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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문준영 May 29. 2020

전쟁 방식과 무기의 변천5

  중세와 르네상스를 통틀어 총만큼 유럽의 전장에 커다란 변화를 가져온 무기는 없을 것이다. 익히 알려져 있는 것처럼, 화약은 중국에서 처음 발명됐고 중동을 거쳐 13세기 후반 유럽에 전해졌다. 화약의 전래로 중세 말 유럽의 전장에는 대포가 등장했고 14세기 중후반부터는 이 대포를 소형화하려는 다양한 시도도 이루어진다. 그 결과 15세기에 이르면 서양 역사상 최초의 개인화기 총이 탄생한다.

  최초의 개인화기는 Hand-cannon이라는 이름처럼 포를 소형화한 것에 지나지 않았기 때문에 정확한 조준이 불가능하고 안전성에도 문제가 많아 크게 보급되지 못했다. 진정한 의미에서 총의 원조라 할 수 있는 무기가 등장한 것은 화승 격발 방식(영: Matchlock system /이:  sistema a miccia)이 발명되면서부터다. 15세기 후반 독일 지역에서 처음 출현한 것으로 추정되는 화승 격발은 불붙은 도화선을 점화구에 갖다 대 총 안의 화약을 폭발시키며 탄환을 발사하는 방식인데 이 화승식을 적용해 유럽에서 만들어진 총이 아퀴부스(arquebus/archibugio)다. 원시적인 형태지만 방아쇠 장치를 갖춘 아퀴부스는 사수가 점화구에 직접 불을 댈 필요 없이 방아쇠를 누르면 도화선이 움직여 점화구와 접촉하기 때문에 도화선이 타들어 가는 동안 양손으로 총신을 잡고 안정적인 자세에서 표적을 조준할 수 있다는 점에서 혁신적이었다. 핸드 캐논보다 정확도가 크게 개선됐다는 뜻이다. 아퀴부스는 또한 당시 가장 널리 쓰이던 드래스 석궁보다 제작 비용이 적게 들었을 뿐 아니라 탄환 역시 일반 화살보다도 훨씬 저렴하게 생산할 수 있었으므로 경제적인 면에서도 매력적이었다. 거듭 시위를 당겨가며 조준해야 하는 활은 능숙한 사수가 되려면 일정 수준 이상의 근력과 장기간의 연습이 필요했지만 심신이 멀쩡하고 시력에 문제만 없으면 누구나 쏠 수 있는 총은 사수를 양성하기에도 활이나 석궁보다 용이하다는 장점도 있었다.

아퀴부스 사격 장면(좌)과 화승식 격발 장치(우)

  물론 아퀴부스에도 문제점은 있었다. 가장 큰 단점은 비가 오거나 바람이 심한 날에는 점화구에 불을 붙이기 어렵다는 사실이다. 도화선에 불을 붙이기 힘들거나 붙인 불이 타 들어가다 꺼져 버리기 쉬우며 총 안에 넣는 화약도 비에 젖으면 쓸 수 없었기 때문이다. 두 번째 문제는 총 안의 화약이 폭발할 때 불꽃이 터지거나 상당한 연기를 일으켜 정확한 조준에 방해가 됐으며 화약의 이상 폭발 등으로 사고가 일어나는 경우도 있었다는 점이다. 아퀴부스의 또 다른 약점은 장전이 느리다는 사실이다. 특히 화승식 격발 장치의 안정성이 크게 떨어지는 초기 모델의 경우 발사 속도가 분당 1발-1.5발 정도밖에 되지 않아 석궁과 비슷하고 일반 활보다는 훨씬 느렸다. 이런 약점을 보완하고자 일찍부터 다양한 아이디어가 시도됐는데 그중 실용화된 대표적인 예가 대열 별 일제 사격(Volley fire) 전술이다. 총기 사수를 2열 혹은 3열로 편성해 1열씩 차례로 쏘는 이 전법은 원래 총이 등장하기 전 석궁수들이 2인 1조로 번갈아 사격하던 방식을 좀 더 발전시킨 것이다. 르네상스 시대에는 보통 화승총 사수대가 대열 별 일제 사격을 하는 동안 파이크(평균 5m에 이르는 긴 창)로 무장한 장창병들이 양 옆으로 포진하고 적 기병의 접근을 막는 응용 전술이 실전에서 많이 사용됐다.

