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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문준영 Mar 26. 2020

전쟁 방식과 무기의 변천1

등자

  근대 이전 유럽의 전쟁사를 기술한 국내의 많은 책들이 흔히 소홀하게 다루는 부분 중 하나가 기술의 발전 혹은 새로운 무기의 등장이 전쟁 방식 및 전투 기술에 미친 영향과 그로 인한 전술의 변화다. 특히 르네상스 후기 화약과 총포의 보급으로 일어난 변화는 대체로 잘 알려져 있는 반면, 상대적으로 칼, 창, 투구, 갑옷, 활 등 중세 내내 유럽의 전장에서 널리 사용되던 필수 장비들의 변천사에 대해서는 간략하게 설명해 놓은 자료조차 찾아보기 어렵다. 우리가 손쉽게 '중세'라고 부르는 시기는 사실 서로마 제국이 멸망한 서기 476년부터 르네상스의 태동까지 짧게는 800년, 길게는 900년이 넘는 매우 긴 기간이다. 유럽의 문명이 로마제국 붕괴 이후 한 때 전반적인 퇴보의 시간을 거쳤다는 점을 인정한다 하더라도, 천 년에 가까운 이 긴 시간 동안 인간이 널리 사용하던 도구들에 아무런 변천이나 개량이 없었다고 믿긴 어려울 것이다. 전쟁 도구 역시 마찬가지다. 이 장에서는 중세부터 르네상스까지 가장 보편적으로 전장에서 사용되던 몇 가지 개인 장비들의 변화상을 간략하게 살펴보고 이러한 변화가 전반적인 전술이나 전투 방식, 군대 구성의 변천에 어떻게 영향을 미치고 또 역으로 영향을 받았는지 설명하고자 한다. 한 가지 미리 알려두자면 이 글에서 설명되는 내용들은 가급적 유럽의 보편적인 상황을 기준으로 삼지만, 유럽 전체의 공통성을 단정하기 어려운 경우엔 이탈리아에 국한해 이야기하거나 이탈리아의 상황을 중심에 두고 서술할 것이다. 

 

등자: 기병 중심 전쟁 시대를 만들다

  고대 유럽의 전쟁터를 지배한 것은 보병이었다. 먼 옛날 트로이 전쟁 시대부터 마라톤 전투, 테르모필레 전투는 물론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원정까지 전장에 나선 고대 그리스인들 군대는 전적으로 보병이 주력이었다. 대제국을 건설한 로마인들의 군대 역시 다르지 않았다. 병역 체제가 사실상 와해되고 국경의 방어가 허술해지는 제국 말기에 이르기 전까지 광활한 영토를 정복하고 제국을 일군 로마 군대의 중추는 언제나 보병 군단이었다. 반면 중세시대 전장의 주역은 기병이었다. 게다가 말을 타고 싸우는 기병들은 단순한 엘리트 전사 집단을 넘어 아예 귀족이 돼 유럽 사회의 지배 계급을 형성한다. 물론 고대에도 기병은 있었지만 그들은 언제나 보조 전력일 뿐이었고 사회적 지배계급을 형성하는 엘리트 전사 집단도 아니었다. 그렇다면 고대에서 중세로 넘어가면서 이런 변화가 일어났을? 도대체 수 천 년간 지속되던 보병 중심의 전쟁 방식이 중세 들어 바뀔 수 있었던 이유는 무엇일까?

  바로 등자(stirrup)라는 도구 덕분이다. 등자란 말안장 양쪽에 달린 문고리 혹은 버스 손잡이 모양의 승마장비로 기수가 말에 오를 때와 말을 타고 있을 때 발을 거는 도구다. 별 거 아닌 이 단순한 도구가 뜻밖에도 고대 유럽에서는 존재하지 않았다. 아래 사진의 유적들증명하는 것처럼 그리스, 로마인들은 등자 없이 말을 탔다.

그리스 항아리,  기원전 6세기
로마 기병을 묘사한 부조, 서기 1세기

  고작 발걸이 하나로 기병들의 위상이 바뀔 수 있단 말인가? 충분히 가능한 일이다. 등자가 없으면 무엇보다 말 위에서 중심을 잡기가 어려워진다. 달리는 말에서 떨어질 위험이 그만큼 커진다는 얘기다. 말 위에서 무기를 써야 하는 기병들은 한 손으로만 고삐를 잡고 다른 한 손으로 창이나 칼을 써야 하니 더욱 불안정하고 위태로울 수밖에 없었다. 따라서 등자가 없던 시대에는 제 아무리 출중한 기병이라 하더라도 전속력으로 말을 달리면서 목표물을 창으로 찌른다는 것이 거의 불가능했으니, 결국 고대 그리스와 로마 기병들이 적을 공격하는 방법은 둘 중 하나였다. 말을 달리며 창을 던지거나 목표물에 도달하기 전 달리던 말의 속도를 줄이며 창으로 찌르는 것. 어느 쪽이 됐든 이런 공격 방식으로는 적의 밀집한 보병 대열을 뚫기 극히 어려웠음은 당연하다.

