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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문준영 Mar 26. 2020

콘도띠에리: 르네상스 이탈리아의 전쟁과 용병

서문

오래 전 필자가 피렌체를 처음으로 방문했을 때였다. 그 유명한 피렌체의 대성당 산타 마리아 델 피오레에 들어가 보고는 기대에 못 미치게 수수한 내부에 약간 실망을 느꼈다.  분홍, 초록, 흰색이 어우러진 아름다운 대리석 벽과 화려한 전면 장식, 장려한 브루넬레스키의 붉은 돔 등 인상적인 성당 외부와 극명히 대비되는 단촐한 내부에는 돔 안쪽 천장에 그려진 바사리의 벽화와 바닥의 모자이크 외에는 이렇다 할 장식도 별로 없었다. 피사 대성당이나 시에나 두오모 같은 아름다운 설교단도, 대리석 모자이크도 없을 뿐 아니라 로마의 수 많은 교회들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유명한 예술가들의 성상이나 종교화 한 점 찾아보기 어려웠다. 하지만 상대적으로 빈약한 장식 덕분에 유독 방문자의 눈길을 끄는 것이 있었으니 성당 안 한 쪽 벽면에 그려져 있는 거대한 기마상 프레스코화 두 점이다. 벽화에 묘사돼 있는 말을 탄 두 인물은 피렌체에 고용돼 활약했던 르네상스시대 용병대장 존 호크우드(John Hawkwood, 1320-1394)와 니콜로 다 톨렌티노(Niccolò da Tolentino, 1350-1435)인데, 두 작품 모두 이들의 사후 피렌체 정부가 당대 최고의 화가들에게 의뢰해 제작한 것이다. 대성당 안 어디에서도 단테, 보카치오, 다 빈치, 마키아벨리 등 자국의 위대한 인물들을 기리지 않았던 피렌체가 유독 두 명의 외국인 용병대장에게 대형 기마상 초상화를 헌정한 이유는 무엇일까?

안드레아 델 카스타뇨 <니콜로 다 톨렌티노>, 피렌체 산타 마리리아 델 피오레

  몇 달 뒤 시에나를 방문했을 때도 비슷한 의문을 갖게 됐다. 옛 시에나 공화국의 정청인 푸블리코 궁 Palazzo Pubblico 평의회 회의실Sala del Consiglio에는 시에나의 화가 시모네 마르티니Simone Martini가 그린 대형 프레스코화가 있다. 시에나의 몬테마씨Montemassi 점령을 기념하여 제작된 이 벽화에서 중앙에 크게 그려진 말을 타고 있는 인물은 몬테마씨 점령 당시 시에나 군을 이끌었던 용병대장 귀도리치오 다 폴리아노Guidoriccio da Fogliano다. 푸블리코 궁 안을 장식하고 있는 그림들 가운데 성인, 성녀, 고위 성직자들을 제외하면 이 프레스코화는 독립 공화국 시에나의 황금기에 제작된 거의 유일한 초상화라 할 수 있다. 그렇다면 왜 시에나와 피렌체는 용병대장들에게 이렇게 이례적으로 영예로운 대접을 했을까?


  이후로도 이탈리아 곳곳을 방문할 때마다 많은 미술품, 건축물, 기념비 등을 마주치게 되면서 르네상스시대 일부 용병들을 영웅시하고 그들의 업적을 찬양했던 것은 비단 피렌체와 시에나만이 아니었음을 알게 됐다. 박사학위 논문을 위해 19세기부터 파시즘시대까지 이탈리아 민족주의의 역사관을 공부하는 과정에서 르네상스 용병대장들의 다양한 이미지가 후대에도 끊임없이 재생산, 소비 되었음을 확인한 필자는 더욱 더 이들에 대해 궁금해졌다. 르네상스 이탈리아에서 용병대장들은 과연 어떤 존재였을까? 그 시대 전쟁의 관행과 정치적 분쟁 속에서 이들의 역할은 얼마나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었는가? 왜 그토록 많은 동시대와 후대의 연대기 작가, 예술가, 지식인들이 이들의 행적을 기록하고, 인품과 업적을 평가하고, 그들로부터 영감을 받아 역사 속 영웅 혹은 악인의 이미지를 만들어 냈을까? 이러한 궁금증이 이 글을 쓰기 시작한 개인적 동기다.


