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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문준영 Mar 26. 2020

전쟁 방식과 무기의 변천2

갑옷과 칼

  시대와 지역에 따라 여러 가지 변형이 존재하긴 하지만 동서양을 막론하고 고대부터 중세까지 만들어진 금속 재질의 갑주들은 크게 보면 다음 네 가지 중 하나이거나 이들 중 일부의 혼합이다: 찰갑(lamellar armour), 판갑(laminar armour), 어린갑(비늘갑 scale armour), 사슬갑(chain mail). 간단히 설명하면 찰갑은 작은 금속조각들을 나란히 이어 붙인 것이고 판갑은 좀 더 큰 금속판들을 나란히 혹은 일부가 서로 겹치도록 이어 붙여 만든 형태다. 어린갑은 찰갑과 비슷하게 작은 금속조각들로 만들지만 나란히 이어 붙이지 않고 대개 가죽 재질 위에 물고기 비늘모양으로 붙여 제작됐다. 사슬갑은 말 그대로 작은 금속 고리를 사슬처럼 서로 엮어 만든 그물 옷이다. 찰갑, 판갑, 어린갑은 모두 인류가 금속을 다루기 시작한 초기부터 등장한 것으로 추정되는데 반해 사슬갑은 상대적으로 늦게 철기시대에 이르러 유럽에서부터 사용되기 시작한 것으로 보인다.


그림 1: 왼쪽 위부터 시계방향으로 판갑의 일종인 로마 군단병의 로리카 세그멘타타, 일본 사무라이의 찰갑, 중세 이탈리아 사슬갑, 어린갑을 입고 있는 프랑크 왕국 병사

  

  비잔틴과 러시아를 뺀 서부, 중부 유럽에서는 르네상스 이전까지 찰갑을 제외한 나머지 세 종류의 갑주들이 보편적으로 사용됐고 대개 가죽옷 위에 덧입거나 직물, 가죽 재질 등과 함께 보호장구를 구성하는 방식으로 쓰였다. 그중에서도 특히 사슬갑은 다른 갑옷들에 비해 가벼운 데다 어깨, 팔꿈치, 무릎 등 관절 부위를 덮어주면서도 그 움직임에 방해가 되지 않는다는 장점 덕분에 중세 중후반에 이르면 유럽의 전장에서 가장 널리 쓰이는 갑주로 자리 잡는다. 초기의 사슬갑은 팔 달린 튜닉같은 형태였기 때문에 머리와 목을 덮는 별도의 사슬옷을 입어야 했고 무릎부터 다리 아래부분은 전혀 보호해 주지 못했다. 그러나 12세기 말쯤 되면 머리 보호 부분은 후드처럼 일체화되고 다리 아래 부분은 따로 사슬옷으로 감싸거나 아예 발목까지 내려오도록 길어진 사슬갑이 출현한다(그림 2의 1100년경, 1250년경 기사 비교).

  움직임에 제약이 덜하면서도 베기 공격을 막는 데는 효과적이지만 사슬갑에도 결정적인 약점이 있었다. 찌르기와 타격 방식의 공격에는 취약하다는 사실이다. 따라서 이런 약점을 보완하기 위해 사슬 갑옷은 보조 방어구를 덧입는 것이 거의 필수였다. 이 보조 방어구들도 시간이 지남에 따라 개량을 거듭하는데 초기에는 단순한 두꺼운 가죽이나 직물 패딩을 사슬갑 밑에 받쳐 입는 형태였으나 차츰 여기에 다양한 방식으로 금속판을 덧대다가 나중에는 작은 철판들을 가죽 위에 리벳으로 이어 붙이거나 아예 직물 안에 꿰매 넣은 판금 코트(Coat of plate) 혹은 브리간딘(Brigandine)으로 발전한다. 판금 코트/브리간딘은 몸통 부분의 방어력을 보강하기 위한 장비이기 때문에 소매가 없는 조끼 형태로 이전 시대의 보조 갑주들과는 달리 사슬갑 위에 입는다(그림 2에서 1330년경 기사가 입은 빨간 겉옷). 이와 그 밖의 유사한 변형들은 14세기 말, 15세 초부터 유럽의 가장 대표적인 보조 갑주 중 하나가 된다.