  사실 아퀴부스는 사거리와 관통력 측면에서도 크게 혁신적인 무기는 아니었다. 학자들은 대체로 16세기의 총이 석궁과 맞먹거나 그보다 조금 못 미치는 관통력을 지니고 있었고 곡사로 쏠 경우 발사체 비거리도 비슷했을 것으로 본다. 하지만 석궁처럼 아퀴부스도 장전이 오래 걸리고 곡사로 쏘면 위력이 크게 떨어지기 때문에 현실적으로는 실전에서 탄막 형성을 목적으로 무조준 사격을 하는 경우는 거의 없었다(르네상스 이후 장거리 곡사와 탄막 형성이라는 일반 활의 역할을 이어받는 무기는 포다).

  그렇다면 여러 가지 무시 못할 결점도 있고 전반적인 성능에서 석궁을 능가하는 것도 아닌 아퀴부스가 유럽 전역에 빠르게 보급될 수 있었던 이유는 무엇일까? 바로 뛰어난 경제성과 용이한 사수 충원이다. 전장에서 석궁과 유사한 용도로 사용해 동일한 효과를 기대할 수 있으면서도 생산 비용은 더 저렴하고 누구나 쉽게 사수로 훈련시킬 수 있으니 석궁처럼 부대를 편성하기 위해 용병들을 고용해야 할 필요도 없어진 것이다. 

  여담이지만 임진왜란 때 일본군이 사용한 종자도 총은 유럽의 아퀴부스를 모방해 개량한 화승식 총이다. 1543년 경 일본에 상륙한 포루투갈 상인들이 지역 영주에게 총 두 자루를 선물로 바치는 데 일본의 도검 장인이 이를 복제해내면서 아퀴부스 보다 구경이 큰 종자도 총이 탄생했다. 16세기 끝 무렵에는 조선도 화승식 총(조총)을 생산할 수 있게 되는데 임진왜란 중 빼앗은 일본군의 종자도 총을 연구, 모방하여 만들어졌다고 한다.

  아퀴부스는 등장한 지 불과 한 세기 안에 유럽의 전장에서 석궁을 완전히 대체했지만 악천후 시 사용하기 어렵다는 치명적인 약점은 여전히 남아 있었다. 이를 해결하기 위해 화승식을 대신할 다양한 격발 방식들이 16세기부터 고안됐는데 이 중 실용화에 성공한 것은 치륜 방식(Wheellock system / sistema a ruota)과 수발/수석 방식(Flintlock system / sistema a focile)이다. 먼저 개발된(16세기 초) 치륜 격발 시스템은 방아쇠를 당기면 철제 바퀴들이 돌아가면서 마찰을 일으켜 점화하는 원리로 도화선이 없어 사수가 불을 붙일 필요도 없다. 비바람의 영향을 받지 않는 획기적인 방식인 건 맞지만 마찰로 점화를 일으키는 철제 바퀴 장치가 구조적으로 복잡해 제작이 까다롭고 오작동도 많았던 탓에 화승식을 대체하는 데 실패하고 곧 사라졌다.

17세기 초의 치륜식 총과 치륜 격발 장치들 (좌: 밀라노 스포르체스코 성 박물관, 우: 브레시아 루이지 마르쫄리 무기 박물관)

   화승식을 밀어내는 데 성공하고 다음 세대의 격발 장치로 군림한 것은 수발/수석 방식이다. 수석은 부싯돌을 뜻하니 수발 또는 수석 격발이란 부싯돌의 마찰로 불꽃을 일으켜 화약에 점화하는 방식을 말한다. 수석 격발은 도화선이 필요 없어 궂은 날씨에서도 쉽게 점화할 수 있을 뿐 아니라 간단한 작동 원리 덕에 오작동이 적어 치륜식보다 훨씬 안정적이다. 16세기 말에서 17세기가 시작될 무렵 네덜란드에서 처음 실용화돼, 1630년대 이미 화승식을 제치고 가장 널리 쓰이는 격발 장치가 됐다.

