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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문준영 Jul 04. 2020

르네상스 미술과 콘도띠에리2

파올로 우첼로 <산 로마노 전투>와 두 명의 콘도띠에리

   <몬테마씨 공략도> 이후 한 세기가 지나는 동안 유명 용병대장이나 그들의 고용주였던 영주의 업적을 기리기 위해 제작된 기마 인물상/인물도가 이탈리아 곳곳에서 여럿 등장했다. <칸그란데 델라 스칼라 기마 석상(작자 미상. 1330?)>을 비롯해 보니노 다 캄피오네의 <베르나보 비스콘티 기마상(1363)>, 야코포 델라 퀘르치아의 <파올로 사벨리 목조 기마상(1405?)>, 파올로 우첼로의 <존 호크우드 기마도(1436)> 등이 지금까지 남아있는 대표적인 이 시기 작품들이다. 이들 작품 속의 주인공들은 <몬테마씨 공략도>의 귀도리치오처럼 모두 근엄한 표정과 자세를 하고 천천히 걷거나 서 있는 말을 타고 있다. 왕이나 황제들만 기마 포즈로 묘사하던 관행은 깨졌지만 말을 타고 있는 인물을 표현하는 방식은 아직도 정형화된 틀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단 뜻이다. 파올로 우첼로의 <산 로마노 전투 (1438-55?)>는 이런 의미에서 또 다른 혁신을 대표한다고 볼 수 있다. 말 탄 인물을 역동적인 자세로 표현한 서양 미술사상 거의 (중세 이래로) 최초의 그림이기 때문이다.

   이 작품이 중요한 이유는 또 있다. 산 로마노 전투는 (전략적으로 크게 중요한 사건은 아니지만) 르네상스 시대 전형적인 대규모 기병전의 사례로 꼽히는 전투 중 하나인데 우첼로의 이 그림은 그 사건의 경과를 시간 순서에 따라 생생하게 묘사하고 있어 중요한 기록물로서 가치를 지닌다. 또한 세밀하게 그려진 각종 무구와 장비들, 흥분해 뛰어오르는 말, 적의 창을 맞고 낙마하는 기사, 바닥에 널브러진 부러진 창과 투구, 쓰러진 병사와 말 등 이 작품의 뛰어난 사실성과 전투 중의 혼란을 표현한 현장감은 동시대 어느 그림보다도 앞선 것으로 평가받는다. 우첼로의 전투 장면 묘사가 그 당시 일반적인 회화 표현에 비해 얼마나 뛰어났는지는 거의 같은 시기에 제작된 다른 대가의 그림과 비교해 보면 더 확연히 드러난다(아래 두 그림 참조).

그림 1: 파올로 우첼로 <산 로마노 전투> 중 두 번째 패널(1438-55?), 피렌체 우피치 미술관
그림 2: 피에로 델라 프란체스카 <이라클리오스와 호스로 2세의 전투> (1452-59?)

   하지만 미술사가들은 대체로 다른 측면에서 우첼로의 이 작품에 큰 의미를 부여한다. 서양 회화가 중세의 관습을 벗어나 르네상스로 접어들면서 나타난 결정적인 현상 중 하나가 바로 원근법의 구현이다. 파올로 우첼로는 원근법을 마스터하기 위한 실험과 노력에 누구보다 열성적이었던 화가로 알려져 있는데 이 <산 로마노 전투>는 이런 그의 노력이 뚜렷이 드러나는 대표적인 작품인 것이다. 특히 세 부분으로 이뤄진 이 그림에서 첫 번째 패널은 선원근법의 효과를 의식적으로 강조한 구도 덕분에 마사초의 <성 삼위일체>와 함께 르네상스 초기 화가들의 원근법 실험을 보여주는 사례로 미술사 전문가들에 의해 자주 언급된다.

그림 3: 파올로 우첼로 <산 로마노 전투> 중 첫 번째 패널(1438-55?), 런던 내셔널 갤러리

   물론 <산 로마노 전투>의 시도는 여전히 원근법 발전의 초창기인 만큼 완벽하진 않다. 가장 큰 문제는 화면 구성이 너무 인위적이라는 점이었다. 선원근법을 확실하게 표현하는 데 치중하다 보니 버려진 창, 쓰러진 병사를 일부러 줄 맞춰 배열한 듯 가지런히 늘어놓아 실제 전투 현장답지 않게 부자연스럽고, 일부는 화면 앞쪽의 사물이 뒤에 있는 물체보다 작게 그려지는 등 거리에 따른 비례를 정확히 반영하지 못한 부분도 있기 때문이다. 원근법 효과를 분명히 드러내려고 그랬겠지만 야외 들판이라는 배경에 어울리지 않게 전장 바닥의 질감을 마루처럼 매끈하게 표현한 것도 그림의 사실성을 떨어뜨리는 요소다.

