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에서 프랑스까지 이어지는 중세의 주요 순례길이자 교역로 비아 프란치제나Via Francigena가 지나는 도시 시에나Siena는 일찍부터 상업으로 큰 번영을 누리며 토스카나 남부에서 위세를 떨치던 자치 공화국이었다. 공화국 시에나의 정부 청사인 정청(Palazzo pubblico) 안에는 이 도시의 화려했던 시절을 증명하는 중세 프레스코 벽화들이 여럿 있다. 가장 유명하고 미술사적으로 중요하게 평가되는 작품은 암브로지오 로렌제티의 <좋은 정부, 나쁜 정부의 우화 Allegory of Good Government and Bad Government, 1338-39>지만 시모네 마르티니의 프레스코화 <몬테마씨 공략도 The siege of Montemassi, 1330> 역시 많은 미술사가들의 연구대상이 된 그림이다.
토스카나 서남부 마렘마 Maremma 지역을 두고 피사와 경쟁하던 시에나는 1328년 피사군이 지키던 몬테마씨 Montemassi 성을 공격해 점령하는데 마르티니의 벽화는 이 승전을 기념하기 위해 제작된 것이다. 이 그림에서 화면의 중앙, 사령관의 지휘봉을 든 채 말을 타고 있는 인물이 공략전 당시 시에나군을 이끌었던 용병대장 귀도리치오 다 폴리아노 Guidoriccio da Fogliano다.
귀도리치오 다 폴리아노는 레지오 에밀리아 Reggio Emilia의 영주이자 교황당 Guelf 귀족인 니콜로의 아들로 1290년 경 태어났다. 스무 살 무렵부터 부친과 숙부의 뒤를 이어 에밀리아 로마냐 지방에서 교황당을 위해 싸우는 용병으로 일하다 1327년 시에나에 고용됐다. 이후 6년간 시에나군을 지휘해 여러 전투에서 피사를 물리치고 몬테마씨, 사소포르테Sassoforte (1328), 스칸사노Scansano, 아르치도소Arcidosso, 마싸 마리티마Massa Marittima (이상 1331년) 등 많은 영토를 점령하며 공화국의 영웅 대접을 받는다.
그러나 귀도리치오는 1332년 교황당을 버리고 황제당Ghibelline과 손잡은 동생 지베르토Giberto를 도와 베르트랑 두 포이 Bertrand Du Poyet 추기경의 교황군을 공격한다. 황제당인 피사와 적대관계였던 시에나는 이를 계약위반이라 보고 그를 해임했고 쫓겨난 귀도리치오는 동생 지베르토와 함께 잃어버렸던 가문의 근거지 레지오 에밀리아를 재점령했다. 2년 뒤 레지오 에밀리아를 만토바에 빼앗기자 북이탈리아 황제당의 대부인 마스티노 2세 델라 스칼라 Mastino II della Scala의 가신이 돼 베로나 군대를 위해 싸운다. 마스티노 휘하에서 파도바(1337)와 베로나(1348) 같은 핵심 도시의 행정관Podestà까지 역임하며 신임받았지만 스칼라 가문이 밀라노, 베네치아, 만토바의 협공을 받아 많은 영토를 잃으면서 점점 입지가 좁아지자 1351년 시에나의 복귀 제안을 받아들인다. 이듬해인 1352년 시에나에서 병으로 사망했다. 시에나 공화국은 그를 위해 정중히 장례를 치르고 유해를 시의 주요 교회 중 하나인 산 도메니코에 묻었다.
귀도리치오 다 폴리아노의 문장(좌)과 <몬테마씨 공략도> 중 말에 탄 귀도리치오 세부(우)
<몬테마씨 공략도>가 미술사에서 중요하게 다뤄지는 이유는 이 그림이 세속 인물의 초상화를 포함하고 있기 때문이다. 로마제국이 몰락한 후 서양 미술에서 개인의 초상화라는 영역은 오랫동안 자취를 감췄다. 기독교 문화와 가치관이 지배하던 중세 내내 유럽의 미술에서 초상화의 형식으로 묘사된 인물들은 성인, 성녀이거나 교황 같은 고위 성직자뿐이었다. 이 시대 미술 속에 등장하는 세속인이라고는 황제, 왕 등 아주 신분이 높은 인물들뿐이었고 그나마도 드물게 찾아볼 수 있었다. 게다가 이들 황제나 왕조차 개인 초상화처럼 작품 속에 단독으로 묘사된 경우는 더욱 찾아보기 어렵다.
<몬테마씨 공략도>는 바로 이 점에서 서양 미술의 새로운 시대를 알리는 작품이라고 볼 수 있다. 제목은 몬테마씨 공략이지만, 그림에 등장하는 인물은 화면 한가운데 크게 그려진 귀도리치오 한 사람뿐이니 누가 봐도 이 그림은 실질적으로 그를 칭송하기 위해 그려진 개인 초상화나 다름없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더욱이 귀도리치오는 작위도 없고 그다지 부유하지도 않은 별 볼 일 없는 귀족이라 왕이나 황제에 비하면 까마득히 낮은 신분이었다. 당시의 관습으로 보면 그 정도 신분의 평범한 세속인을 주인공으로 사실상의 초상화를 그렸다는 자체가 전례 없는 파격이었던 셈이다.
평범한 세속인 귀도리치오 다 폴리아노가 종교와 전혀 관련 없는 맥락 속에 주인공으로 묘사됐다는 점도 중요하지만, 그에 못지않게 그가 그림 속에서 말을 타고 있다는 점도 주목해야 한다. 고대 로마시대부터 서양 미술에서는 특정 인물의 높은 권위와 존엄을 상징적으로 표현할 때 기마 인물상, 기마 인물도라는 형식을 사용했다. 역으로 말하면 드높은 권위를 널리 인정받고 막강한 권력을 부여받은 인물만이 말을 탄 포즈로 묘사될 자격을 지녔다는 뜻이다. 그래서 로마시대 기마상의 주인공은 모두 황제들이었으며, 제국이 무너진 뒤에는 수 백 년간 어느 누구도 로마 황제들만큼의 권위를 누리지 못했기 때문에(세속인에 대한 숭배를 금하는 교회의 권위가 오랫동안 세속 정치권력의 권위를 능가했거나 그와 거의 대등했던 탓도 있다) 선뜻 자신의 혹은 다른 누군가의 기마 인물상을 제작할 수 없었던 것이다. 시모네 마르티니의 <몬테마씨 공략도>는 바로 이 점에서도 당대 미술의 관행을 깨뜨린 혁신이었다. 일개 용병대장을 어느 왕이나 황제 못지않은 위엄을 지닌 인물로 칭송하는 동시에 그가 자신들의 군대를 이끌고 거둔 승전을 돋보이게 함으로써, 도시국가 시에나가 일궈 온 세속의 성취들이 종교적 가치 못지않게 중요하다는 메시지를 미술로 표현한 시도이기 때문이다.
2,30년 전 등장한 조토의 회화가 등장인물들의 생생한 표정과 몸짓을 통해 르네상스 미술의 핵심 요소인 인간성을 처음으로 구현했다면, 마르티니의 이 <몬테마씨 공략도>는 미술의 표현 방식과 상징적 기법을 종교적 대상에서 세속적 대상으로 확대시킨 초창기의 시도라는 측면에서 르네상스 예술의 또 다른 선구적 작품으로 평가할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