    수석 격발 방식의 등장은 총의 진화 그 이상의 의미를 지닌다. 화승총의 개발이 석궁을 도태시키고 투척 무기의 지형도를 바꾼 정도였다면 수발식 총의 등장은 유럽의 전투 방식 전체가 변화하는 시발점이라 할 수 있다. 수석식의 개발이 가져온 가장 직접적인 효과는 총의 경량화, 소형화다. 치륜식에 비해 훨씬 가볍고 작은 수석식 격발 장치 덕분에 보병용 총은 전체 무게를 늘리지 않고도 이전보다 긴 총신을 가질 수 있게 됐고(아퀴부스 이후 등장한 이 보병용 총을 머스킷 Musket/moschetto이라 부른다) 그만큼 정확도는 향상됐다. 나중에는 길어진 총길이에 착안해 총신 끝에 대검을 꽂아 쓰는 방법까지 개발되면서 창도 대체할 수 있게 돼 전장에서 창보병도 사라지게 만들었다. 권총의 발전도 수석 격발 장치의 혜택을 입은 사례다. 치륜 장치를 이용했을 때는 권총이 너무 무겁고 둔해 휴대하기도, 한 손으로 쓰기도 어려웠으나 수발식 덕분에 충분히 작고 가벼워져 기병들의 보조/호신 무기로 단검을 대체할 수 있게 된 것이다.

17세기 초 수발식 권총(좌)과 수석식 격발 장치(우), 브레시아 루이지 마르쫄리 무기 박물관

  그러나 수발식 총이 가져온 가장 혁명적인 변화는 군대의 편성 방식을 바꿔 놓았다는 사실이다. 잔고장이 적고 가벼우며 아퀴부스보다도 사용법과 조준이 간편한 머스킷이 널리 보급되자 유럽의 군대들은 더 이상 오랜 훈련기간과 전문화된 전투 기술, 전술 이해도를 갖춘 용병들에 의존할 필요가 없어졌다. 르네상스 시대 용병들이 맡았던 석궁수, 창보병의 역할은 이제 머스킷으로 무장한 징집병이나 저임금의 비숙련 직업군인으로도 대신할 수 있게 됐다. 게다가 화승총보다 빨라진 머스킷의 장전 속도와 대열 별 일제 사격 전술의 개량 덕분에 근접 백병전이 점차 줄고 사격으로 적을 쓰러뜨리는 방식이 전투의 중심이 되다 보니 고난도 전투 기술을 요하는(즉 여전히 용병을 필요로 하는) 기병의 비율은 줄어들 수밖에 없었다. 결국 수발식 총의 보급과 함께 르네상스가 막을 내리면서 유럽 각국은 용병제에서 모병제 혹은 징병제를 기반으로 한 군사제도로 바꿔 나가기 시작한다. 용병보다 일반 직업군인, 징집병을 유지하는 단가가 훨씬 낮으니 용병의 감소와 동시에 각국의 상비군이 증가하고 전체 군대 규모가 커지는 현상도 나타났다.

 

수석 격발 시스템의 작동 원리 (출처: 위키피디아)

  흔히 르네상스 시대에 출현한 총은 가공할 관통력으로 기사들의 갑옷을 무력화하고 중장갑 기병을 도태시켰다고 알려져 있다. 반은 맞고 반은 틀린 이야기다. 총의 등장으로 판금갑옷의 실효성이 크게 위협받은 것은 사실이고 중장갑 기병이 사라진 것도 맞지만 이는 총의 관통력이 엄청났기 때문은 아니다. 최근의 과학적인 연구들에 따르면 화승총 아퀴부스는 물론이고 초기의 수발식 총들도 관통력은 석궁과 대등한 정도였다. 전신 판금갑옷의 가장 두꺼운 부분을 뚫지는 못했을 거라는 뜻이다. 총기 사용이 보편화된 시대에도 상당 기간 흉갑과 퀴라스가 경기병들의 장비로 계속 사용됐다는 점이나 16, 17세기 전투에서 총상으로 인한 사망자의 대다수가 팔, 다리, 목 등 갑옷이 얇거나 없는 부위를 맞았다는 사실도 이를 뒷받침한다. 총탄이 흉갑의 곡면부를 뚫을 수 있을 만큼 치명적인 관통 능력을 지니게 된 것은 18, 19세기 강선(발사되는 총알에 회전력을 주기 위해 총신 안에 나선으로 판 홈)이 개발되고 원추형 탄환이 등장하면서부터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총이 기사들이 활약하던 시대를 끝낼 수 있었던 결정적 요인은 뛰어난 경제성과 가용성에 있다. 생산 비용이 저렴하고 누구나 쉽게 사수로 교육시킬 수 있다는 점에서 총은 물량과 효율이 지배하는 새로운 시대, 근대의 성격에 딱 들어맞는 전쟁 도구였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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