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 틈에 끼인 추억에ᆢ
우리 가족은 어릴 때 아빠 회사 분들과 종종 교외 나들이를 다녔다. 그런데 생각해 보면 아빠가 우리 가족만 데리고 계획해서 휴가지를 갔던 기억은 없다. 다만 아빠 회사에서 버스를 대절해 관광지에 도착한 후 랜드마크 앞에서 가족사진을 찍었던 것이 우리 가족의 유일한 ‘휴가’의 기억이다.
국민학교 2학년, 어느 여름의 휴가철이었다.
아침부터 엄마는 튜브며 먹을 거며 바리바리 싸느라 분주했고 나와 동생들은 물놀이를 할 생각에 신이 나서 이불을 펴놓고 가짜 수영 놀이를 하느라 정신없이 놀고 있었다. 그런데 정작 아빠는 안방에서 목침을 베고 누워 뉴스만 보고 계셨다.
“준비 다되면 나 깨워~~~”
“어휴~어떻게 손 하나 까딱을 안 할까 저 냥반은~으이그~~”
엄마는 늘 있는 일이라 이골이 날 법도 하지만 오늘 만큼은 기분이 좋으셨는지 그냥 웃어넘기셨다.
그날의 목적지는 경기도 양주에 위치한 송추계곡이었다.
“킥킥 송충이가 많아서 송추계곡이래~~~”
나와 동생들은 의미 없는 말장난을 연이어 주고받으며 웃어댔다. 차가 없던 시절 봉천동 집에서 송추계곡을 가려면 지하철에 다시 경의선 기차를 타고 버스를 타야 하는 매우 복잡한 코스였다. 하지만 이 날도 어김없이 아빠 회사에서는 관광버스를 대절하였기에 우리 가족은 다행히 2호선만 타고 강남역까지 이동하면 되었다.
우리는 시간이 빠듯하게 버스가 서 있는 곳에 도착하였는데, 버스에 오르니 어느새 많은 분들이 자리에 앉아 수다를 떨며 가져온 간식들을 드시고 계셨다.
“어머나~~ 네가 정민이가~~”
“아이고 쌍둥이들 많이 커 불었네~~~”
어른들에게 인사를 하고 우리는 자리를 잡고 앉았다.
난 예나 지금이나 버스를 타고 차창 밖을 보는 걸 너무 좋아했는데 버스는 서울 한복판을 지나 한강 다리도 건너고 강의 북쪽으로 쭉 달려 드디어 송추계곡에 도착하였다. 이미 계곡에는 물속 가득 사람들이 들어차 있었고 자리 잡기는 여간 어렵겠다 싶어 보였다. 그러나 어른들은 뚝딱 돗자리를 넓게 펼쳐 자리를 잡았고 어린이들은 너나 할 것 없이 물속으로 첨벙 뛰어들었다. 그런데 나는 이상하게 어릴 때부터 낯선 사람들이 있으면 잘 놀지를 못하였는데 동생들은 이미 다른 가족의 언니 오빠가 챙겨주니 바로 물놀이를 하기 시작했다. 혼자 오도카니 앉아있으니 엄마가 보기에 좀 그러셨는지
“너는 왜 이런데 오면 잘 놀지를 못하니? 동생들은 저렇게 신나서 노는구먼”
“.... 그냥 여기 앉아 있을래.. 옷 젖는 거 싫어..”
그렇게 나는 계곡 여기저기를 걸어 다니며 풀도 뜯고 돌멩이도 주워와 쌓으며 나만의 놀이를 하기 시작하였다.
“점심 먹어라 얘들아~~~~”
엄마는 우리를 불러 모았고 거기 왔던 회사가족들은 모두가 어우러져 밥과 반찬을 꺼내어 대형 뷔페를 방불케 할 정도의 거대한 돗자리 만찬을 깔아놓기 시작하였다. 집에서는 조용하기만 하던 아빠는 앞에 나와 사회를 보셨는데 말을 제법 잘하셔서 솔직히 깜짝 놀라기도 하였다. 회사 사람들에게 한마디정도 하시고 직책이 아빠보다 높은 분에게 마이크를 넘겨 또 한마디를 하시는데 '어른들은 왜들 저렇게 말하는 걸 좋아하는 걸까'라는 생각이 들기도 하였다.
엄마가 준비한 음식은 매콤한 제육볶음이었고 집에서 지어 온 밥이 조금 떡처럼 뭉쳐지긴 했지만 자연의 바람을 맞으며 허기를 달래기엔 그 맛이 으뜸이었다.
