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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지우 Aug 07. 2023

연극 <클루>, 그리고 소통하는 법

미국에서 발견한 비밀

전에 미국 고등학교는 뮤지컬 한 편, 연극 한 편을 올린다고 했는데, 1월의 마지막 주가 딱 연극 공연을 하는 주였다. 뮤지컬 <그리스>에 참여하고 무대의 매력을 깨달은 나는 연극배우 모집 공지가 붙자마자 겁도 없이 지원했다. 많이 바쁠 때이기도 하고, 뮤지컬 만한 주연 욕심이 없어서 전만큼 준비하지는 않았다. 그래도 떨어뜨리는 경우는 잘 없어서 엑스트라로 참여할 수 있게 되었다.


우리가 올릴 연극의 제목은 <CLUE>. '클루'는 미국의 보드게임으로 시작해 영화로 만들어지고, 그것이 다시 연극으로 만들어진 독특한 극이다. '사건의 실마리'를 뜻하는 제목에서도 알 수 있듯이 미스터리를 해결하는 내용이다. 한 저택 안에서 벌어지는 살인 사건 이야기인데, 섬뜩하기보다는 웃긴 블랙코미디다. 

내가 맡은 역할은 저택의 하인이었다. (*스포일러 주의!*) 나중에 FBI 요원으로 진짜 정체가 밝혀진다. 극의 특성상 주연들이 무대에 있는 동안 하인들이 소품과 장치를 움직여 장소를 바꾸어야 해서, 엑스트라지만 꽤나 바빴다. 


근데 이 공연에서 내가 얻은 가장 큰 것은 친구들이었다. 나라가 바뀌어도 결국 같은 사람이라, 조용하고 내성적이었던 내가 전만큼은 아닐지언정 갑자기 활달해질 리 없었다. 평소엔 아랫학년 친구들이나 내 유학 메이트와 많이 다녔는데 딱히 더 큰 무리에 소속되고자 하는 욕망은 전혀 없었다. 뮤지컬은 규모가 굉장히 큰 공연이어서 딱히 다른 아이들과 친해질 이유도, 기회도 없었다. 그러나 연극은 훨씬 소규모에 캐스트 멤버들끼리 가깝게 소통해야 해서 걱정이 태산이었다.




처음으로 대본 리딩이 아니라 무대에서 하는 연습에 간 날, 옆자리에 벨라라는 아이가 앉았다. 목소리를 듣기 전까진 얘가 여자라는 것도, 몇 학년인지도 알 수 없어서 진땀을 흘렸다. 

"Hey"

딴생각을 하다 소스라치게 놀랐다.

"Um, hey?"

어색한 침묵이 흘렀다. 벨라는 자신도 저택 하인 역할이라며 자기소개를 했다. 11학년인 벨라는 '클루' 영화를 엄청나게 좋아한다고 했다. 난... 이번에 처음 들어봤다.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뮤지컬 노래를 좋아한다거나, 언어 배우는 걸 좋아한다거나 등등 공통점을 발견하고 조금씩 친해졌다. 그러다 다른 저택 하인들 올리비아, 해나, 그리고 몇 명이 더 모여 순식간에 큰 모임이 되었다. 그날 이후로 더 이상 다른 캐스트 멤버들에게 다가가는 것을 주저하지 않았다. 부끄러울 땐 눈 딱 감고 한 마디 먼저 던졌다. 그럼 어떠한 정도로든 답이 돌아왔다. 안타깝게도 나보다 높은 학년이 대부분이었지만 11월부터 밤 연습을 함께한 우리들은 급속도로 친해졌다. 


난 친구를 만들 기회가 없었다고 생각했던 적이 많았다. 이때 아니라고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미국에서 배운 소통이라는 것은 먼저 손을 내미는 것이다. 그럼 아주 성격이 이상한 사람이 아니고서야 일단 반갑게 받아줄 것이다. 친해지고 싶을 때, 도움이 필요할 때, 또는 그냥 살아가면서도 소통을 외면할 수는 없다. 완전히 새로운 나라에 나 자신을 던져놓으면서 첫 번째로 느낀 것이다. 

나와 다른 사람을 연결하는 것, 상대가 연결고리를 유지하고 싶을 사람이 되는 것, 또는 유지하려는 노력을 하는 것을 모두 타인에게 맡겨놓으면 어떤 관계도 제대로 맺을 수 없다. 그 손을 먼저 내밀어 관계를 맺고 소통을 하는 것이 모두 두렵게만 느껴졌던 과거의 나는 항상 누군가 다가와주기만을 기다렸다. 내 옆사람도 똑같이 생각하고 있는 줄도 모르고. 




연극 공연 날짜는 뮤지컬보다 빨리 다가왔고, 빨리 지나갔다. 이번엔 내 손으로 진한 무대 화장을 하고, 하인에 맞는 금색 셔츠와 검은 스커트에 구두를 신었다. 미리 FBI라고 적힌 모자와 트렌치코트를 준비해 두고, 가구들을 전부 올바른 자리에 가져다 놓으면 비로소 공연이 시작되었다. 

뒷배경에서 작은 애드리브를 치거나 주연 친구의 의상에서 떨어진 배지를 황급히 숨겨 주기도 하는 등, 재미있는 일이 많았다. 눈만 마주쳐도 웃음이 터지려고 하는 걸 간신히 참았었다. 무대 뒤편에서 FBI요원 의상으로 갈아입고 손으로 총 쏘는 시늉을 하거나 커튼 뒤에서 주연들의 대사를 정확히 립싱크하며 놀았다. 같은 취향과 생각을 공유하는 사람들과 함께 즐기는 것이 얼마나 신나는 일인지 깨달았다. 앞으로 어떤 무대를 해도 지금의 설렘이 살아나지는 못할 거라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마지막 공연을 마치고 토미가 꽃다발을 건네주었다. 집으로 가는 길에 눈이 내렸다. 모든 캐스트 친구들과 선생님들께 인사를 하고 건물을 나서자 벌써 밤이었다. 어둑어둑해진 하늘을 눈송이가 예쁘게 수놓았다.


연극이 끝난 후에는 대부분의 클루 친구들을 만나기 어려웠다. 그래도 복도에서 마주치면 반갑게 인사하는 사이가 되었다. 그 공연, 그리고 공연을 준비한 시간들 덕분에 작게나마 먼저 손을 뻗을 줄 아는 사람이 된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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