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산 이후, 사랑이 두려움보다 커지기까지의 아홉 달
한껏 인상을 찌푸린 얼굴로 아기 고양이 같은 울음소리를 내던
이른둥이 아기를 낳은 지도 벌써 아홉 달이 되었다.
‘못생겼네.’
하고 생각했던 울긋불긋한 얼굴은 황달이 채 가시지 않았던 누렁이 시기를 지나,
이제는 뽀얗게 살이 올라 언제 그랬냐는 듯 극강의 귀여움을 자랑한다.
아침에 눈을 뜨면 “아이구, 우리 아기 잘 잤어? 좋은 꿈 꿨어?” 하고 인사하며 꼭 안아준다.
새벽에 잠에서 깨 울음을 터뜨리면 품에 안고 이렇게 말한다.
“엄마가 없어서 무서웠어? 아이구, 우리 아기. 세상에서 제일 예쁜 우리 아기.”
이른둥이로 태어나서 혹시 약하면 어쩌나 했던 걱정이 무색하게도,
아기는 자기 발달 속도대로 씩씩하게 잘 자라고 있다. 나는 늘 아기에게 말해준다.
“혼자서 입원 기간을 잘 버텨낸 것, 지금처럼 건강하게 자라고 있는 것만으로도 너는 이미 최고의 효도를 다 한 거야. 넌 효자야.”
앞으로도 이 마음 그대로 아이를 키울 생각이다.
아이의 몸과 마음이 건강하다면, 그걸로 충분하다고 믿으며.
공부를 못해도 괜찮다. 받아쓰기 틀려도 괜찮다. 영어를 못하면 또 어떤가.
한국 사람이 한국어만 잘해도 된다고 말해주며 키우고 싶다.
서른두 주 오 일째 되던 밤, 따뜻한 엄마 배 속에서 갑작스럽게 바깥세상으로 나와야 했던 아기를 무탈하게 맞이한 것만으로도, 우리는 이미 엄청난 행운을 얻었으니까.
어제와 오늘이 다르고, 오전과 오후가 다르게 자라는 아기 곁에서 함께하는 일은 세상 그 무엇과도 견줄 수 없는 행복이다.
침대에 누워 꼬물대던 아이는 이제 뭐든 붙잡고 일어서고, 엄마와 아빠의 몸통을 타 넘는다.
‘응애’는 ‘에우’가 되었고, 어느새 ‘엄마’와 ‘아빠’를 연습하느라 분주하다.
잠시라도 엄마가 시야에서 사라지면 애타게 찾다가, 다시 나타나면 조막만 한 손으로 옷자락을 꼭 붙들고 얼굴을 품에 묻는다. 손을 잡고 일으켜 세우면 통통하고 촉촉한 발바닥으로 한 발, 또 한 발 앞으로 내딛는다.
강아지가 몸을 터는 모습을 보고 까르르 웃음을 터뜨리는 모습을 보면, 심장이 찌르르 아파올 만큼 사랑스러워서 견딜 수가 없다.
잠든 아기의 볼록한 이마와 통통한 뺨, 긴 속눈썹을 하염없이 바라보다가 꼭 움켜쥔 작은 만두 같은 손에 코를 대고 냄새를 맡는다. 고소하면서도 약간 시큼한, 아기만의 냄새.
엄마들은 아기를 키우며 임신과 출산의 고통을 모두 잊어버린다고들 한다.
아기가 너무 예뻐서 과거를 잊고 둘째를 갖고 싶어진다고.
나는 반반이다.
초음파 화면 속에서 반짝이던 작은 심장을 보며 설렜던 기억, 태동을 느끼며 눈물이 날 만큼 벅찼던 감동과 함께, 아팠던 기억들도 선명하다.
갑작스러운 양막 파수와 조산, 태어나자마자 NICU로 보내야 했던 순간, 조산이 내 탓인 것만 같아 죄책감에 밤새 울던 날들.
그 기억들을 떠올리면 ‘이 아이 하나만 사랑하며 키우자’는 마음이 절로 든다.
그러다 하루가 다르게 자라며 끝도 없이 예뻐지는 아이를 보면,
‘잘 관리하면 다음엔 만삭까지 품을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스친다.
곧이어 ‘욕심이야’ 하고 고개를 젓는다.
아무것도 몰랐으니 임신도 하고 출산도 했지.
한번 겪고 나니 다시는 하고 싶지 않은 경험이라는 생각도 솔직히 든다.
앞으로 아이가 어떤 인생을 살게 될지는 알 수 없다.
내가 조산을 하게 될 줄 몰랐던 것처럼, 그 미래 또한 전혀 예측할 수 없는 일이다.
아이의 자리가 마음속에서 커질수록 두려움도 함께 자란다.
가능하다면 아이 앞에 놓일 불행의 씨앗을 모두 제거해주고 싶다. 하지만 그럴 능력은 내게 없다.
사랑할수록 불안해지고, 지켜주고 싶다는 욕심은 점점 커진다.
그러나 그 마음이 지나치면 독이 되리라는 것도 안다.
그래서 나는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하려 한다.
아이를 진심으로 사랑하는 것, 아이와 함께 성장하는 것.
알 수 없는 미래를 걱정하느라 오늘을 잃기보다, 아이와 함께할 재미있는 내일들을 하나씩 그려보는 것.
그것으로 충분하다고, 지금은 믿어보려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