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키아벨리의 <군주론>은 서양 고전이라 불리는 책들 가운데 국문으로 가장 많이 번역된 저작 중 하나일 것이다. 절판되지 않고 계속 인쇄돼 나오는 번역본만 해도 10종은 넘을 듯하다. 하지만 애석하게도 현존하는 모든 <군주론> 국문 번역들은 여러 군데 오류가 있다.
역자들의 번역 실력 때문은 아니다. 대부분의 판본들이 <군주론> 본문의 내용은 대체로 잘 번역해 놓았다. 문제는 주석이다. 많은 번역본들이 정확하게 같은 부분에 역자 주를 달아 놓았고 주석 내용도 대부분 비슷하거나 똑같다. 물론 주석의 오류까지도.
<군주론>이 길지는 않지만 오류를 찾아내기 위해선 다 읽어볼 필요도 없다. 제12장만 확인하면 충분하다.<군주론> 12장의 번역에서 가장 흔하게, 공통적으로 발견되는 오류는 고유명사 표기다. 대표적인 예가 Bracceschi(브라체스끼/키)를 브라체시라고 쓴 것, Cunio(쿠니오) 백작을 코니오 백작이라고 쓴 것이다.
고유명사 표기 문제는 아니지만 또 하나 흔히 보이는 오류는 일부 판본들의 경우 쿠니오 백작 알베리코 다 바르비아노가 최초의 이탈리아인 용병단을 조직한 인물이라고 주석에 설명해 놓았다는 점이다. 19세기 민족주의가 지배하던 시대에 이탈리아 '국뽕' 사학자들에 의해 퍼진 주장인데(마키아벨리는 이런 말 한 적 없음) 영미권에서도 오랫동안 별 검증 없이 통용되던 잘못된 정보다.
이렇듯 번역자가 서로 다름에도 불구하고 여러 판본들이 똑같은 지점에서 똑같은 오류를 보인다. 이유는 간단하다. 모두 중역, 즉 이태리어 판본에서 직접 옮긴 게 아니라 영문판이나 일어판을 보고 번역했기 때문이다. 쿠니오 백작 표기 오류의 경우엔 역자들이 아예 동일한 영문판을 번역했다는 것이 확실하다. 영미권에서 가장 많이 읽히는 <군주론> 번역본 중 하나가(1900년대 초에 초판이 나온 것으로 안다) Cunio를 Conio로 잘못 표기하고 있기 때문이다. 브라체스키를 브라체시로 표기한 국문본들은 덧붙여 역자들이 이태리어를 모른다는 사실까지 확인 사살해 주는 격이다.
여러 국문 번역본들이 주석 붙인 위치나 주석의 잘못된 내용마저 똑같다는 점도 중역임을 증명한다. 즉, 이들 번역본의 주석은 역자의 주석이긴 하되 국문 번역자의 주석이 아니라 이태리어를 영어로 옮긴 번역자가 붙인 주석이라는 얘기다. 물론 최근에는 이태리어판에서 직접 옮겼다는 번역본도 한 둘 나오긴 했다. 그러나 이들 역시 본문을 이태리어 문체를 살려 번역하고 고유명사 표기를 정확히 하는 것에만 집중했을 뿐, 르네상스 시대 이탈리아에 대한 전반적 지식과 정보가 부족한 국내 독자들을 위해 주석의 내용을 보강하거나 오류를 찾아내 바로 잡는 작업에는 별로 신경 쓰지 않았다.
대부분의 독자들은 <군주론>을 읽어도 무슨 소리인지 이해하기 어려운 책이라고 생각한다. 근본적인 이유는 어떤 번역본도 중세와 르네상스 시대 이탈리아의 중요한 정치적 사건, 사고와 전투, 인물 등에 대한 정보를 상세히 제공하지 않는다는 데 있다. 마키아벨리가 언급하는 당대, 혹은 한두 세기 전 이탈리아의 인물과 사건들은 그와 동시대 식자들에게는 따로 설명이 필요 없는 상식이지만 오늘날의 한국 독자에게는 그렇지 않다. 결국 우리에게 필요한 책은 <군주론>의 또 다른 번역이 아니라 완전히 새로운 주석, 풍부한 인물 및 사건 해설과 해제가 첨부된 <군주론>이다.
