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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문준영 Mar 26. 2020

전쟁 방식과 무기의 변천3

투구

  중세 유럽에서 가장 보편적으로 사용된 첫 투구는 스컬캡(Skullcap)의 개량형인 나살 헬멧(Nasal Helmet. 그림 1의 1100년경 기사 참조)이었다. 대개 반구형 또는 원추형 스컬캡 중심축에 코 부분을 덮는 노즈 가드가 달려있는 이 투구는 착용자의 머리(뒤통수 제외)와 얼굴 전면의 중앙부만을 보호해 주는 매우 단순한 형태였다. 나살 헬멧 중에서도 두정부가 도토리처럼 뾰족한(원추형) 투구는 노르만 기사들이 특히 즐겨 썼기 때문에 노르만 헬멧/헬름(Norman Helmet/Helm)이라고도 불린다.

  11-12세기 절정에 달했던 나살 헬멧의 유행은 13세기 들어 그레이트 헬름(Great Helm. 그림 1 중 1250년, 1330년 기사들의 투구)이 등장하면서 사그라들었다. 뒤집어진 양동이처럼 생긴 이 투구는 날아오는 화살, 투창이나 적 칼날의 위협으로부터 얼굴을 포함한 머리 전체를 보호해 주었으므로 금세 기사들의 필수 장비로 자리 잡는다. 그러나 그레이트 헬름이 나살 헬멧보다 전반적으로 월등한 방어 장비임은 틀림없지만, 기이하게도 디자인상 기술적 퇴보라고 볼 수밖에 없는 측면도 한 가지 있었다. 완전한 평면이었던 초기 그레이트 헬름의 두정부는 반구형이나 원추형에 비해 충격을 흡수하는 데 불리했다. 즉, 그레이트 헬름을 쓴 채 정수리 부분을 둔기로 맞으면 충격 때문에 머리는 물론이고 목이나 척추까지 다칠 위험이 컸다는 뜻이다. 이런 약점을 보완하기 위해 기사들은 정수리 부위가 튀어나온 형태로 개량한 그레이트 헬름을 쓰거나 원추형 혹은 반구형 스컬캡을 쓰고 그 위에 또 그레이트 헬름을 쓰게 된다(그림 1의 1330년경 기사).

그림 1: 중세부터 르네상스까지 갑주와 투구의 변천

  중세의 절정기를 석권한 투구였지만 그레이트 헬름도 끝내 해결하지 못한 문제점은 있었다. 그레이트 헬름을 쓰고 있으면 시야가 매우 좁아지고 숨쉬기 불편하다는 사실이다. 호흡이 불편하면 특히 날씨가 더운 여름에 착용자의 체력을 크게 소모시킬 수 있었고 제한된 시야는 근거리 백병전에서 상당한 장애로 작용했다.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나온 아이디어가 바로 상황에 따라 투구의 전면을 열고 닫을 수 있게 하는 것, 즉 면갑(바이저visor)의 발명이었다. 그러나 면갑 달린 투구들은 사실 그레이트 헬름이 개량되면서 나온 게 아니다. 13세기 말경부터 이탈리아에서는 보병들을 중심으로 스컬캡이나 나살 헬멧을 발전시켜 얼굴 측면과 목 뒷덜미까지 덮어주는 새로운 투구가 사용되기 시작했다. 배서닛(Bascinet), 이탈리아어로 바치네토(Bacinetto)라 불린 이 헬멧은 넓은 옆면을 지녀 리벳이나 경첩을 달기 적합했기 때문에, 14세기 중엽이 되면 이 바치네토에 상하로 여닫을 수 있는 면갑을 장착한 개량형들이 나타나게 된다(그림 1의 1400년경 기사와 그림 2 우측 사진 참고).

그림 2: 초기형 바치네토(좌)와 바이저가 달린 바치네토(우), 루이지 마르쫄리 무기 박물관, 브레시아(이탈리아)

  물론 바이저 말고도 다른 방법으로 그레이트 헬름의  단점을 해소하려는 시도도 한 때 있었다. 15세기 시작 무렵 등장한 바르부타(Barbuta)라는 이름의 투구가 그것인데, 측면과 후면은 바치네토와 같지만 안면부 대부분이 가드로 덮여 있고 중앙에 시야 확보와 호흡 목적의 Y자나 T자형 홈이 나 있는 형태다. 바르부타는 북이탈리아에서 처음 제작됐으나 바이저 헬멧이 대세가 되기 전까지 독일 용병단의 기병들이 특히 많이 사용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림 3: 15세기 바르부타(출처: 위키피디아)

 15세기에 들어서면 전장에서 그레이트 헬름을 쓴 기사들은 완전히 사라지고(이후 그레이트 헬름은 변형을 거쳐 토너먼트 전용 장비로만 사용된다. 그림 1의 1450년경 기사 상단 제일 오른쪽 투구) 면갑 달린 투구의 시대가 열리는데, 이런 초기의 바이저 헬멧들 중에는 바치네토와 다른 기원을 가진 것들도 있었다. 대표적인 예가 샐릿(Sallet)에서 발전한 바이저 헬멧이다. 샐릿 역시 이탈리아에서 처음 만들어진 투구지만 독일에서도 널리 애용됐다. 바치네토/배서닛보다 넓은 꼬리처럼 돌출된 뒷덜미 보호대를 가진 것이 특징으로 독일식 샐릿의 경우 뒷덜미 부분이 더욱 길다(그림 4 참고).