   역사적 중요성과는 별개로 <산 로마노 전투>는 그림에 얽힌 많은 이야기가 알려져 있는 작품이기도 하다. 우선 이 그림이 제작된 배경에 대해 알아보자.

   1432년 피렌체는 베네치아와 손잡고 밀라노-시에나-루카 연합에 대항해 전쟁 중이었다. 그 해 봄 밀라노의 지원을 받은 시에나 군대가 변경의 여러 고을을 약탈하며 도발하자 피렌체군 총사령관 니콜로 다 톨렌티노Niccolò da Tolentino는 병력을 이끌고 대응에 나섰다. 시에나-밀라노군이 피렌체의 서쪽 국경으로 향한다는 보고를 받은 톨렌티노는 추격을 서두른 끝에 6월 1일 아침, 산 로마노 교외에 있는 적군을 따라잡았다. 예상보다 훨씬 많은 적 병력에 잠시 고민하던 톨렌티노는 전령 두 명을 급파해 수 km 뒤에 떨어져 있는 부사령관과 후미 부대에게 빨리 합류할 것을 명하고, 자신은 병사들과 함께 곧바로 공격을 개시했다. 전투는 6-7시간 계속됐다. 맹렬한 기세로 밀어붙이는 피렌체군이 한 때 승기를 잡는 듯했으나 시간이 갈수록 수적으로 약간 우위에 있던 시에나-밀라노군이 거세게 반격하며 전세가 역전되기 시작한다. 그러나 이 결정적인 순간 시에나-밀라노군의 두 지휘관이 잠시 의견 충돌을 보이는 바람에 톨렌티노는 흐트러진 전열을 재정비할 수 있었고, 때마침 전령의 연락을 받은 피렌체군 후미 부대까지 전장에 도착했다. 결국 후방에 나타난 피렌체의 원군에 당황한 시에나-밀라노군은 전투를 포기하고 급히 퇴각했다.

   양측의 사상자는 비슷하거나 시에나-밀라노측이 근소하게 많은 정도로 추정되므로 전투 자체의 승패를 따지는 것은 무의미하지만, 시에나-밀라노군이 먼저 전장에서 이탈했고 피렌체는 자국 영토에서 적을 몰아낸다는 목표를 달성했으니 산 로마노 전투는 피렌체의 전략적 승리라 할 수 있다. 따라서 동원된 병력 규모(피렌체군만 해도 기병 4천, 보병 2천)에 비해 큰 승리는 아닐지라도 피렌체 쪽에서 이 전투를 기념하고 싶어 하는 사람들이 있는 것은 당연하다. 파올로 우첼로에게 이 그림을 의뢰한 인물도 그중 한 사람이다. 피렌체의 은행가이자 상인 레오나르도 바르톨리니 살림베니Leonardo Bartolini Salimbeni는 산 로마노 전투 당시 피렌체 정부의 전쟁 수행을 총괄하던 전쟁 위원회의 위원이었다. 자신이 재직하던 당시 거둔 이 승전을 매우 자랑스러워하던 그는 1438년 재혼을 기념해 신혼집의 홀 한쪽 벽면에 걸어 놓을 목적으로 우첼로에게 그림 제작을 부탁한다. 우첼로는 오랜 작업 끝에 세 부분으로 된 템페라화를 완성하는데, 산 로마노 전투의 과정을 시간순으로 묘사한 이 패널들은 각각 3.2m x 1.8m 에 이르는 거대한 크기였다.

