고(꼬냑 동맹, 1526) 카를 5세를 이탈리아에서 몰아내기 위해 또 다시 군사를 일으킨 것이다. 오랜 치료 끝에 부상에서 겨우 회복한 조반니는 이번에도 교황의 명으로 동맹군으로 참전했다. 7월 초, 동맹과 프랑스의 군대는 황제의 대군이 진격해 오자 본영인 밀라노를 버리고 후퇴하는데, 조반니는 이때 자신의 부대를 이끌고 후방에서 추격해 오던 황제군의 악명높은 독일용병단(란츠크네히트Landsknechts)을 격퇴하는 전과를 올린다. 그러나 이 전투는 그의 마지막 승전이었다. 11월 25일, 만토바 인근에서 벌어진 전투에 나선 조반니는 포탄에 맞아 또 다시 심각한 부상을 입었다. 즉시 가까운 곤자가(Aloisio Gonzaga) 후작의 성으로 후송돼 오른쪽 무릎 아래를 절단하는 수술을 받았지만 며칠 후 감염에 의한 폐혈증으로 사망했다(1526.11.30).

  10년 남짓되는 비교적 짧은 용병 경력과 상대적으로 미미한 승전 기록에도 불구하고 조반니 델레 반데 네레는 생전에는 물론이고 사후에도 상당히 큰 명성을 누렸다. 메디치 가문 출신에 카테리나 스포르차의 아들이라는 배경 때문에 일찍부터 주목받은 덕이기도 하지만, 조반니 자신이 남다른 군사적 재능을 널리 인정받고 있었던데다가 마키아벨리, 귀차르디니(Francesco Guicciardini) 등 당대 대표적인 지식인들의 증언이나 기록에도 여러 번 언급됐기 때문이다. 특히 괴짜 문인으로 유명한 피에트로 아레티노(Pietro Aretino)와는 사적인 친분도 깊었다고 하는데, 실제로 아레티노는 조반니가 수술을 받고 죽을 때까지 마지막 5일간 함께 있었던 소수의 측근들 중 한 사람이었다(아레티노는 당시 상황과 목격담을 어느 서신에서 증언으로 남겼다).

코시모 1세(좌)와 조반니 델레 반데 네레(우) 초상화

  마테오 반델로(Matteo Bandello)라는 동시대 작가는 조반니가 마키아벨리와 직접 만난 적도 있다면서 다음과 같은 일화를 전하기도 한다. 1526년, 피렌체 정부에 다시 고용돼 일하던 마키아벨리는 공무를 띠고 피아첸차에 주둔 중인 꼬냑 동맹군 사령부를 방문했다. 여기에서 조반니를 만났는데 <전술론>을 읽어 본 적 있는 조반니가 마키아벨리에게 자신의 병사 2천명을 지휘해 책에서 설명한 진형을 보여 줄 수 있냐고 즉석에서 제안했다. 제안을 받아들인 마키아벨리는 진땀을 빼며 두 시간 가까이 이리저리 병사들을 움직여 보려 애썼지만 뜻대로 되지 않았다. 조반니는 호탕하게 한 번 웃더니 '이러다 점심도 못 먹겠소' 한 마디 하고는 고수와 나팔수에게 간단히 몇 마디 명령을 내렸다. 북과 나팔 신호가 떨어지자 병사들은 일사불란하게 대열을 바꾸어가며 몇 가지 진형을 펼쳐 보여 마키아벨리를 무안하게 했다는 이야기다. 가벼운 에피소드로 조반니의 긍정적인 이미지를 보여줄 수 있는 그럴듯한 이야기지만 실제로 있었던 일인지는 분명치 않다. 1526년 단 며칠 간 마키아벨리와 조반니가 피아첸차에 같이 있었다는 사실만 확인될 뿐, 이 일화를 증언한 다른 인물들은 없기 때문이다(반델로는 물론 현장에 없었다).