기회가 주어진다면 <군주론>의 전체 내용을 짚어 가며 배경이 되는 사건과 인물에 대해 설명하고 오류나 잘못 알려진 사실들을 하나하나 지적하고 싶지만, 여기서는 온라인 공간의 제약을 감안해 직접적으로 용병의 문제를 다루고 있는 제12장만 이야기해 보겠다.
피렌체에 입성하는 샤를 8세의 군대 (출처: 위키피디아)
12장의 첫 부분에서 마키아벨리는 용병의 궁극적 목적은 돈을 벌거나 이익을 얻는 것이기 때문에 근본적으로 신뢰할 수 없는 존재들이고 전투에서도 목숨 걸고 싸우지 않으며 쉽게 도망친다고 주장한다. 그러면서 그 증거로 프랑스 왕 샤를 8세의 침공(1494-98) 때 용병부대에 의존하던 몇몇 이탈리아의 소국들이 제대로 된 전투 한 번 없이 항복한 사실을 거론한다. 샤를 8세가 전쟁 초반 북이탈리아에서 나폴리까지 승승장구하며 빠르게 진군한 것은 맞지만 변변한 전투 한 번 없었다는 '분필 전쟁' 이야기는 과장이다. 라팔로 Rapallo 전투(1494.9)와 모르다노 Mordano 요새 공략전(1494.10) 등 소규모지만 사상자가 많았던 전투도 있었으며, 피렌체는 성문을 걸어 잠그고 끝까지 항전하겠다는 의지를 보여 결국 프랑스 왕이 도시 공격을 단념하게 만든 일도 있었다. 무엇보다 샤를 8세의 북이탈리아 진군 도중 벌어진 모든 전투와 군사행동에서 프랑스군과 그에 대항하는 측 모두 군대의 주력을 담당한 것은 용병들이었다. 제노바, 피사 등의 무조건 항복이 용병부대가 싸우려 하지 않았기 때문이라는 증거는 어디에도 없다. 오히려 프랑스 왕과 한 편이 된 뒤 밀라노와 피사의 용병대는 프랑스군의 스위스 용병들과 함께 주변국들의 영토를 공격하고 약탈하는 데 적극적으로 가담했다.
의도적 왜곡인지 단순한 실수인지는 알 수 없으나 그보다 중요한 것은 마키아벨리가 이런 오류를 범하게 된 이유다. 두 가지 이유를 생각해 볼 수 있는데 하나는 그가 생각한 가장 이상적인 국가의 모델이 공화정 시대 로마였다는 점이다. 군사제도도 예외가 아니었다. 공화정 로마의 군사제도는 징병제로 편성된 시민군을 근간으로 하고 있고, 이 시민군의 중추는 보병대였다. 이에 반해 르네상스 시대 이탈리아에서는 주로 용병들을 고용해 전쟁을 치렀으며 기병이 군대의 중심이자 전장의 주역이었다. 마키아벨리가 보기에 자신의 가족과 공동체를 지키기 위해 싸우는 시민병은 공화정 로마가 반도의 여러 부족들을 군사적으로 제압할 수 있었던 비결이었고, 돈을 위해 수시로 편을 바꿔 싸우는 용병들은 이탈리아의 분열을 고착시킬 뿐이었다.