그림 4: 파올로 우첼로 <산 로마노 전투> 중 세 번째 패널(1438-55?), 루브르 박물관. 검은 말을 탄 인물이 아텐돌로

  레오나르도가 아끼던 이 그림은 그의 사후 두 아들 다미아노와 안드레아가 물려받았다. 문제는 피렌체의 권력자 로렌쪼 데 메디치Lorenzo de' Medici(위대한 로렌쪼)가 이 그림을 너무나도 탐냈다는 사실이다. 로렌쪼는 레오나르도의 아들들에게 그림을 팔라고 집요하게 설득하지만, 다미아노만은 그 어떤 제안도 받아들이지 않았다. 결국 1484년 어느 날 밤, 로렌쪼에 고용된 여러 인부들이 다미아노의 집에서 그림을 몰래 훔쳐 나왔고 이후 한 동안 자취를 감췄던 우첼로의 걸작은 몇 달 뒤 로렌쪼의 침실 벽에 걸려 있었다. 분노한 다미아노는 로렌쪼를 절도 혐의로 고발하고 심지어 재판에서도 승소했지만 끝내 피렌체 최고 권력자의 수중에 있는 그림을 돌려받을 수는 없었다. 그렇게 우첼로의 대작은 수 백 년간 메디치 가문의 재산으로 남아 있다가 1743년 가문의 마지막 상속녀 안나 마리아 루이사의 유언에 따라 수많은 다른 예술품들과 함께 피렌체 시에 기증됐다.

   로렌쪼는 이 그림을 매우 아꼈던 반면 취향이 다른 후손들은 관리를 소홀히 했다. 때문에 오랜 세월이 지나는 동안 그림은 색이 바래는 등 상당히 훼손됐고 피렌체 시가 기증받았을 땐 거의 잊혀진 작품이 돼 있었다. 메디치 가문의 소장품을 바탕으로 우피치 미술관이 새롭게 설립됐지만 <산 로마노 전투> 패널 세 점은 지하 보관소에 처박히는 신세가 됐다. 이후 19세기 초 우피치 미술관은 운영자금을 마련하기 위해 이 그림의 첫 번째와 세 번째 패널을 미술품 거래상에게 매각했는데 몇 년 뒤 영국 내셔널 갤러리와 프랑스 루브르 박물관이 이를 한 점씩 사들였다. 이상이 <산 로마노 전투>의 세 부분이 뿔뿔이 흩어져 각각 런던, 피렌체, 파리에 있게 된 사연이다.

   우첼로의 이 템페라화에는 실제 산 로마노 전투에서 양 군대를 이끌었던 주역들이 등장한다. 피렌체군 사령관 니콜로 다 톨렌티노와 부사령관 미켈레토 아텐돌로Micheletto Attendolo, 시에나-밀라노군 사령관인 프란체스코 피치니노Francesco Piccinino와 베르나르디노 델리 우발디니Bernardino degli Ubaldini가 그들인데, 연구자에 따라 네 사람이 모두 등장한다고 보는 경우도 있고 피치니노를 제외한 3인만 식별할 수 있다고 판단하기도 한다. 피치니노와 아텐돌로는 다음 기회에 다루기로 하고 이 글에서는 나머지 두 사람의 용병대장들에 대해 이야기하겠다.

그림5: 파올로 우첼로 <산 로마노 전투>에 그려진 톨렌티노 세부(좌)와 안드레아 델 카스타뇨 <말 탄 모습의 니콜로 다 톨렌티노>, 피렌체 산타 마리아 델 피오레(우)

   피렌체가 승전을 기념하기 위해 제작한 작품이므로 우첼로의 그림에서 두 명의 피렌체군 지휘관들은 모두 위엄 있는 모습으로 가장 눈에 잘 띄도록 그려져 있다. 두 사람 모두 전투 장면에 어울리지 않게 투구 대신 크고 화려한 사령관의 비단 모자를 쓰고 있어 얼굴을 알아볼 수 있고 각각 화면 정 중앙에 위치한다. 이 중 눈처럼 하얀 말을 타고 사령관의 지휘봉을 들고 있는 첫 번째 패널의 인물이 니콜로 다 톨렌티노(?-1435)다.

   톨렌티노의 본명은 니콜로 마우루찌Niccolò Mauruzzi로 마르케Marche 지방에 있는 톨렌티노라는 지역의 영주 집안 출신이다. 1350년 경 태어났다고 보는 견해가 많지만 실제로는 그 보다 10년 이상은 뒤로 봐야 하지 않을까 생각한다. 1350년 생이면 산 로마노 전투 당시 82살이 되는데 르네상스 시대의 평균 수명과 노인들의 일반적인 건강상태를 감안하면 현역 지휘관으로 전투에 나섰다고 믿기 어려운 나이기 때문이다. 아무튼 톨렌티노는 가문의 친척 어른들과 갈등을 일으키다 이른 나이에 고향을 떠나 용병 생활을 시작했다. 1406년 크레모나Cremona 영주에게 고용돼 처음으로 큰 부대의 지휘를 맡았고, 1413년 경부터 파노Fano 군주 판돌포 3세 말라테스타Pandolfo III Malatesta에 중용돼 그의 군대를 위해 10년 가까이 일했다. 1423년 밀라노 공작이 남쪽의 로마냐 지방으로 세력을 확대하려 시도하면서 이를 막으려는 피렌체와 전쟁이 벌어진다. 톨렌티노는 개전과 함께 피렌체에 고용됐는데 총사령관이던 니콜로 피치니노(프란체스코 피치니노의 부친)가 계약을 어기고 밀라노 공작에게 가 버리자 그의 후임으로 피렌체군을 지휘하게 됐다. 1427년에는 피렌체의 원군을 이끌고 유명한 마클로디오Maclodio 전투에 참전해 동맹 베네치아가 밀라노군을 대파하는 데 크게 일조한다.