  르네상스시대 이탈리아는 인문주의를 비롯한 근대적 사상과 가치관, 문화와 예술이 시작된 역사적 요람으로 우리에게 잘 알려져 있다. 중세 말부터 활발한 상업활동과 대외무역으로 경제적 번영을 누리며 부를 축적한 이탈리아 도시들은 13세기 말, 14세기 초부터 2-3백 년에 이르는 문화적 황금기를 맞이한다. 오늘날 우리가 르네상스라 부르는 이 시대에 이탈리아는 수 많은 위대한 예술가, 건축가, 시인, 문인, 사상가들을 낳았을 뿐 아니라 근대 은행업과 금융 자본주의, 회계기술, 인쇄술의 기반을 닦고 토목공학, 해부학, 천문학, 지리학 등 과학기술 지식의 비약적 발전을 이루었으며 근대적 정치사상과 국가 행정제도, 정책의 기본 이념들을 탄생시켰다.


  그러나 한편으로 이탈리아 역사에서 르네상스는 문화적, 경제적 황금기인 동시에 정치적, 사회적 불안정과 혼돈의 시기이기도 하다. 중북부 이탈리아에서는 사실상 독립 정치체로 존재하던 수 많은 중세 도시국가, 소규모 봉건 군주령들이 점차 밀라노, 피렌체, 베네치아 등 보다 큰 소수의 지역 영토국가로 통합돼 가는 과정을 겪으면서 인접 국가들 사이에 크고 작은 전쟁이 끊이지 않았으며, 교황청의 아비뇽 유수(1309-1377)와 서방 교회 대분열(1378-1417)로 반도 중부의 교황령에서는 오랫동안 무정부 상태에 가까운 정치적 혼돈이 이어졌다. 남부 이탈리아에서도 나폴리 왕국과 시칠리아를 두고 벌어진 헝가리, 스페인 왕가 및 프랑스 간 다툼으로 전쟁과 무장반란이 자주 일어났다. 이 시기 대부분의 이탈리아 국가들은 대내적으로도 매우 혼란스러웠는데 시민 계급의 사회, 경제적 영향력이 커지면서 기존의 지배층인 전통 귀족 가문과 대 시민(Popolo grasso)이 독점하던 정치와 행정에 소 시민(Popolo minuto) 세력이 가세, 내부 정쟁과 권력다툼이 더욱 복잡하고 치열해졌기 때문이다. 결국 잦은 정변과 민중봉기 등 내부적 혼란을 겪던 여러 북중부 이탈리아 국가들은 르네상스 말기 1인 독재체제(시뇨리아Signoria)로 전환하기에 이르렀고 이는 역설적으로 암살과 숙청, 반 정변과 외국 군대의 개입 등 또다른 혼돈과 정치적 불안정의 요인이 된다.


  위대한 예술가, 문인, 지식인들이 르네상스의 ‘빛’을 상징하는 인물들이라면, 용병대장들은 이 시대의 ‘그림자’를 대표하는 집단일 것이다. 르네상스 이탈리아의 용병대장들은 고용주를 위해 전쟁을 수행하기만 한 단순한 직업군인들이 아니다. 이들 중 상당수는 평시에도 자신만의 사병화 된 용병부대를 보유하고 전원 지역과 주요 상업 교역로 인근에서 비적행위를 벌이며 약탈로 소득을 올리거나 여러 코뮨 정부와 영주들을 위협해 합의금을 갈취했다. 뿐만 아니라 이들 용병대장들 중에는 그 자신이 봉건 소국의 군주이거나 전쟁의 혼란을 틈 타 자신만의 독립적 영토를 확립하려 한 인물도 적지 않았는데 이 경우 그들은 개인의 정치적 이해관계, 원한관계에 따라 고용주와 동맹을 바꾸는가 하면, 망명자 집단과 결탁해 특정 도시 국가의 정권교체나 장악을 사주하는 등, 정치적 행위자로서도 적지 않은 영향을 미쳤다. 이 때문에 르네상스 이탈리아의 직업 군인들은 역사적으로 이전, 이후 시대의 용병들과 구분해 콘도띠에리condottieri(단수형: condottiero 혹은 condottiere)라는 별도의 이름으로 불린다.