그림 2: 중세부터 르네상스까지 갑주와 투구의 변천

  르네상스가 본격적으로 꽃 피우는 15세기에 이르면 사슬갑이 유럽의 전장을 지배하던 시대는 막을 내린다. 전신 판금갑(Full plate armour)이 등장했기 때문이다. 사실 중세 말부터 금속가공 기술이 향상되기 시작하면서 보다 큰 강판을 만들어 신체의 넓은 면적을 보호하려는 시도는 꾸준히 지속돼 왔다. 이미 14세기 초부터 어깨, 무릎, 팔꿈치 같은 부위에 강철 원판을 덧댄 기사들이 나타났고, 세기 후반에는 팔 상하박의 일부나 허벅지, 정강이 등을 덮는 판금갑은 물론 금속판을 신체 굴곡을 감안해 곡면으로 만든 흉갑(breastplate)도 널리 쓰이게 된다. 하지만 등, 겨드랑이 주변, 상박 안쪽, 허벅지 뒤편과 골반 앞면, 쇄골 부근 목 아래쪽처럼 여전히 강판으로 덮지 못하는 부위들이 있었으니(그림 2의 1400년경 기사 참조), 지속적인 개량과 변형을 거쳐 온몸을 거의 완전하게 가리는 전신 판금갑이 등장하게 되는 것은 1400년대 중반의 일이다. 전신 판금갑의 완성으로 사슬갑의 역할은 밑에 받쳐 입는 보조 방어구로 바뀌었고 이제 전장의 주역인 기사들은 이중(사슬갑+판금갑) 또는 삼중(사슬갑+브리간딘+판금갑)의 갑옷을 입은 중무장 기병이 됐다.

  그러나 계속해서 장갑을 강화하며 착용하기 힘들고 무거워지기만 하던 변화의 추세는 르네상스 말기가 되자 일대 격변을 맞는다. 위 그림을 다시 한번 보자. 17세기 초가 되면 전신 판금갑옷이 갑자기 사라지고 기병들은 브리간딘과 강철 흉갑 또는 퀴라스(흉갑+등 부분 장갑)만 입고 있다. 이렇게 이전까지의 발전 양상과 정반대 되는 변화가 일어난 결정적 이유는 새로운 무기, 총 때문이다. 물론 개인 화기류 형태의 총이 유럽에서 사용되기 시작한 것은 훨씬 이른 15세기 부터

그림 3: 17세기 초 유럽의 경기병, 스포르체스코 성 박물관, 밀라노(이탈리아)

지만 초기의 총들은 관통력도 형편없었고 정확도도 매우 떨어져 판금갑옷에 큰 위협이 되지는 못했다. 16세기 중반에 이르러 재장전이 훨씬 용이하고 관통력과 명중률까지 크게 향상된 총들이 출현하자 번쩍이는 무거운 갑옷을 입어 눈에 잘 띄고 움직임이 굼뜬 중장갑 기병들은 총기 사수들의 손쉬운 표적으로 전락한다. 결국 판금갑옷이 총알과 포탄 파편을 효과적으로 막아주지 못하게 되자 기병들은 차차 장갑을 포기하고 기동성과 속도를 강화하는 방향으로 진화하게 되었으니, 이로써 중장 기병들의 시대는 막을 내린다. 1600년대에 들어서도 한동안 전신 판금갑옷은 꾸준히 제작됐지만 왕족, 귀족들의 호화로운 장식품 혹은 예식용 의상의 일부로 만들어졌거나 마상창시합(토너먼트)용으로 소비됐을 뿐이다.

  이제 포스트 르네상스는 상대적으로 체구는 작지만 빠르고 날렵한 말에 올라 날아오는 총탄을 뚫고 전선을 돌파하는 경기병의 시대가 된다. 16세기 말, 17세기 초부터 중동부 유럽을 중심으로 등장해 이내 전 유럽에서 기병 전력의 새로운 중추로 부상하는 흉갑 기병(Cuirassier), 후사르(Hussar), 용기병(Dragoon) 등은 헬멧형의 투구와 흉갑만 입고 화승총이나 권총, 칼 또는 경량의 짧은 창으로 무장한 대표적인 경기병들이다.


   인류가 가장 오랫동안 사용해 온 무기 중 하나인 칼은 중세와 르네상스 시대에는 갑옷의 발전을 민감하게 반영해 변화한 대표적인 장비였다. 중세 초 유럽의 칼은 대개 곧고 두꺼운 칼날에 밑동이 넓은 모양이었다. 방어구가 빈약한 보병과 사슬갑을 입은 적 기사를 모두 고려해 베기와 찌르기, 때리기 공격이 모두 가능하도록 만들어진 것이다. 또 다른 이유도 있었다. 이 시기에는 금속 제련 기술이 빈약한 탓에 유럽에서는 강철을 거의 제조하지 못했고 따라서 전투 중 충격으로 부러지거나 구부러질 확률을 낮추기 위해 칼의 몸체를 두껍게 만들었다.

