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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문준영 Mar 26. 2020

전쟁 방식과 무기의 변천4

석궁과 장궁

   활은 모든 인류 문명이 선사시대부터 사용해 온 가장 대표적이고 보편적인 투척 무기였다.  점에서 유럽도 오랫동안 예외가 아니었으나 석궁이 등장하면서 변화가 일어나기 시작한다. 사실 석궁은 중세의 발명품도 아니고 유럽에서 처음 만들어진 것도 아니다. 역사상 기록들에 의하면 고대 중국에서 석궁의 원조라 할 수 있는 무기가 이미 사용됐고 유럽에서도 고대부터 사용되던 공성기 중 석궁과 비슷한 것이 이미 있었다. 개인 휴대용 무기 형태의 석궁 역시 중동, 아랍 지역의 영향을 받아 스페인, 스칸디나비아 일부에서 10세기쯤 잠시 등장했던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유럽에서 석궁이 본격적으로 전쟁에 사용되기 시작한 것은 12세기 후반부터다. 이 시기 피사, 제노바 같은 이탈리아 도시들이 해전에서 사용했다는 기록이 등장하는데 이후 빠르게 보급돼 13세기 중반 무렵에는 북이탈리아 전역에서 해상, 육상 가릴 것 없이 널리 쓰이는 무기로 자리 잡았다.

   석궁은 일반 활보다 제작이 어려워 비싼 장비였으나 사거리와 관통력이 뛰어나고 시위를 당기며 조준하는데 훨씬 적은 육체적 힘과 체력이 요구되기 때문에 능숙한 사수가 되기 위해 장기간의 꾸준한 훈련이 필요한 무기가 아니라는 장점이 있었다. 따라서 중세에는 경제적으로 부유한 지역을 중심으로 주로 보급됐다. 처음에는 북중부 이탈리아 도시의 징집된 시민병들이 선호하는 무기로 많이 쓰이다 차츰 플랑드르, 남프랑스 등으로도 확산되는데, 시민군의 시대가 저물고 용병 중심 전쟁으로 바뀌자 제노바 같은 도시는 아예 전문적인 용병 석궁수들의 대표적인 공급처로 전 유럽에서 명성을 누린다.

   활보다 월등한 관통력을 두려워한 나머지 초반에는 석궁을 전쟁 무기로 사용해선 안 된다는 의견도 적지 않았으니, 12세기의 교황 인노켄티우스 2세는 칙령으로 전장에서 석궁의 사용을 금지할 정도였다. 그러나 법이 기술 발전의 대세를 거스르기는 어려운 게 역사의 현실. 교황의 금지령이 무색하게 석궁은 곧 널리 애용돼 유럽의 전쟁을 크게 바꾸어 놓는다.

   석궁이 가져온 첫 번째 변화는 투척 무기 사용 전술의 분화다. 석궁이 도입되면서 재장전이 빠르고 화살의 생산 단가가 낮은 기존의 활은 돌격해 오는 적군에게 곡사로 다량의 화살을 날려 탄막을 형성하는 무기로 쓰이게 된다. 반면, 석궁수들은 석궁의 상대적으로 높은 정확도를 십분 활용해 가까이 접근한 적을 직사로 저격하는 역할을 주로 맡게 된 것이다. 두 번째 더욱 중요한 변화는 석궁의 도입이 갑옷과 보호장구의 발전을 촉진했다는 점이다. 13세기 중반만 해도 기사들의 갑옷은 여전히 사슬갑이었다. 하지만 관통력이 뛰어난 석궁이 보급되자 보다 강한 보호장비를 원하는 사람도 늘었다. 이에 철조각을 결합한 판금 코트, 브리간딘 같이 크게 개량된 보조 갑주들이 개발됐으며 사슬갑 위에 강판을 부분적으로 덧입는 추세가 나타나 나중에는 판금 갑옷의 탄생으로까지 이어진다.