   사실 조반니의 명성은 그의 사후에 더욱 크게, 널리 퍼지고 미화됐다. 초기에는 특히 조반니의 아들 코시모가 이런 미화된 이미지 생산에 큰 영향을 미쳤다. 조반니는 한 살 어린 살비아티 부부의 딸 마리아와 스무 살 무렵에 결혼해 1519년 아들을 낳았는데, 이 코시모가 나중에 코시모 일 베끼오 후손들의 대가 끊기자(1537) 피렌체의 권력을 물려받는 초대 토스카나 대공 코시모 1세(Cosimo I de' Medici)다. 코시모 1세는 부친 조반니를 기리기 위해 바치오 반디넬리(Baccio Bandinelli)라는 조각가에게 기념물 제작을 의뢰했고 그 결과 만들어진 것이 오늘날 피렌체의 산 조반니 교회 앞에 놓여있는 대리석 좌상이다. 이 석상의 조반니는 고대 로마 장군의 갑옷을 입고 신전을 연상시키는 구조물 위에 앉아 있어 마치 고전 시대의 영웅과 같은 모습으로 묘사돼 있다.

반디넬리의 조반니 델레 반데 네레 기념물(1540)

  조반니의 미화된 이미지를 만드는 데 기여한 것은 메디치 가문의 후손들만이 아니다. 이탈리아인들의 통일, 독립 열기가 한창이던 리소르지멘토 시기(1790년대 혹은 1810년대부터 1871년까지)에는 여러 작가와 지식인들이 촉망받던 젊은 용병대장에 불과하던 조반니를 메디치 가문, 피렌체를 넘어선 일약 이탈리아의 영웅으로 만들어 놓았다. 역사가 에르콜레 리코티(Ercole Ricotti)는 마키아벨리, 아레티노를 비롯한 많은 동시대인들의 (대부분 단편적 언급에 불과한) 호의적인 기록이나 증언들을 찾아내 조반니를 요절한 불세출의 명장으로 신화화했고(1844), 루이지 카프라니카(Luigi Capranica)는 1857년 스테디셀러가 된 소설 <조반니 델레 반데 네레>를 펴내 애국적 영웅으로 그를 묘사했다. 무엇보다 리소르지멘토 시대 낭만적 민족 영웅으로 각색된 조반니의 이미지를 가장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것은 우피치 미술관 외부 회랑 벽에 세워진 조반니의 석상이다. 1854-6년 조각가 테미스토클레 궤라찌(Temistocle Guerrazzi)가 제작한 이 석상의 제막식에서 기념 연설에 나선 한 명사는 조반니를 '이탈리아의 영웅, 피렌체인들의 애국심을 상징하는 표본'이라고 칭송했다. 제막식 연설의 찬사가 아니더라도 궤라찌가 제작한 석상은 그 자체로 낭만적 영웅의 풍모가 확연히 드러난다. 우수에 찬 강렬한 눈빛으로 고개를 들어 먼 하늘을 응시하는 석상의 조반니는 양손에 칼을 쥐고 있는데, 칼날에는 '이유없이 나에게 칼을 뽑지 말라. 용기없는 자 나에게 대적하지 말라(Non mi snudare senza ragione. Non mi impugnare senza valore)' 라는 문구가 쓰여있다. 물론 조반니의 칼에 진짜로 이런 문구가 새겨져 있었는지는 알 수 없고 조각가의 창작일 뿐이다. 오늘날의 눈에는 마치 마카로니 웨스턴(이탈리아에서 제작된 미국 서부 배경 활극 영화. 스파게티 웨스턴으로도 불리며 6, 70년대 유행했다)에 등장하는 총잡이 같아 보이는 이 석상의 표정과 포즈는 그러나 당시 낭만적 영웅의 전형적인 모습이었다.

테미스토클레 궤라찌의 조반니 델레 반데 네레 석상

  배타적 민족주의, 국수주의가 극에 달했던 파시스트 정권 시대(1922-43)가 되면 조반니의 이미지는 더욱 미화되고 가공된다. 그를 다룬 수 많은 역사책과 소설들이 쏟아져 나왔고 그 대부분은 단순한 비운의 영웅, 애국자의 수준을 넘어서 외세를 몰아내고 이탈리아를 '통일'하려는 꿈을 가진 확고한 민족주의자로 조반니를 설명하고 있다. 심지어는 조반니가 생전에 '반데 네레(검은 깃발/띠)'라는 별명 외에도 '이탈리아의 조반니(Giovanni d'Italia)'라고 불렸다는 근거 희박한 주장까지 널리 인용될 정도였다.

