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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지우 Aug 07. 2023

1월, 집 나오면 서럽다

미국에서 만드는 떡국 한 그릇

화려한 일 년의 마무리, 크리스마스가 지나면 공허가 찾아온다. 함께 시간을 보내기 위해 모였던 가족들은 각자의 자리로 돌아가고, 나도 내 자리로 돌아가야 할 것 같은 느낌을 받곤 했다. 새해를 맞기 직전, 레트리버 니아는 내 무릎에서 잠들어 있고 제니, 앤드류, 토미와 함께 애니메이션 영화 <빅 히어로 6>를 틀었다. 1월 1일로 넘어가는 순간,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라고 허공에 대고 속삭였다. 마음으로만 함께한 모두에게 닿길 바라며. 




방학은 순식간에 끝나고 2학기가 시작되었다. 첫 학기처럼 소개할 것도, 새로운 만남도 없으니 선생님들은 마음껏 진도를 빼고, 학생들은 방학의 여운에서 빠져나오려 애썼다. 다시 열심히 달려가리라 마음을 먹는데 어느 날, 청천벽력 같은 소리가 들려왔다. 그날은 공기부터 뭔가 불길했다.


"그러니까, 올해까지만 같이 살 수 있다는 거죠?"

"어... 케이티도 졸업하고 토미만 남아서... 별로 같이 살기 좋진 않을 거야."


사실 내 호스트 가족은 일 년 동안만 나와 함께 하겠다고 신청한 사람들이었다. 이후에 잘 모르고 한 결정이었다며 원한다면 졸업할 때까지 있어도 괜찮다고 했지만, 그새 많은 일들이 있었다. 케이티는 꽤 오랫동안 아팠고 학교 친구들과 문제가 있어서, 결국 일찍 졸업하고 근처 대학에서 운영하는 고등학생 전용 프로그램에 합류하기로 했다. 나중에 알게 된 부분이지만, 앤드류의 직장 때문에 곧 텍사스로 이사를 가야 할 가능성도 있었다. 내가 언제 멀리로 이사 갈지 모르는, 그리고 내 또래의 아이도 하나 없는 집에서 사느니 다른 가족을 찾는 게 더 낫다고 판단한 모양이었다. 

맞는 말이다. 문제는 새로운 가족을 찾기가 쉽지 않다는 것. 일단 부모님께도, 유학원에도 내년에는 새 호스트를 찾아야 한다고 알렸지만, 불안한 느낌을 떨칠 수 없었다. '만약 날 받아줄 사람이 없으면 어떡하지?' 나를 배려한 선택인 걸 알면서도 이제 '우리 집'이 아닌 것 같은 씁쓸함이 감돌았다. 




유학을 떠나기 전, 오래 함께한 영어 과외 선생님과 인사를 나눴다. 캐나다 분이셨는데 내가 만났던 영어 선생님 중 가장 마음이 잘 맞는 분이었다. 그분이 말했다.

"유학 가면 처음 세 달은 잘 지내고, 다음 세 달은 죽을 듯이 힘들다고 하더라. 그래도 너는 잘할 수 있을 거야."

그렇지만 내가 정말 서러웠던 것은 1월쯤이었다. 새 호스트를 찾아야 한다는 부담감, 더 어려워진 학교 공부, 지쳐가는 몸과 마음 때문에 약간 삐걱거리는 로봇처럼 매일을 버텼다. 특히 새해가 되자 한국 음식이 정말 먹고 싶었다. 당시 학교 신문에 낸 글이 '설날과 떡국'이었으니 얼마나 한국 음식을 그리워하고 있었는지 지금도 느껴진다. 그래서... 떡국을 만들었다.


조금 뜬금없긴 하지만 떡국을 먹으려면 직접 만드는 수밖에 없었고 난 꼭 한 살을 먹겠다고 다짐을 한 상태였다. 한국 식료품 마트에 가서 비싼 재료들도 과감히 사 모으고 한 토요일을 아주 떡국 토요일로 잡았다. 동전 육수를 끓이고 떡을 불렸다. 달걀흰자와 노른자를 분리해 서툴지만 지단도 부쳤다. 바닥은 좀 그을리고, 구멍도 나고, 잘못 뒤집혀 모양이 엉망이었지만 마음에 들었다. 파를 썰어 조금은 국물에, 조금은 고명으로 두었다. 떡과 물만두를 함께 넣고 끓인 뒤, 파와 지단, 김가루를 얹고 후추를 뿌렸다. 있는 대로, 손 가는 대로 막 만든 떡국이었지만 한참 만에 느껴본 한국의 맛은 완벽했다. 



타지 생활을 하다 크게 아팠던 사람이 컵라면 하나에 다 나았다는 말을 듣고도 믿기 어려웠는데 그걸 내가 직접 체험하고 있었다. 이때 비로소 한 살을 먹은 것 같았다. 그 떡국 한 그릇의 온기에 힘을 얻어 다시 기름칠을 잘하고 달려가기로 했다. 




엄마와 이야기를 하던 중, 내가 유학 가서 너무 못하고, 너무 힘들고, 돌아오고 싶으면 어떡하냐고 물은 적이 있다. 그때 엄마는 이렇게 말했다.

"그럼 언제든지 돌아와. 엄마가 기다리고 있을게."

돌아올 곳이 있다는 사실이 오히려 내게 돌아가지 않을 수 있는 단단함을 주었다. 그렇게 1월의 끝자락까지 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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