   석궁의 등장이 갑옷의 개량에 불을 댕겼지만 한편으론 갑옷이 진화하며 역으로 석궁의 변화를 자극하기도 했다. 석궁의 개량은 대략 두 가지 방향으로 정리해 볼 수 있다. 활 부분을 만드는 주재료의 변천과 장전 방식의 발전이다. 우선 전자를 살펴보자. 초기 유럽 석궁의 활 부분은 물푸레나무, 주목 등 순전히 목재로만 제작됐다. 그러다 13세기 중반쯤에 이르면 복합재질 석궁(Composite crossbow)이 등장하는데 이 석궁은 동물 뿔이나 힘줄 혹은 고래뼈 등의 재료를 목재와 결합해 활 부분을 만들었기 때문에 기존 석궁보다 최대 4배 큰 장력을 지녔다고 한다. 우리가 익히 살펴본 것처럼 14세기에 들어 사슬갑에 부분적으로 강판을 덮거나 철조각을 단 보조장비를 입는 기사들이 많아지자 석궁은 여기에 대응해 더 향상된 위력을 갖춰야 했으니, 그 해답으로 등장한 재료가 철이다. 철제 활 부위를 가진 석궁은 14세기 초 제노바에서 처음 만들어지기 시작해 세기말이 되기 전까지 유럽 전역에서 거의 표준이 되다시피 한다.

   유럽의 어느 박물관에서든 전시된 석궁들을 조금만 주의 깊게 살펴본다면 장전 방식이나 장전을 위해 사용된 도구가 굉장히 다양하다는 사실을 눈치챌 수 있을 것이다. 실제로 장전 방법의 변천은 석궁의 진화 과정에서 가장 많은 연구와 노력이 기울어진 부분이고 그만큼 석궁의 성능 변화에도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석궁의 장전 방식은 보통 연구자에 따라 5가지에서 7가지로 다르게 분류하는데 여기에서는 6가지로 구분해 설명하겠다. 1인 휴대용 무기로 석궁이 처음 등장했을 때는 온전히 사람의 힘만으로 장전하는 방식이었다. 그림 1 제일 좌측에서 보는 것처럼 12세기 후반의 석궁은 사수가 두 발로 활 부분을 밟고 서서 힘으로 시위를 당겨 장전했다는 뜻이다. 13세기에 들어서면 사수들은 튼튼한 고리(그림 1 가운데 삽화 중 E9, E10)가 달린 허리띠를 착용한다. 장전할 때는 두 발로 활 부분을 밟고 서서 허리띠에 달린 고리에 시위를 건 후 허리를 펴고 일어서면 자연스럽게 시위가 당겨지는 방식이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여기에 또 한 가지 개량이 일어나는데 석궁 앞머리에 등자와 똑같이 생긴 발걸이를 부착한 것이다. 그래서 13세기 중반 무렵의 석궁수들은 허리를 숙이고 한 발로 등자를 밟은 상태에서 허리띠 고리에 시위를 건 다음 허리를 펴면서 일어서거나, 그림 1의 가운데 보기처럼 한 발을 들어 등자에 낀 채로 허리띠 고리에 시위를 걸고 손으로 석궁 몸체를 위로 잡아당겨 장전하게 된다. 등자형 발걸이가 있건 없건 고리를 이용해 장전하는 이런 석궁을 이탈리아에서는 balestra a crocco라 부른다. 그다음으로 같은 세기 후반에 더욱 간단하고도 효과적인 장전 방법이 나오는데 사수의 허리띠에 고리 대신 작은 도르래를 달아 시위를 당기는 방식이다(그림 1의 오른쪽). 기본적인 장전 방법은 이전 모델과 모두 같지만 사수가 허리를 펴고 일어서거나 손으로 석궁을 잡아당길 때조차 힘이 훨씬 적게 들었다. 참고로 등자형 발걸이가 고리 달린 허리띠보다 먼저 개발됐다고 설명하는 자료들도 많으나 어느 쪽 주장이 맞는지는 아직 누구도 결론 내리지 못했다.