   이후 한 때 교황군 사령관에 임명돼 볼로냐 반란 진압 작전을 이끌었으며(1428-9), 오랜 적대관계였던 밀라노 공작과 계약을 맺고 잠시 베네치아와 싸우기도 하지만(1431) 곧 피렌체로 돌아와 다시 총사령관직을 맡았다. 백발의 노장은 로마노 승전으로 더욱 피렌체 정부의 신임을 얻었으나 뜻밖의 사태가 일어난다. 1433년 그와 각별한 사이인 코시모 데 메디치Cosimo de' Medici(로렌쪼의 조부.코시모 일 베끼오)가 권력남용 혐의로 정적들에 의해 투옥된 것이다. 전선에 있던 톨렌티노는 그를 구하기 위해 피렌체 시내로 진군하려 했는데 코시모의 뜻에 따라 메디치 일가가 만류한 덕분에 뜻을 접었다.

   코시모가 추방당한 뒤에도 마르케, 로마냐 지방에서 분전하던 톨렌티노는 피렌체와 동맹 지도부의 오판으로 결정된 무리한 작전을 수행하다 1434년 8월 밀라노군에게 사로 잡혔다. 피렌체는 물론이고 동맹인 교황과 베네치아가 모두 나서 몸값을 지불하고 그를 석방시키려 애썼으나 밀라노 공작은 모든 제안을 거절했다. 톨렌티노가 이듬해 봄 감옥에서 병사하자 피렌체는 그의 시신을 돌려받아 예를 다해 장례를 치르는 한편, 두오모 내부 한쪽 벽면에 노장을 기리는 대형 기마 초상화를 제작했다(그림 5 오른쪽).

   국내에 출간된 일부 책에서 니콜로 다 톨렌티노에 대해 잘못 기술한 정보가 하나 있다. 그가 좋은 보수를 제시하는 쪽으로 쉽게 편을 바꾸는 인물이었다는 설명인데 완전히 틀린 얘기다. 실상은 그 반대에 가깝다. 톨렌티노가 여러 고용주를 전전하며 일했고 심지어는 전쟁이 계속되는 와중에 줄곧 적이었던 밀라노와 계약을 맺어 편을 바꾼 일도 있지만(그나마도 그의 경력을 통틀어 단 한 번밖에 없다), 이는 당시 용병들의 일반적인 행태와 비교하면 결코 잦았다고 볼 수 없는 수준이다. 게다가 그는 말라테스타, 피렌체와는 이례적으로 장기간 계약을 지속했으며, 무엇보다 중요한 점은 항상 계약 기간을 잘 지켰다는 사실이다. 르네상스 시대 전쟁에서는 계약 기간을 모두 채웠다면 곧바로 어제의 적과 계약하더라도 절대 배신으로 간주되지 않았다. 그가 계약 기간을 다 채우지 않고 새 고용주와 계약한 일은 딱 한 차례, 밀라노 공작과 의견 충돌 끝에 피렌체의 제안을 받고 떠나 버렸을 때(1431) 뿐이다. 피렌체인들이 평소 자신들의 도시에 대한 톨렌티노의 신용과 충성을 높이 평가하지 않았다면 과연 사후에 기마 초상화를 제작해 그를 추모했을까? 상인들의 도시는 승리의 영광보다 신의를 더욱 값지게 여기는 법이다.