그렇게 오후의 놀이시간에는 나도 합류하여 신나게 놀다 보니 어느새 노을이 지려는지 하늘이 버얼게 지고 있었다. 모두 가져온 짐을 다시 한 보따리씩 짊어지고 타고 온 버스에 올라탔다. 반나절이어도 이렇게 놀고 나면 서로 매우 친해져서 아이들은
“조금만 더 놀다 가면 안 되나요~~~~”
“나 얘네 집에 가서 자면 안 돼?”
라고 엄마를 보채며 헤어지길 참으로 아쉬워했다.
버스에서는 모두가 노곤하여 잠이 들었고 강남역에 도착하니 이제 진짜 각자의 집으로 가야 할 시간이 되었다. 몸은 너무 피곤하였고 지하철 2호선은 사람이 가득하였다. 엄마와 아빠는 세 딸을 놓칠세라 양쪽에 끼고 그렇게 서서 봉천역까지 서서 가게 되었다.
그런데 낙성대 다음 역인 서울대입구역에 다다를 때였다. 그때 문득 내 눈에 들어온 건 문에 붙여진 '기대지 마시오’라는 글귀였는데, 손바닥모양에 굵은 선이 그어진 채로 프린팅 되어 붙어 있었다.
‘왜 기대지 말라는 거지?’
나는 슬그머니 그 손 모양에 내 손을 갖다 대었는데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그래서 한 번 더 그 손모양에 내 손을 겹쳐 보였다. 그때,
“다음 역은 서울대 입구역입니다. 내리실 문은 오른쪽입니다”
하는 안내방송과 함께 문은 열렸고 내 왼쪽 팔은 순식간에 문과 함께 팔꿈치 바로 위까지 문틈으로 빨려 들어갔다. 당시 내 팔은 유난히 가늘어서 문 안으로 쑤욱 빨려 들어갔는데, 지금 생각해 보면 그 문틈은 손 하나 들어갈까 말까 한 공간이었다. 그렇게 내 팔은 망설임도 없이 그 안으로 미끄러져 들어갔다.
아이의 팔이 끼었으니 문은 끝까지 열리지 못했고, 차장은 계속해서 문을 열기 위해 자동장치를 연신 눌러 댔나 보다. 나는 너무 놀라 자지러지게 울기 시작했고 엄마와 아빠는 소리 지르며 도움을 요청했다.
“아이 팔이 꼈어요~~~ 살려주세요~~~~”
나는 울면서도 생각했다.
‘이제 내 팔이 없어지는 걸까?’
그 정신없는 와중에 고마운 몇몇 어른들은 전차의 앞으로 달려가 차장에게 위급한 소식을 알렸고 그 제서야 문은 다시 닫힘으로 돌아오면서 나의 팔은 온전하게 빠져나왔다.
“너무 다행이에요~~”
“얘야 괜찮은 거니? 어머나 너무 놀랬어~~~”
고맙게도 승객 몇 분은 우리 가족과 함께 플랫폼에 내려 내 걱정을 해 주셨다.
엄마와 아빠는 그 많은 짐과 동생들을 챙겨 서울대 입구 역에 잠시 내렸고 나는 놀랜 가슴을 진정시키며 벤치에 앉아 불씨가 꺼지듯 울음을 겨우 꺼뜨리고 있었다.
“언니 괜찮아~?? 팔은 안 부러졌어?”
놀란 쌍둥이 동생들은 똑같은 표정과 말투로 팔의 안부를 연거푸 물었다.
“정민아 팔 폈다 접었다 해봐~~~”
점잖던 아빠마저 너무 놀라 내 팔이 제대로 붙어있는 게 맞는지 연신 확인했다. 다행히도 내 팔은 왼쪽팔의 팔꿈치 쪽에 살짝 끼인 자국만 남았을 뿐 요란한 객차 내 소란에 비해 나는 매우 멀쩡했다.
엄마는 내 팔을 쓸어내리며 단호하게 말했다.
“우리 다시는 송추계곡 가지 말자~”
지하철을 타고 이동할 때면 나는 꼭 문 옆에 서는데 ‘기대지 마시오’ 손바닥 모양 프린트를 볼 때마다 문의 틈을 들여다보며 생각하곤 한다.
‘어떻게 저리 좁은 틈으로 내 팔이 들어갔을까...’
그날 이후로 나는 종종 그 좁은 지하철 문 틈을 들여다보는 습관이 생겨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