  등자의 도입은 기병들의 이런 전투 방식을 획기적으로 변화시켰다. 등자에 발을 딛고 말 위에서 보다 안정적으로 중심을 잡게 되자 기수들은 손을 훨씬 자유롭게 쓸 수 있었다. 숙련된 기병들은 말 위에서 양손으로 무기를 사용하는 게 가능해졌을 뿐 아니라 말을 달려가 창으로 목표물을 찌를 때 오는 충격에도 효과적으로 대응할 수 있게 됐다. 즉, 달리는 말의 속도를 줄이지 않고 그대로 적을 향해 돌격할 수 있게 됐다는 뜻이다. 이제 등자 덕분에 높이에다 속도의 우위까지 십분 활용하게 된 기병들의 돌격은 웬만한 보병의 밀집대형으로는 막을 수 없는 가공할 파괴력을 발휘했다. 기병들은 그렇게 전장의 새 주역으로 확실히 자리 잡았고 중세가 무르익어 갈수록 기병전의 전술과 규모는 더욱 다양해지고 커진다.

  그렇다면 등자는 언제쯤 유럽에서 널리 사용되기 시작했을까? 간략한 설명을 위해 이 글에서는 고대 인도 등 일부 지역에서 존재하던 초기 형태의 등자(고리형태가 아님)는 언급하지 않겠다. 고고학적 증거에 따르면 중국에서는 한나라 때인 서기 3세기경 이미 등자가 사용된 것으로 보이며 늦어도 4세기에는 보편적인 승마 장비로 자리 잡았다고 한다. 뒤이어 만주와 한반도에도 5세기 무렵 등자가 전래됐는데, 고구려 고분군의 벽화들을 통해 이를 확인할 수 있다.

고구려 무용총 수렵도, 6세기 초

  동아시아에서 발명된 등자는 중앙아시아를 거쳐 유럽에 전해진 것으로 추정된다. 유라시아 대륙 중앙에 살던 유목민족들이 서쪽으로 이동하면서 이들과 먼저 접촉하게 된 비잔틴 제국의 일부 지역에 먼저 도입되기 시작했고 차츰 북유럽과 서유럽으로 확산된다. 정확한 보급 시기를 지목하기는 어렵지만 대체로 7세기경에는 오늘날의 불가리아, 헝가리, 체코와 동남부 독일 지역에, 8-9세기에는 독일과 이탈리아, 프랑스 등지로, 9-10세기에는 스칸디나비아와 북유럽까지 전파된 것으로 학자들은 보고 있다. 영국의 경우는 다소 논란의 여지가 있으나 늦어도 10세기 말이나 11세기 초까지는 등자의 사용이 널리 정착된 것으로 보인다. 해이스팅스 전투(1066)를 묘사한 유명한 바이외 태피스트리에서 노르만과 앵글로 색슨의 기병들이 모두 등자 달린 말안장을 사용하고 있다는 사실이 이를 뒷받침하는 증거다.

바이외 태피스트리의 일부분, 1070년대 제작(추정)

   사실 등자의 도입이 중세 유럽에서 기병 중심 전쟁의 시대를 열었다는 설명에 반론을 제기하는 학자들도 적지 않다. 이들은 여러 문헌 자료들을 바탕으로 프랑크 왕국의 군대는 서유럽에서 등자의 사용이 보편화되기 전에 이미 기병을 주력으로 삼아 전투를 치르고 있었을 것이라 주장한다. 1960년대 시작된 이 등자 논쟁은 대부분의 역사 논쟁이 그렇듯이 아직도 결론 나지 않았고 앞으로도 날 것 같아 보이진 않는다. 하지만 두 이론 모두 상당한 나름의 타당성을 지니고 있기에 필자는 양자를 합리적으로 절충한 설명이 역사적 실체에 더 가까우리라 믿는다. 서고트, 동고트, 반달, 롬바르드, 프랑크 등 중세 초 서유럽을 지배한 게르만족 보병들은 모두 제국이 건재하던 시대의 로마 군단에 비할 바가 못 됐다. 상대적으로 무장도 빈약할 뿐 아니라 훈련도 덜 돼 있고 군율도 체계적으로 잡히지 않았을 테니 로마의 보병대처럼 전투 시에 일사불란하게 움직이며 짜임새 있는 밀집대형을 유지하기가 불가능했을 것이다. 기병대가 굳이 돌격 전술을 앞세우지 않더라도 충분한 수만 갖추면 기동력과 높이의 이점만으로도 충분히 보병보다 우위를 점할 수 있었을 것이란 얘기다. 이에 주목한 프랑크 왕국은 남보다 앞서 기병 중심의 군대를 만들어 나가고 있었고, 때마침 이뤄진 등자의 보급으로 기병이 강력한 돌파력까지 갖추게 되면서 이런 추세를 더욱 빠르고 확실하게 완성시킨 것으로 보인다. 기병 전술을 앞세운 프랑크 왕국은 이후 서유럽과 중부 유럽을 장악하게 되고 프랑크족의 시대가 저문 뒤에도 그들의 전투 방식은 중세 전쟁의 전형으로 남는다. 결론적으로 말하면 등자가 기병 전쟁 시대의 문을 연 도구는 아닐 수 있지만, 적어도 이를 되돌릴 수 없는 대세로 확정해 주었음은 의심하기 어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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