그림6: <산 로마노 전투> 두 번째 패널 중 베르나르디노 우발디니(좌)와 우발디니 가문의 문장(우)

   <산 로마노 전투>의 두 번째 패널에는 시에나-밀라노군을 지휘한 용병대장 베르나르디노 델리 우발디니(1389? 90?-1437. 베르나르디노 델라 카르다Bernardino della Carda로 더 많이 알려짐)가 등장한다. 화면 한가운데 적의 창을 맞고 말에서 떨어지고 있는 인물인데(그림 1, 6 참조) 정말로 산 로마노 전투 중 창에 맞아 낙마했는지는 알 수 없다. 그의 집안은 대대로 용병 일을 하는 움브리아의 한미한 소귀족으로 베르나르디노의 아버지 오타비아노Ottaviano 때 아페끼오Apecchio와 카르다를 다스리는 군주가 됐다. 젊은 시절부터 마르케와 움브리아Umbria에서 말라테스타 집안에 맞서 싸우는 소군주들에게 고용돼 경력을 쌓았고 당대 최고의 콘도띠에로 중 한 명인 브라치오 다 몬토네Braccio da Montone 휘하에도 있었다.

   우발디니는 1418년 무렵부터 부친의 절친한 협력자였던 우르비노Urbino의 군주 귀단토니오 다 몬테펠트로Guidantonio da Montefeltro 백작에게 고용돼 옛 스승 몬토네의 공격으로부터 백작과 교황(백작의 주군)의 움브리아 영토를 지키기 위해 싸운다. 우발디니의 용맹에 크게 만족한 몬테펠트로 백작은 그를 자신의 딸 아우라Aura와 결혼시켰고(1420),  이때부터 장인과 사위는 평생의 우방이자 주군-가신으로 돈독한 관계를 유지했다.

   1425년 우발디니는 피렌체에 고용돼 대 밀라노 전쟁에 참전했다 포로가 됐으나 이듬해 탈출에 성공, 피렌체-베네치아 연합군에 합류한다. 연합군의 총사령관 카르마뇰라 백작은 우발디니에게 피렌체군을 지휘하는 니콜로 다 톨렌티노를 보좌하도록 하는데, 두 사람은 1427년 10월 마클로디오 전투에서 카르마뇰라의 유인책에 걸려든 밀라노군을 기병부대로 급습해 큰 공을 세운다. 공교롭게도 5년 뒤 적으로 만나는 우발디니와 톨렌티노가 마클로디오에서는 긴밀한 협력으로 승리를 거두는 데 결정적인 기여를 한 것이다.

   마클로디오 이후로도 우발디니는 한 동안 피렌체를 위해 일했다. 그러나 1431년 피렌체 변경의 영토를 노리는 만프레디Manfredi 가문과 공화국 사이에서 중재 역할로 나섰다가 피렌체 지도부의 의심을 샀고 분쟁 끝에 해임됐다. 피렌체의 처사에 모욕당했다고 느낀 그는 복수를 다짐하며 밀라노 공작과 손을 잡는다. 공작의 주선으로 시에나군 사령관에 선임된 우발디니는 피렌체 영토를 약탈하며 괴롭히다 밀라노의 원군을 이끌고 합류한 프란체스코 피치니노와 함께 결국 산 로마노에서 톨렌티노의 부대와 맞부딪혔다. 산 로마노 전투 뒤에는 밀라노군에 소속돼 여러 번 중소 규모의 전투에 참전했으나 1437년 갑작스럽게 병으로 쓰러져 세상을 떠났다.

그림 7: 우르비노 전경

   사실 베르나르디노 우발디니의 이름은 산 로마노 전투가 아닌 다른 이유로 더 잘 알려져 있다. 많은 역사가들이 귀단토니오 몬테펠트로의 서자이자 계승자인 페데리코Federico의 친부로 그를 지목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 주장에 따르면 몬테펠트로 백작이 후계자가 없어 오래도록 고심하는 것을 본 우발디니가 장인에게 갓 태어난 아우라와 자신의 아들을 서자로 꾸며 정식으로 입양하라고 권했다고 한다. 귀단토니오가 혼외관계를 가진 여성이 있었다는 기록이 없고 페데리코의 생모에 관한 정보도 찾을 수 없는 데다가 페데리코가 우발디니 부부의 (또 다른) 아들과 평생 친형제처럼 가까이 지냈으니, 장담할 순 없지만 상당히 설득력 있는 주장이긴 하다. 아무튼 페데리코 몬테펠트로는 훗날 뛰어난 정치적 수완과 군사적 능력으로 공작의 자리에 오르며 역사상 가장 중요한 콘도띠에리 중 하나로 꼽히는 인물이다. 그의 치세 덕분에 우르비노는 경제적, 문화적 번영을 구가하며 15세기 후반을 대표하는 르네상스의 중심 도시로 성장하게 된다. 페데리코가 정말로 우발디니의 친아들이라면 아페끼오의 영주 베르나르디노는 산 로마노 전투보다도 훨씬 큰 흔적을 역사에 남긴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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