바로 이 지점이 마키아벨리가 때로는 사실을 잘못 인식하거나 왜곡할 정도로 용병에 대해 부정적인 견해를 가지게 된 두 번째 이유이기도 하다. 그의 말대로 대부분의 콘도띠에리는 고용주의 입장에서 보면 신뢰할 수 없는 존재들이었다. 13세기 말부터 16세기 후반까지 이탈리아에서 활동한 용병대장들은 역사적 기록을 통해 구체적인 행적을 확인할 수 있는 인물만 따져도 수 백 명은 족히 된다. 그러나 이 많은 용병대장들 가운데 신의와 신용으로 널리 인정받은 인물은 손에 꼽을 만큼 드물다. 그러니 고용주가 사후에 용병대장을 위해 기념물(초상화, 석상, 동상 등)을 만들어 주거나 장례를 후하게 치러주었다면, 해당 인물은 그 고용주와 매우 좋은 신뢰 관계를 유지했고 군사적으로 중요한 공헌을 한 매우 드문 사례라고 보면 틀림없다.
안 그래도 위험부담이 큰 데 마키아벨리의 고국인 피렌체는 유난히 용병 고용에 운이 없었다. 공화국 초기부터 메디치 공국 시대까지 수 세기 동안 고용했던 그 많은 콘도띠에리 중 피렌체를 만족시킨 인물은 딱 두 사람, 존 호크우드와 니콜로 다 톨렌티노뿐이었고(둘의 기마 초상화가 산타 마리아 델 피오레를 장식하고 있는 게 결코 우연이 아니다) 나머지는 모두 군사적 업적이 시원치 않거나, 배신했거나, 계약 문제로 피렌체와 크게 갈등을 일으켰다. 이런 사정을 잘 아는 마키아벨리였으니 콘도띠에리라는 인물들에게 호의적인 감정을 가지기 어려웠을 것이다.
파올로 우첼로 <존 호크우드 기마 초상화>, 피렌체 산타 마리아 델 피오레
마키아벨리의 뿌리 깊은 콘도띠에리 불신은 존 호크우드John Hawkwood (1320-1394)에 대한 그의 기술에서도 드러난다. <군주론>의 12장에서 마키아벨리는 존 호크우드가 만약 밀라노에 대항한 전쟁을 승리로 이끌었다면 피렌체의 국정을 좌지우지할 막강한 정치적 영향력을 손에 넣었을 것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호크우드의 행적을 주의 깊게 살펴보면, 마키아벨리의 의혹을 반박할 만한 근거는 많다. 호크우드는 1379년 피렌체 내부에서 정부 전복을 위한 쿠데타 음모가 모의되고 있음을 알게 됐을 때도 공화국 정부에 최소한의 정보만 넘기고 보상금만 챙겼을 뿐, 피렌체의 내정에 직접 개입하는 것을 피했다. 또한 그는 이탈리아에서 30년 넘게 용병으로 일했지만 노후에는 잉글랜드로 돌아가려 계획하고 있었다. 이를 위해 일찍부터 이탈리아에 있던 자신의 재산을 처분하고 그 돈으로 잉글랜드의 친척들을 통해 고향에 넓은 토지와 저택을 구매해 두었다. 대 밀라노 전쟁에서 피렌체군을 지휘하기 한 참 전, 한 때 바냐카발로 Bagnacavallo와 코티뇰라 Cotignola의 영지를 바탕으로 자신만의 독립 군주국을 만들어 보려는 시도도 해 봤지만(1379-81) 상황이 어려워지자 불과 2년 만에 미련 없이 포기하고 영지를 처분했다. 피렌체군을 이끌 당시 이미 일흔을 넘긴 그의 나이, 정치권력보다 경제적 이익을 챙기는 데 집중했던 실리주의, 평생 과욕과 무리수를 철저히 피했던 그의 예리한 판단력을 고려할 때, 호크우드가 설령 밀라노의 항복을 받아냈다 하더라도 마키아벨리가 말하는 ‘정치적 야심을 쫓는’ 콘도띠에리로 돌변했을 가능성은 그리 커 보이지 않는다는 게 여러 역사가들의 중론이다.