그림 4: 좌측은 독일식 샐릿(출처: 위키피디아), 우측은 이탈리안 샐릿(코레르 박물관, 베네치아)

  면갑 달린 투구는 빠르게 개량을 거듭해 전신 판금갑의 시대가 되면 이에 걸맞은 헬멧으로 진화한다. 바로 아멧(Armet)과 클로즈 헬멧(Close Helmet)이다. 초기 바이저 헬멧들의 가장 큰 약점은 목 하단의 측면과 앞면을 보호해 주지 못한다는 것이다. 이를 해결하고자 15세기 중반 쇄골 부근부터 턱까지 강판으로 덮어주는 부분인 비버(Bevor)가 개발돼 면갑 달린 투구와 일체가 된다. 참고로 그림 1의 1450년경 기사 상단에 있는 제일 왼쪽 그림은 이 비버가 발전된 과정을 보여준다. 비버와 투구의 나머지 부분이 연결되는 방식에 따라서 입고 벗을 때 투구를 좌우로 여는 것과 앞뒤로 나눠 여는 것이 있는데 전자가 아멧이고 후자가 클로즈 헬멧이다(그림 5 참고). 아멧은 15세기 중반 나타나 16세기 말까지 유럽 전역에서 쓰였고, 그보다 반세기쯤 후에 등장한 클로즈 헬멧은 독일 지역에서 많은 개량과 발전을 거두며 전신 판금갑옷 시대의 마지막에 유행한 투구다.

그림 5: 아멧(우)과 클로즈 헬멧(좌)의 개폐방식 비교(출처: 위키피디아)
그림 6: 비버(좌)와 클로즈 헬멧(우), 루이지 마르쫄리 무기 박물관, 브레시아

  중장 기병 시대가 막을 내리고 뒤를 이어 유행한 투구는 버고닛(Burgonet)과 모리온(Morion)이다. 16세기 전반 기병용 투구로 처음 등장한 버고닛의 초기형은 얼굴까지 전부 덮어주는 형태라 겉보기에 아멧이나 클로즈 헬멧과 매우 유사했다. 유일한 외관상 차이라면 버고닛은 햇빛 가리개 목적의 차양이 눈 부분 위에 달려있다는 점이었다. 그러나 버고닛은 구조적으로 다른 바이저 헬멧들과 달리 비버가 스컬 부품과 일체화돼 있었던 덕분에 기병 갑옷의 경량화 추세에 쉽게 적응할 수 있었다. 면갑과 얼굴 정면 부분을 제거하고 측면에 확장된 뺨 가리개를 다는 방식으로 진화해 경기병들의 대표적인 투구로 변신한 것이다. 특히 17세기 독일 흉갑 기병(Cuirassier)과 폴란드 후사르(Hussar) 기병들에게는 상징과도 같은 장비로 각광받는다. 모리온은 16세기 스페인에서 처음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되지만 비슷한 시기 이탈리아에서도 크게 유행했기 때문에 이탈리아가 원조라고 보는 이들도 있다. 크게 분류해 차양이 아예 없거나 짧고 평평한 것과 앞뒤로 솟아오른 차양을 가진 것으로 나눌 수 있는데 전자는 캐버셋(Cabasset.그림1의 1610년경 기사가  투구)이라는 별도의 이름으로 부르기도 한다. 후자 중에서도 닭 볏 모양의 돌기가 달린 모리온은 스페인, 포르투갈의 신대륙 원정대원들이 사용해 정복자의 투구로 더 잘 알려져 있다. 모리온은 원래 보병용 장비였으나 경기병들도 널리 애용하게 돼 17세기에는 버고닛과 함께 서부, 중부 유럽 전역에서 가장 흔하게 볼 수 있는 투구가 된다. 교황청의 스위스 근위병들이 오늘날까지도 모리온을 착용한다는 사실 이 투구가 한 때 얼마나 널리 쓰인 장비였는지를 짐작할 수 있게 해 준다.

그림 7: 좌측부터 16세기 후반 독일 버고닛, 17세기 스페인 신대륙 원정대의 모리온(이상 위키피디아), 16세기 후반 이탈리아 모리온(베네치아 코레르 박물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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