그림 1: 장전 방식에 따른 석궁의 변천(12세기-13세기)

   14세기에는 석궁의 투척력을 강화하려는 시도가 더욱 활발해져 세 가지 새로운 장전 방식이 실용화됐다. 맨 먼저 등장한 것이 지렛대의 원리를 이용한 장전으로, Gaffle 혹은 '염소 발'이라고 불린 장치에 시위를 걸고 그림 2의 왼쪽처럼 그 레버를 손으로 누르거나 몸에 대고 누르면 시위가 당겨지는 방식이다(몸에 대고 누르는 레버는 그림과 모양이 좀 다르고 구조도 더 간단하다). 위력은 약간 떨어질 수 있지만 장전 때 발을 쓰지 않아도 되기 때문에 14세기 중반 무렵의 기마 사수들이 이 석궁을 주로 사용했다. 레버로 장전하는 방식 다음에는 권양기를 감아 장전하는 석궁이 나왔다. 사수가 등자를 밟은 상태에서 석궁의 뒷부분에 작은 권양기(windlass)를 끼운 뒤 권양기 도르래에 시위를 걸고 양손으로 손잡이를 돌려 장전하게 돼 있다(그림 2 가운데). 영어로는 windlass crossbow, 이탈리아에서는 balestra da torno라 불린 이 석궁은 사용이 간편하면서도 압도적인 관통력을 자랑하기 때문에 14세기 중반쯤 등장해 다음 세기 시작 무렵에 이미 전 유럽의 석궁 시장을 완전히 평정한다. 윈드래스 석궁과 비슷한 시기에 개발된 것으로 크래네퀸(Cranequin)이라는 이름의 석궁도 있었다. 이 석궁은 한 손으로 톱니 장치인 크래네퀸의 손잡이를 감기만 하면 시위가 당겨진다(그림 2의 오른쪽). 매우 간편하고 획기적인 방법이었지만 크래네퀸의 제작이 까다롭고 비용이 많이 드는 데다 기계적 오작동도 꽤 잦았던 탓에 큰 인기를 끌지는 못했다.

그림 2: 장전 방식에 따른 석궁의 변천(14세기)

   진화를 거듭하는 동안 석궁의 성능은 과연 얼마나 향상됐을까? 관통력의 측면에서는 분명히 크게 발전했다. 허리띠 고리를 사용해 장전하는 13세기 초중반의 석궁과 15세기 초 모델의 윈드래스 석궁을 비교하면 전자의 장력은 150kg 정도인데 반해 후자의 장력은 560kg 이상에 달했다고 한다. 장력이 크다는 것은 그만큼 큰 힘으로 시위를 당긴다는 뜻이니 같은 화살이나 볼트를 발사했을 때 더 강한 관통력을 발휘한다는 의미다. 그러나 계속된 진화가 도리어 석궁의 약점을 심화시킨 부분도 있었다. 관통력을 개선하는 데만 주력하다 보니 석궁이 개량을 거듭할수록 장전에 소요되는 시간은 점점 길어진 것이다. 전해오는 여러 기록들과 현대 연구자들의 재연 실험 등을 종합해 보면 14세기 초중반의 석궁(허리띠+도르래 장전)은 능숙한 사수가 조작할 경우 분당 최대 4발 정도 발사할 수 있었다고 한다. 반면 그로부터 100년쯤 뒤의 윈드래스 석궁은 전문 사수가 조작해도 분당 1.5-2발 밖에 쏘지 못했다. 이처럼 느려진 장전 속도를 상쇄하기 위해 석궁수들이 2인 1조로 협력하는 방법(한 사람이 조준, 사격하는 동안 다른 사람은 장전)이 도입됐으나 근본적인 해결책은 아니었다.