  그러나 누가 뭐래도 파시즘시대에 왜곡 생산된 이 메디치 가문 사나이의 신화 중 끝판왕은 1937년 개봉한 영화 <콘도띠에리 Condottieri>일 것이다. 남부 티롤 출신의 독일계 이탈리아 영화인 루이스 트렌커(Luis Trenker)가 감독과 주연을 맡아 이탈리아와 독일 합작으로 제작된 이 영화는 조반니 델레 반데 네레의 '일대기'를 다루고 있다지만 실질적으로 그 줄거리는 완전한 허구에 가깝다. 영화에서 시종일관 검은색의 갑옷과 투구를 착용하고 검은 군기와 함께 등장하는 주인공 조반니와 그의 부대 병사들은 로마로 '진군'해 간신배와 외국 군대를 몰아내며 교황을 감화시키는가 하면, 마지막 전투에서는 외국 세력(영화에서는 정체불명이나 역사적 사실과 달리 독일인 군대는 아님)과 결탁한 배신자 말라테스타(가상의 인물)의 군대를 물리친다. 역사적 사실과는 분명히 다른 이런 줄거리를 구상한 의도는 자명하다. 무솔리니(Benito Mussolini)와 파시스트 검은 셔츠단의 로마진군(1922.10.28), 라테란 조약(1929.2 통일 후 계속되던 이탈리아 정부와 교황청의 대립을 공식적으로 끝냄), 공산주의-사회주의 세력의 위협을 잠재우고 이탈리아를 '구한' 파시스트 '혁명' 등 영화 속 조반니를 통해 파시즘 정권의 지도자와 그 업적을 상기시키려는 것이다.

영화 <콘도띠에리, 1937>의 한 장면과 홍보 포스터

  물론 영화 속 조반니와 부하들의 검은 갑옷은 감독이나 각본가들이 처음으로 꾸며 낸 설정은 아니다. 이미 리소르지멘토 시대부터 '반데 네레'가 '검은 깃발/띠'가 아니라 '검은 군대'를 뜻한다고 믿은 사람들이 꽤 있었다. 사실 이런 오해는 반데(Bande)라는 단어가 여러가지 의미를 가지기 때문에 생긴 것이다. 영어의 Band에 해당하는 이탈리아어 Banda(Bande의 단수형)는 Band처럼 '줄무늬, 띠'를 뜻하기도 하고 일단의 '무리, 떼, 집단'을 의미하거나 '악단'을 가리킬 때도 있다. 역사적인 증거에 의하면 조반니의 경우 반데(Bande)는 줄무늬를 뜻하는 것으로 보아야 한다. 그 시대의 대다수 용병대장들처럼 조반니도 개인 사병집단을 거느리고 있었는데, 1521년 레오 10세가 사망하자 자신을 아껴준 교황을 애도하는 의미로 부대 군기에 검은 띠를 넣었다는 분명한 당대 기록이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조반니 델레 반데 네레는 '검은 깃발'의 혹은 '검은 띠'의 조반니로 이해하는 게 맞다. 조반니와 그의 부대가 동일한 애도의 의미로 검은 갑옷을 입기 시작했다는 주장이 꾸준히 있었지만 실질적 증거는 아직 제시된 바 없다.

  조반니 데 메디치, 일명 조반니 델레 반데 네레는 이처럼 비범한 출신 배경과 확실한 군사적 재능을 지닌 촉망받는 인물이었음은 분명하다. 그러나 그가 사후에 누린 명성과 국민적 영웅의 이미지는 후대의 필요에 의해, 시대의 열망에 따라 만들어지고 가공된 것에 가깝다. 생전에 레오10세, 마키아벨리나 아레티노 같은 몇몇 인물들의 마음 속에 피렌체의 군사적 운명을 맡길 수 있으리라는 희망을 한 때나마 심어준 것은 사실이지만 군인으로서, 영웅으로서 동시대에 그가 차지한 역사적 비중은 그 정도일 뿐이다. 어쩌면 메디치 가문의 유일한 군인 조반니가 역사에 남긴 가장 큰 족적은 토스카나 대공이 되는 아들 코시모를 낳았다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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