마키아벨리는 호크우드만이 아니라 또 다른 용병대장에게도 똑같은 의혹을 제기했다. 바로 파올로 비텔리 Paolo Vitelli (1461-1499)다. 파올로 비텔리는 움브리아의 치타 디 카스텔로 Città di Castello 출신으로 그의 집안은 대대로 용병 일을 하는 소귀족이었다. 파올로도 두 형 비텔로쪼 Vitellozzo, 카밀로 Camillo와 함께 일찍부터 용병 생활을 시작해 움브리아에서 교황을 위해 오르시니 Orsini가문에 맞서 싸우며 명성을 쌓았다. 이후 샤를 8세의 이탈리아 침공 때는 프랑스군, 피사군에 종군하다가 1498년부터 피렌체에 총사령관으로 고용돼 피사 영토 공격을 지휘했다. 파올로 비텔리는 여러 차례 승전을 거두며 피사로 부터 다수의 성을 빼앗았지만 차츰 피렌체 정부와 불편한 관계에 놓이기 시작한다. 그는 여세를 몰아 완승을 거두기 위해 더 많은 병력과 자금 지원을 피렌체에 요구했는데 피렌체 정부가 이를 번번이 거절했던 것이다. 더욱이 비텔리가 포로로 잡은 적 용병대장 두 사람을 상의도 없이 풀어주는 바람에 피렌체 정부가 크게 불만을 표시한 일도 있었다. 1499년 7월, 비텔리는 피사 성문 앞까지 진격해 포위 공격에 나섰지만 때마침 일어난 폭우와 병영에 퍼진 말라리아로 인해 철군해야 했다. 문제는 포위 공격 도중 비텔리가 한 때 결정적 승기를 잡아 놓고도 적의 매복 기습을 우려해 공격을 중지시켰다는 점인데, 평소 그를 싫어하던 피렌체 정부의 실세들 몇 사람이 이를 알게 됐다. 결국 그 해 9월, 파올로 비텔리는 적과 내통해 반정을 꾀한 혐의로 체포됐고 3일 뒤 처형당한다.
마키아벨리는 <군주론>에서 만약 비텔리가 피사 점령에 성공했더라면 큰 인기를 등에 업고 피렌체의 정권을 장악했을 것이라고 썼지만 역시 객관적 판단에 따른 진술은 아니다. 거듭 승전을 거두고도 단 한 번의 작전상 실책으로 바로 제거될 정도라면 비텔리는 피렌체 정부 안에 별다른 정치적 영향력을 가지지 못했다는 뜻이다. 이런 그가 피사를 점령했다 한들 하루아침에 공화국 정부 지도자들을 자기편으로 만들 수 있었을까? 게다가 비텔리의 반역 음모가 그를 제거할 구실에 불과했다는 사실은 마키아벨리 자신이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당시 피렌체 정부의 핵심 실무 담당자 중 한 사람이었던 마키아벨리가 사건 직후 직접 쓴 한 서신에서 비텔리의 쿠데타모의 혐의는 아무런 근거가 없었다고 분명히 밝히고 있기 때문이다. 피렌체가 파올로 비텔리를 제거한 진짜 이유는 마키아벨리가 <군주론>의 바로 다음 부분에서 카르마뇰라 백작을 이야기하며 설명한 것과 동일하다. 한 때는 매우 쓸모 있었으나 데리고 있어도 더 이상 큰 성공을 가져다 주진 않을 것 같고 그렇다고 계약을 끝내자니 적에게 가 버리면 위험한 인물. 없애는 게 최선이라 생각했을 것이다.