   총이 널리 보급되기 전까지 중세 유럽의 전장에서 석궁은 투척 무기의 대명사였다. 하지만 후대의 많은 이들이 석궁보다 우월한 또 다른 무기가 있었다고 생각하는데 바로 장궁(Longbow)이다. 원래 장궁과 유사한 활들에 대한 기록은 고대부터 유럽 곳곳에서 있었으나 모두 중세에 사용된 전쟁용 장궁의 직접적인 기원은 아니다. 중세 전쟁용 장궁의 시초는 앵글로-노르만인들이 쓰던 큰 활(English longbow)이다. 13세기 말 잉글랜드 왕 에드워드 1세가 웨일스나 스코틀랜드와 전쟁을 벌이면서 장궁수들을 대대적으로 고용/징집해 처음으로 전투에 활용했는데, 기대 이상의 큰 효과를 보게 되자 이후 적극적으로 장궁 부대를 육성하기 시작한다. 백년전쟁이 시작되는 에드워드 3세의 치세에 이르면 잉글랜드의 모든 자유민 성인 남성들에게 매주 장궁으로 활쏘기 연습을 하도록 명령하는 법까지 제정할 정도였다.

그림 3: 장궁

   장궁은 길이 170-180cm에 이르는 대형 활로, 크기가 큰 만큼 시위를 당기는데 훨씬 큰 힘이 필요하고 보통보다 길고 무거운 화살(70-100cm, 80-100g)을 쓰긴 하지만 기본적인 사격 방법은 일반 활과 동일하다. 보통 크기의 활처럼 직사와 곡사가 모두 가능하면서도 사거리와 관통력은 더 뛰어나다는 게 장점이다. 사거리는 곡사로 쏘는 경우 윈드래스 석궁과 맞먹거나(220m가량) 조금 못 미친 것으로(150-200m 사이) 추정된다. 그 시대의 보통 활들이 복합재 활(Composite bow)이 많았던 데 비해 장궁은 주목(yew)이라는 단일 목재로 만들었기 때문에 제작 비용도 생각보다 많이 들지 않았다. 분명한 것은 석궁과 비교하면 확실히 장궁의 생산 비용이 낮았다는 점이다.

   장궁이 역사상 손꼽히는 가공할 무기로 오늘날까지 이름을 남기게 된 것은 백년전쟁 중 벌어진 두 번의 유명한 전투 덕분이다. 1346년 8월의 크레시 전투(Battle of Crecy)와 1415년 10월의 아쟁쿠르 전투(Battle of Agincourt)에서 숫적 열세에 있던 잉글랜드군은 장궁병을 효과적으로 활용해 프랑스군에게 대승을 거둔다. 이 두 전투에서 장궁병들의 화살 세례가 프랑스군 진영에 불러일으킨 혼란이 워낙 컸던 까닭에 참전했던 증언자들에게 깊은 인상을 심어주었고 이는 동시대의 연대기 기록들은 물론 후대의 많은 연구자들에게도 오랫동안 큰 영향을 미쳤다. 문제는 너무 깊은 인상을 심어준 나머지 일부 증언이나 기록들이 장궁의 위력을 실제보다 크게 인식해 과장된 설명을 했으리라는 것이다. 이로 인해 생겨나 수 세기 동안 지속되는 대표적인 논란이 "장궁이 판금갑옷을 뚫을 수 있는가"라는 문제다.

그림 4: 아쟁쿠르 전투를 묘사한 15세기 잉글랜드 연대기의 삽화. 장궁병의 화살이 전신 판금갑옷을 꿰뚫고 기사들을 쓰러뜨린 듯한 모습이 보인다(출처: 위키피디아).