   14세기에 이르면 보병, 궁수를 포함해 전장의 전투원들 대부분이 부분 사슬갑이나 적어도 가죽 패딩 정도의 보조 방어구 정도는 갖추게 되고 기사들의 방어 장비 또한 크게 발전한다. 더욱이 부분 판금갑이 등장해 신체의 여러 부위를 덮어주게 되면서 베기 공격의 효과가 더욱 떨어지자 칼은 찌르기에 보다 적합하도록 변화하기 시작했다. 칼끝이 점점 길고 뾰족해진 것이다. 15세기 들어 기사들이 판금갑을 두른 부위가 늘어날수록 한동안 이런 경향은 더 강화됐다.

그림 4: 16세기 유럽 기사들의 칼, 루이지 마르쫄리 무기 박물관, 브레시아(이탈리아)

  그러나 세기 중반 전신을 덮은 판금갑옷이 나타날 무렵이 되면 칼의 변천은 또 한 번 큰 전환점을 맞는다. 이제 겨드랑이, 무릎 뒤처럼 판금갑 사이로 드러나는 아주 좁은 부분을 찔러 공격하기 위해서는 날이 더욱 가늘고 뾰족해져야 하는데 이 경우 칼 몸체의 강도는 떨어질 수밖에 없어 적과 칼을 맞부딪히며 싸울 때 쓰기엔 적합하지 않게 된다. 칼날이 부러지기 쉽기 때문이다. 또 한편으론 판금갑을 공략하는 보다 손쉬운 방법, 즉 때리기 공격의 효과를 강화해야 할 필요성도 커졌으니, 갑옷 입은 상대방을 두들겨 그 충격으로 뼈를 손상시키거나 뇌진탕을 일으키려면 칼 몸체는 두껍고 무거울수록 좋았다. 이 두 가지 모순된 필요를 충족시키기 위해 유럽 기사들의 칼은 이 무렵부터 두 부류로 나뉘어 발전한다. 상대를 때려서 쓰러뜨리기 위한 묵직한 검(그림 4의 하단)과 반대로 강판 사이 틈새를 찌르는 데 특화된 날이 가늘고 가벼우며 날카로운 칼(그림 4의 상단)로 분화되는 것이다. 르네상스 시대 기사들은 개인 취향에 따라 이 두 가지 칼을 모두 갖추거나 전자 대신 해머, 철퇴(mace) 같은 다른 타격무기와 함께 후자의 칼을 장비하고 전투에 나섰다. 15세기 말부터 16세기 중반까지 많이 쓰인 양손으로 휘두르는 장검(Two handed sword, Zweihänder)은 전자의 칼들이 발전돼 나온 극단적 형태로 보통 길이 1.8-2m, 무게 3-4kg에 이르렀다. 르네상스 시대 만들어진 독일의 어느 검술 교범에 따르면 이런 양손 장검들은 때에 따라 칼날뿐 아니라 손잡이 부분도 둔기처럼 사용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림 5: 16세기 양손 장검들, 코레르 박물관, 베네치아(이탈리아). 바닥에 놓인 일반 검과 비교하면 그 크기를 짐작해 볼 수 있다.
그림 6: 18세기 사브르, 베네치아 해군 역사박물관

  총포의 발달과 전신 판금갑옷 시대의 종말은 칼의 변천에도 영향을 미쳤다. 찌르기 기능 위주의 칼은 살아남았지만 양손 장검 등 타격 위주의 칼은 전장에서 사라져 일부 군대에서 의식용으로만 사용된다. 아울러 전반적인 방어 장구의 경량화 추세로 전투원들이 자유롭게 몸을 움직이게 된 덕분에 칼 손잡이는 훨씬 짧아지고 무게는 가벼워지는데, 이에 발맞춰 서양의 검술도 재빠르고 민첩한 움직임을 강조하는 방향으로 발전하기 시작한다. 한편 경기병의 중요성이 커지면서 새로운 칼도 등장했다. 곡선 날을 가진 기병용 칼 사브르(sabre)다. 초기에는 사브르 중에도 곧은 양날을 가진 칼들이 있었으나 말 위에서 칼을 휘두르거나 내리쳐야 하는 기병들을 위해 점차 베기와 자르기 효과를 극대화할 수 있도록 곡선 날 형태로 발달한다. 현대 펜싱 종목 중 하나인 사브르는 바로 이 기병용 칼 사브르에서 기원한 반면 다른 두 종목 플러뢰와 에뻬는 레이피어(Rapier), 궁정검(Court sword/Epee de cour) 같은 찌르기에 특화된 17-18세기의 경량 검에서 유래했다. 오늘날 펜싱에서 플러뢰, 에뻬와 달리 사브르 종목만 칼을 휘두르는 베기 공격이 인정되는 것은 이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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