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른둥이 육아와 모유수유, 고난의 50일

by 푸르른도로시



조리원에서 함께한 짧은 이틀이 끝나고, 아기와 함께 세 가족이 집으로 돌아왔다.
아기를 낳기 직전 이사를 한 탓에, 집 안은 말 그대로 폭탄을 맞은 듯했다.

만삭에 태어날 줄 알고 출산 전까지는 다 정리해둘 생각이었지만, 당연하다고 믿었던 만삭 출산은 내 뜻대로 되지 않았다.


다행히 아기를 데려오기 직전에 시어머니께서 친척을 통해 아기 침대며 패드, 모빌 등을 구해주셨다.
덕분에 적어도 아기가 누울 곳 하나는 막 완성된 참이었다.


정리되지 못한 짐들이 너저분하게 깔린 거실을 비집고 들어가, 큰방 침대 옆에 막 들여놓은 아기 침대 위에 아기를 눕혔다. 나무로 된 난간으로 사방이 둘러싸인 침대 안에서 꼬물거리는 아기는, 침대 크기의 반도 안 되어 너무나도 작았다. 그래서 한동안, 눈을 뗄 수가 없었다.


배 속에 있었다면 이제 막 35주가 되었을 아기. 하지만 세상 밖으로 나왔으니 어쨌거나 ‘신생아’였다.
신생아의 할 일은 단순하다. 먹고, 자고, 싸는 것. 부모의 할 일도 단순했다. 먹이고, 씻기고, 재우면 되니까.


그런데 그 단순함이 그렇게 어려울 줄이야.

콩알만 한 위를 가진 아기는, 모유를 먹는 탓에 소화가 너무 잘 돼서 끊임없이 배가 고팠다.

완모를 목표로 유축과 직수를 병행하던 나는, 한 시간 이상 연속으로 자는 게 불가능했다.
잠을 못 자니 식욕이 떨어지고, 식욕이 떨어지니 밥이 넘어가지 않았다. 결국 퀭한 몰골로 하루하루를 버텼다.



어느 날 아침, 여느 때처럼 유축을 하던 중이었다. 졸린 눈으로 젖병을 들고 있다가, 손에서 놓쳐버렸다.
짜놓은 100ml 중 50ml 이상이 바닥에 쏟아지는 걸 보는 순간,
‘뚝’— 정신줄이 끊어지는 소리가 들렸다.


“안 해. 나 모유수유 안 해.”


아직 빠는 힘이 약한 아기에게 모유를 먹이기 위해 세 시간마다 30분씩 유축을 하고, 중간중간 젖병을 씻고 열탕 소독을 하고, 아기가 울면 젖을 물리고, 다시 20~30분씩 트림을 시키는 생활이었다.

제대로 눈 한 번 붙일 시간이 없었다.

그나마 산후 관리사가 오는 시간대에는 세 시간 정도 연속으로 잤지만, 그것도 유축하느라 푹 잘 수는 없었다.

아기를 낳기 전에는 젖병 설거지가 귀찮을 것 같아 모유수유를 결심했다.
‘기왕 여자로 태어났으니, 타고난 기능은 다 써보자’는 기묘한 야심도 있었다.

하지만 미숙아로 태어난 아기를 보고 나니, 아기의 면역력을 위해 꼭 모유수유를 해야겠다는 결심을 굳히게 되었다. 그럼에도 수면 부족 앞에서는 어떤 의지도, 야심도 맥없이 무너졌다.


진심으로 포기하고 싶었다. 잠을 못 자면 사람이 미쳐간다는 걸 난생 처음으로 뼈저리게 느꼈다.
왜 ‘잠고문’이라는 게 존재하는지 너무나 이해가 갔다.


잠을 못 잔 사람은 사람이 아니라 영화 <28일 후>에 나오는 좀비였다.

화만 가득한, 인간의 껍데기를 쓴 좀비.


“왜 또 우는 거야, 왜! 왜!!”


이성을 잃고, 울음을 터뜨린 아기에게 화를 내고 말았다.
아기는 눈썹을 시옷자로 찌푸리며 어쩔 줄 몰라 하더니, 곧 서럽게 울기 시작했다.

그제야 정신이 번쩍 들었다.


‘내가 지금 뭐 하는 거지?’


미안함과 자괴감이 밀려오며 눈물이 쏟아졌다.

시간이 지나 젖이 다시 차올랐다. 나는 결국 포기하지 않기로 했다.
그동안의 고생이 너무 아까웠고, 끝까지 해보지 않으면 평생 후회할 것 같았다.

눈물을 닦고 다시 직수와 유축을 병행했다.


새벽에 남편을 깨우지 않으려고 혼자 젖병 소독을 하고, 혼자 모든 걸 감당하려던 걸 내려놓고 일부러 깨웠다.
남편이 기저귀를 갈고 젖병을 소독하는 동안, 나는 그 짧은 틈에 눈을 붙였다. 그 잠깐의 휴식으로 조금의 체력을 비축해두니 그나마 살 것 같았다.


어느 날은 몸살이 나서 남편이 하루 휴가를 냈다. 둘이서 하니 신생아 육아도 재미가 있고, 할 만했다.
‘육아휴직이 어느 직종에서든 자연스러운 사회라면 얼마나 좋을까.’
노산으로 지친 몸에, 육아까지 홀로 해야 한다면 누가 아이를 둘, 셋씩 낳을 수 있을까.
출산율이 낮은 건 너무나 자연스러운 결과 같았다. 스무 살 무렵, 밤새 술 마시고 바로 수업 가던 그 에너지였다면 신생아 육아쯤은 누워서 떡 먹기였겠지.


하지만 이제 나는 30대 초중반. 조그마한 도움의 손길에도 고마움을 느낄 나이가 되어 있었다.






생후 50일. 원래라면 이제 막 태어났을 시기가 되자 놀랍게도 젖 먹이기가 한결 수월해졌다.
유축을 줄이고, 본격적으로 직수 완모를 시도했다. ‘버티면 다 된다’는 말이 틀리지 않았다.
포기하지 않길 정말 잘했다.


다만, 문제는 여전히 남아 있었다.

50일간 키웠음에도, 아기가 보내는 신호를 구분하기란 여전히 어려웠다.

배고픈 ‘응애’인지, 더 이상 먹기 싫은 ‘응애’인지 아기 본인을 제외하고는 아무도 몰랐다.

그래서 직수도 하고, 분유도 먹이고, 울기만 하면 겁이 나서 계속 먹였다.

포동포동 살이 오른 아기를 보며 남편이 말했다.

“원래 애들은 미쉐린 타이어 같은 거 아냐?”


그 말에 웃긴 했지만, 내심 ‘이건 뭔가 아닌데…’ 하는 생각이 들었다.

넉넉한 뱃살과 두겹의 턱이 마치 포대화상-미륵 보살의 화신으로 여겨지는 중국 불교의 승려-

같았기 때문이다.


그러다 알게 되었다. 우리 지역에 모유수유 심층 상담을 하는 소아과가 있다는 걸.
나는 본격적인 직수 완모의 길을 걷기 위해 망설임 없이 그곳에 전화를 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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