   위 그림과 같은 자료들의 신빙성을 의심하지 않았던 많은 연구자들은 오래전부터 장궁의 가공할 관통력을 증명하기 위한 실험을 거듭해 왔고 실제로 그중 상당수는 장궁 사격으로 철판을 뚫는 데 성공하기도 했다. 이 때문에 한 때는 장궁이 근거리에서 판금갑옷을 뚫을 수 있었다고 보는 게 거의 정설처럼 받아들여지기도 한다. 그렇지만 최근에는 이런 추세가 뒤집어지는 분위기다. 사실 과거의 재연 실험들은 관통력에 영향을 주는 변수들을 잘못 설정하거나 미처 고려하지 않은 경우가 많았다. 15세기에 제작된 판금갑옷과 다른 재질(혹은 두께)의 단순 평면 철판을 표적으로 쐈다거나 너무 현대적인 재질(또는 디자인)의 화살촉을 이용한 사례도 흔했고, 활의 장력에 비해 지나치게 가벼운 화살을 쏜 경우도 있는 등 크레시 전투, 아쟁쿠르 전쟁 당시의 상황과는 동떨어진 조건에서 행한 실험들이 대부분이었다. 최근 들어 영미권의 여러 연구자들이 최대한 14-15세기와 비슷한 조건으로 변수들을 다시 설계해 몇 차례 실험을 했는데 과거와는 다른 결과가 나왔다. 심지어는 평균치보다 한참 높은 장력을 가진 장궁으로도 10m 거리에서 15세기의 고급 흉갑(앞으로 불룩한 모양의 breastplate로 두께는 1.5-2.5mm이며 5%의 탄소를 함유한 강철 재질)을 뚫지 못한 실험도 있었다. 게다가 현대의 과학적인 측정 수치들도 장궁의 관통력이 그동안 실제보다 과대평가됐었다는 주장을 뒷받침해 준다. 윈드래스 석궁이 최대 570kg 가까운(1250파운드) 장력을 발휘하는데 반해 역사적 기록들로 추정한 장궁의 장력은 평균 150파운드(약 68kg), 아무리 커도 200파운드(약 91kg)를 넘지 않기 때문이다. 또한 보다 향상된 데이터들을 근거로 15세기 최상급 재질의 전신 판금갑옷을 제작해 본 결과 흉갑 부위는 윈드래스 석궁은 물론이고 화승총의 사격까지 효과적으로 막아냈다는 보고도 있었다.

    결론을 정리하면 오늘날의 학자들은 대부분 장궁이 15세기의 고급 흉갑을 관통하지 못했을 것으로 본다. 그럼 크레시와 아쟁쿠르의 기록들은 거짓이란 말인가? 아니다. 흉갑을 뚫진 못해도 장궁은 프랑스 기사들을 무력화시키기 충분했다. 우선 14세기 중반인 크레시 전투 때는 판금 흉갑이 보급되기 전이었다. 따라서 신분이 높은 기사들도 사슬갑 위에 판금 코트(Coat of plate)나 브리간딘을 입은 게 전부였는데, 그 정도 방어구는 장궁의 근거리 사격으로 관통할 수 있다는 사실이 최근의 실험들에서도 입증된 바 있다. 15세기 초 아쟁쿠르 전투는 어떨까? 이 때는 물론 판금갑옷이 보급돼 있었다. 하지만 모든 상품이 그렇듯 갑옷도 가격에 따라 품질이 천차만별이다. 당연히 왕이나 대귀족들은 최고급 갑옷을 입었을 테고 하급 기사나 겨우 구색 맞춰 무장하는 정도인 용병들은 석궁은 말할 것도 없고 장궁에도 뚫리는 저급한 흉갑을 입었을 것이다. 최상급의 전신 판금갑옷이라도 모든 부위의 장갑이 동일하지는 않으며 신체의 모든 부분을 완전히 덮어주지도 않는다는 점 또한 중요하다. 철판이 얇은 팔, 다리 같은 부위는 장궁의 근거리 사격에 쉽게 뚫릴 수 있고 이런 부위에 여러 번 부상을 입으면 분명 제대로 싸우기 어렵다. 더구나 겨드랑이나 허벅지 뒤처럼 여전히 장갑 사이로 노출된 부분들은 화살 공격에 더 취약했다. 기사들의 말도 장궁의 좋은 공격 대상이었다. 30kg에 달하는 갑옷을 입고 달리는 말에서 떨어지면 부상당할 수도 있을 뿐 아니라 다치지 않는다 해도 말을 모두 잃은 기사는 돌격할 때도, 후퇴할 때도 무거운 갑옷을 입은 채 뛰어야 하니 체력이 쉽게 바닥나기 마련이다.