  콘도띠에리의 정치, 군사, 역사적 영향과 그들의 행적은 이미 르네상스 시대부터 이탈리아 지식인, 사상가, 예술가들에 의해 중요하게 다루어져 왔다. 마키아벨리는 <전쟁론>과 <군주론>에서 여러차례 르네상스 용병들에 대해 논했으며 루카Lucca의 콘도띠에리 카스트루치오 카스트라카니Castruccio Castracani의 전기를 썼다. 마키아벨리의 용병들에 대한 관심은 결코 특이한 사례가 아니다. 콜루치오 살루타티Coluccio Salutati, 프란체스코 귀차르디니, 레오나르도 브루니 Leonardo Bruni등 많은 르네상스시대 인문주의자들 또한 콘도띠에리의 행적을 기록하거나 그들에 대한 논평을 남겼다. 문인들도 예외는 아니었다. 시인 페트라르카와 아레티노는 당대의 유명한 콘도띠에리와 교류하고 그들에 대한 기록을 남겼으며, 단테의 <신곡>과 보카치오의 <데카메론>, 아리오스토의 <광란의 오를란도> 등에도 용병대장들의 이야기가 등장한다. 시모네 마르티니, 파올로 우첼로, 피에로 델라 프란체스카, 도나텔로, 베로끼오 등 르네상스 예술의 대가들도 콘도띠에리의 동상이나 초상화, 그들의 업적을 기록한 그림들을 남겼다.


  그러나 이러한 역사적 중요성에도 불구하고 콘도띠에리와 르네상스 시대의 전쟁은 국내에는 아직까지 잘 알려지지 않은 주제다. 대중 역사서, 해외 저작물의 번역서는 물론이고 우리 서양사 학계의 이탈리아 르네상스 연구들 또한 지금까지 주로 미술과 건축, 문화적, 경제적 번영과 그 주인공 및 후원자들에 집중해 온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르네상스 시대 전쟁과 정치, 사회의 역학관계와 변화양상에 대한 지식없이 마키아벨리, 귀차르디니 등 당대 이탈리아 사상가들은 물론이고 괴테, 브룩하르트, 존 러스킨, 안토니오 그람시, 페르낭 브로델, 아르놀트 하우저 등 수많은 후대 서구 지식인들이 남긴 르네상스 문명에 대한 방대한 논의들을 제대로 이해하기란 어려울 것이다. 따라서 이 글은 콘도띠에리라는 주제를 통해 르네상스 이탈리아의 또다른 일면을 조명하려 한다. 이 시대 용병과 그들이 가져 온 전쟁 양식의 변화, 그로 인한 사회, 경제, 정치적 파장, 기술의 전이, 역사적 영향 등을 살펴봄으로써 르네상스 시대의 현실을 이해하는 새로운 시각과 정보를 제공하고, 나아가 이 시대가 문화, 예술, 경제만이 아니라 정치, 국가행정, 전쟁과 폭력의 사회상이라는 측면에서도 어떻게 근대 서구사회의 근간을 형성하게 되었는지를 보여주고자 한다.


  앞으로 연재될 글들은 크게 세 부분으로 구성될 것이다. 첫 부분에서는 중세 말에서 르네상스 말기까지 이탈리아 반도의 정치, 사회적 변화를 개관하고 그와 관련된 전쟁 방식, 관행, 전략 및 전술, 무기의 발전, 군대 구조의 변화 등을 살펴보면서 궁극적으로 용병들이 르네상스 시대 전쟁의 주역이 된 원인과 과정, 결과를 논할 것이다. 아울러 용병단들의 일반적인 조직과 구성, 지휘체계는 물론이고 그들의 계약 (계약조건, 기간, 보수지급, 다양한 계약의 종류 등) 및 고용주와의 관계, 용병들의 사회적 위상과 병영생활에 대해서도 설명하고자 한다. 두 번째 부분은 르네상스 시대 용병대장들의 전기(傳記)가 될 것이다. 역사적으로 또는 정치적으로 중요한 영향을 남긴 콘도띠에리 십 여명을 선별해 이들의 경력과 일대기를 기술함으로써 앞선 부분에서 논한 내용들의 생생한 실례를 보여주는 한편, 르네상스 시대 용병과 그들의 존재가 당대와 후대에 미친 역사적, 문화적 영향과 의미 역시 고찰해 보려 한다. 마지막 부분에는 르네상스 시대 전쟁과 용병들 세계에 대한 일종의 약전을 담을 계획이다. 두 번째 부분에서 전기로 다루지 않은 그 밖의 중요한 용병대장들을 포함해 주요 용병단과 여러 콘도띠에리를 배출한 가문들에 관한 간략한 정보를 제공해 이탈리아 역사에 익숙하지 않은 독자들의 이해를 도우려는 목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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