비텔리 형제 초상화: 왼쪽부터 파올로, 카밀로, 비텔로쪼 (출처: 위키피디아)
용병대장들이 신뢰하기 어려운 존재인 건 사실이다. 그러나 믿기 어렵다고 해서 곧 쓸모가 없다는 뜻은 아니다. 무엇보다 중세와 르네상스 시대에 용병들이 전쟁을 주도할 수밖에 없었던 것은 그만큼 실질적인 필요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용병이 필요하게 된 정치, 사회적 배경은 마키아벨리 스스로가 간략하게나마 잘 언급했다. 사제들이 다스리는 교황령 국가나 상인과 은행가, 도시화된 귀족이 지배하는 피렌체, 베네치아, 시에나 같은 상업 도시국가에서 전쟁을 하려면 군대를 지휘하고 전략, 전술을 실행할 줄 아는 전문가가 따로 필요했다는 설명이다. 그러나 용병제도의 폐해를 강조하려는 목적으로 이 지점에서 마키아벨리는 다시 한 번 사실과 다른 해석을 내놓는다. 제12장의 마지막 부분에서 그는 르네상스 시대의 군대가 기병 위주로 편성되고 기병전 중심으로 전투가 이뤄지게 된 것이 용병대장들 때문이라고 설명한다. 용병대장들이 자신들의 전문성을 더욱 돋보이게 하고 수입을 늘리려고 시민병 중심으로 편성할 수 있는 보병대의 육성을 일부러 경시한 반면, 많은 전투 장비와 유지 비용이 요구되는 용병 중심의 기병대만 키웠다는 주장이다.
물론 사실이 아니다. 앞서 여러 글에서 살펴본 것처럼, 중세와 르네상스 시대의 전투가 보병 중심에서 기병 중심으로 변화한 근본적인 원인은 전쟁 도구가 계속해서 변화하고 새로운 무기가 등장하면서 전투 방식과 전술이 바뀐 탓이다. 등자의 도입과 크고 힘 센 군마의 보급으로 보병의 밀집대형 전술은 기병의 돌격을 막기 어려워졌다. 활과 석궁의 개량은 더욱 무겁고 튼튼한 갑옷을 낳았으니 이제 30kg이 넘는 금속을 몸에 두르고 말을 탄 채 싸우는 것은 더 이상 어쩌다 단 몇 주 소집돼 전장에 나가는 시민병들에게 기대할 수 있는 능력이 아니었다.
마키아벨리는 그의 또 다른 저작 <전술론>에서 시민병으로 구성된 보병 중심의 군대로 돌아가야 한다고 역설하고 있지만, 그가 살고 있던 시대의 현실은 이미 전술도, 전쟁 도구도, 과학기술도, 사회 구조도 공화정 로마 때와는 너무나 달라져 있었다. 설령 인위적으로 보병 중심의 군대를 편성한다 한들, 용병 없이 시민병만으로 전투를 수행할 수 있었을지도 의문이다. 당시 보병들은 여럿이 협력해 할버드 Halberd(기병을 말 위에서 끌어 내리기 위해 창과 갈고리, 도끼날을 결합한 창)나 파이크 Pike(길이 5m 이상의 장창. 대형을 이루어 기병의 돌격을 저지하느 데 쓰임)같은 고난도 무기를 다뤄야 했는데, 이런 특수 기술은 단기간 훈련으로 습득할 수 있는 게 아니기 때문이다. 스위스 할버드 부대, 독일 란츠크네히트 같은 용병 보병단이 유명해진 이유도 여기에 있다.
그러나 당시로선 실현 가능성이 없었다고 해도 마키아벨리의 생각이 완전히 허무맹랑한 꿈이었던 것은 아니다. 프랑스, 스페인 같은 중앙집권화 된 대국을 미래 국가의 이상적 형태로 상정했을 때 당시보다 훨씬 큰 규모의 군대가 필요할 것은 자명하고, 국가의 한정된 자원과 예산을 감안하면 용병제로는 안 된다는 그의 판단은 옳았다. 다만 마키아벨리가 꿈꾸던 이 시민병과 보병 중심의 군대가 실현되기 위해선 기술의 발전을 좀 더 기다려야 했다. 그가 세상을 떠나고 한 세기가 지난 뒤, 머스킷 총이 널리 보급된 다음에야 중기병의 시대는 막을 내리고 용병제의 필요성이 감소하면서 징병제 또는 모병제를 근간으로 한 보병 중심의 군대가 등장하기 시작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