   판금갑옷을 뚫을 수 있느냐와는 상관없이 장궁은 매우 위협적이고 쓸만한 투척무기였음에는 틀림없다. 위력은 일반 활을 능가할 뿐 아니라 제작 비용도 석궁보다 훨씬 저렴하고 사거리는 비슷한 데다 발사속도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빠르기 때문이다. 숙련된 장궁 사수가 탄막을 형성할 목적으로 조준 없이 쏠 경우(장력 150파운드 활 기준) 분당 10-12발까지도 사격이 가능했다고 한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장궁은 유럽 전역에 널리 보급되지 못했다. 영국군이나 영국 출신 용병들에 의해 주로 사용되다가 그마저도 아쟁쿠르 전투를 기점으로 줄어들었고 16세기 초에는 전장에서 아예 자취를 감췄다. 왜일까? 충분한 수의 숙련된 사수를 양성하고 공급하기 어려웠다는 점이 결정적인 이유다. 일반 활보다 크고 무거워 시위를 당기기 쉽지 않은 장궁은 능숙하게 다루려면 일정한 체력적인 요구조건도 갖추어야 하고 장기간 꾸준한 연습도 필수적이다. 프랑스와 전쟁을 시작하기 한참 전부터 정책적으로 자유 농민들의 장궁 사용을 장려해 온 잉글랜드는 백년전쟁 중반까지는 큰 차질 없이 숙련된 사수들을 군대에 제공할 수 있었다. 그러나 장기간의 전쟁으로 인원 손실이 계속 늘어나는 한편 경제난, 민란 등이 잦아지면서 평민들에게 활쏘기를 장려하는 일이 점차 유명무실해지자 경험 있는 장궁병의 숫자는 갈수록 줄어들었다. 백년전쟁 직후 연이어 벌어진 장미전쟁으로 이런 악순환은 더 심화되는데 그 결과 장궁은 새로 등장한 투척 무기인 총에 밀려 완전히 도태된다. 다른 나라들이 장궁을 적극 도입하지 않은 것도 사수 공급 때문이었다. 장궁병은 단기간에 양성할 수 없으니 전쟁에 바로 투입하려면 많은 사수를 용병으로 고용할 수밖에 없는데, 숙련된 장궁수들은 대부분 영국의 자영농들이라 잉글랜드 군대에 징집/모병된 병사들 말고는 전쟁터에서 찾아보기 어려웠다. 장궁의 위력을 누구보다 뼈저리게 맛 본 프랑스 왕조차 장궁병을 고용하고 싶어도 뜻대로 할 수 없는 상황이었던 것이다. 그래도 백년전쟁 초반에는 용병으로 일하는 장궁수들이 좀 있었다. 이들은 징집이나 모병으로 잉글랜드 군대에 종군했다가 휴전기에 고향으로 돌아가지 않고 유럽 본토에 남아 용병이 된 경우인데, 그 대다수가 무리 지어 남프랑스에서 비적질을 일삼다가 이탈리아 영주들에게 고용돼 알프스 너머로 옮겨간다. 하지만 이들마저도 15세기 초쯤에는 사실상 이탈리아에서 사라진다. 전투 중 사상자로 인해 꾸준히 숫자는 줄어드는데 반해 정규군에서 이탈해 용병으로 새로 합류하는 장궁 사수는 극히 드물었고 무엇보다 잉글랜드 본국조차 갈수록 장궁병 수요를 충족시키기 버거운 지경이 된 탓이다.

 

윈드래스 석궁(1500년 경), 암스테르담 Rijks 박물관

   오늘날에도 장궁을 석궁보다 우월한 무기였다고 잘못 알고있는 사람이 많다. 그러나 지금까지 살펴본 것처럼 실상은 좀 다르다. 백년전쟁 당시 크게 활약하며 효용성을 충분히 입증한 건 사실이지만 장궁은 석궁처럼 꾸준히 진화하며 널리 보급돼 쓰이지도 않았고 다른 무기나 방어구의 개량, 발전에 큰 영향을 끼치지도 못했다. 게다가 한동안 정설에 가깝게 받아들여지던 장궁의 치명적인 관통력 신화는 최근 실험 연구들에 의해 과장됐을 가능성이 큰 것으로 밝혀졌다. 장궁이 중세 유럽의 전쟁사에 남을 인상적인 무기들 가운데 하나임은 틀림없지만 시대를 대표하는 투척 무기의 제왕은 석궁이었다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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