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할아버지와의 추억
어린 시절 할아버지와 할머니 손에 자란 덕에 나는 할아버지와도 거리감이 없이 친했다.
외할아버지는 젊은 날 일본에서 금속세공기술을 배워와 한국타이어에서도 일하신 경험이 있어 자신에 대한 자부심이 대단했다. 우선 처자식을 굶기지 않았던 것과 논밭을 일구는 데 있어서도 일꾼을 쓸 정도로 광대한 논마지기를 계속 거느릴 수 있었던 점이 할아버지의 당당할 수 있는 자신감의 근원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할아버지는 청력이 매우 약하셔서 가까이 귀에 대고 말하지 않는 이상 잘 듣지 못하셨고 그러다 보니 텔레비전 소리를 크게 키워 듣곤 하셨다. 그리고 어린 내 눈에 충격적이었던 건 할아버지의 이가 없었다는 사실이다. 다시 말해 틀니를 끼고 사셨다. 매일 밤 할아버지는 온종일 입안을 가득 채우고 있던 의치를 꺼내어 깨끗하게 닦은 후 정성스럽게 그릇 안에 넣어두셨다. 나는 틀니를 뺀 할아버지의 입술이 쭈글쭈글해진 걸 보면서 이빨이 사람 몸의 뼈대같은거라고 생각도 하였다. 그러고는 아침에 일어나셔서 그 틀니를 다시 정갈하게 세척 후 두 번의 딸깍 소리와 함께 할아버지의 입안에 ‘안성맞춤’으로 딱 하니 들여놓았다.
오늘은 할아버지와 나와의 추억 중 가장 기억에 남는 에피소드 하나를 꺼내볼까 한다. 내가 5살 정도 되었으려나? 할아버지는 늘 들논에 가신다면서 자전거에 대각선으로 삽자루를 야무지게 끼워 실어 놓은 후 챙이 넓은 모자를 쓰시고 자전거를 타고 휘이휘이 나가시곤 하셨다.
그런데 어느 날인가 할아버지가 내게 함께 들논에 가자고 하셨다.
“정민아~오늘은 너도 갈텨? 할배따라 들논 갈텨?”
“...안가..싫어”
“에이~~할아버지가 오다가 아이스크림 사줄테니께 가자~이?”
두 어 번 할아버지의 권유를 나는 마지못해 그러겠다고 하고 할아버지의 자전거 뒷자리에 올라탔다.
지금 생각하면 위험천만한 자전거 승차이다. 대부분 앞자리에 아기 의자를 설치해서 태우지 않던가? 나는 그저 할아버지 뒤에 그 불편한 쇠로 만들어진 의자에 수건을 댄 다음 엉덩이를 간신히 대고 앉았다. 손잡이라고는 할아버지가 앉은 의자 밑 용수철 모양의 쇠붙이가 전부였다. 나는 그날 흰 블라우스에 흰 땡땡이가 들어간 감색의 치마를 입고 모자도 썼다. 지금 생각하면 시골에서 그렇게 어여쁜 옷을 손녀에게 입혀주신 할머니가 참으로 고마울 뿐이다.
할아버지와 나는 바람을 가르며 신례원보다 한참 멀리 있는 들논에까지 함께 갔다. 그날은 유독 더웠지만 바람은 제법 선선했으며 돌아오는 길에 할아버지가 약속한 대로 아이스크림만 사준다면 나는 더 바랄 게 없었다.
나무 밑에 잠시 앉아 있으라고 한 뒤 할아버지는 그 긴 삽자루를 들고 장화를 신고 첨벙첨벙 논 안으로 들어가셨다. 나무 그늘은 꽤 선선했고 나는 혼자 흙을 파고 돌을 채워 넣으며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그런데 할아버지가 갑자기 내 눈에서 사라진 게 아닌가?
“할아버지~~~~ 할아버지~~~~~”
아무리 불러도 할아버지는 보이지 않았다. 나는 무섭기도 하고 서럽기도 하여 엉엉 울기 시작했다. 그런데 그때 저 멀리서 허리를 굽히고 일을 하시던 할아버지가 장군처럼 벌떡 일어나셨다. 그제야 할아버지는 내 쪽을 향해 손을 흔들었고 나도 안심을 하였다.
그렇게 시간이 한참 지나서야 할아버지는 일을 마무리하고 조용히 장화의 흙먼지를 털어내시며 집으로 돌아갈 채비를 하셨다.
“아가~~ 집 가서 점심 먹자~~~~”
“에이~그럼 아이스크림은??”
“이~~~ 가다가 사야지~?”
나는 아까 오던 고대로 할아버지 뒤에 앉아 집으로 향할 준비를 하였다. 그런데 어쩐 일인지 나는 꾸벅꾸벅 졸음이 오고야 말았다. 할아버지는 어째 아셨는지
“아이고 얘야~~~ 자면 클난다~~ 자지 말고 꼭 붙들고 가야 돼~~”
나는 알면서도 이상하게 고개가 꺼꾸라지면서 자꾸 잠이 왔다. 아뿔싸! 그런데 이게 웬일인가? 내가 자전거에서 떨어져 논두렁으로 나자빠진 것이다. 할아버지도 깜짝 놀라 자전거를 내팽개치고 한달음에 달려오셨다.
“아이고~~~ 이 녀석아~ 아이고~~~~ 자면 안 된다니까 거참~”
그런데 그때 나는 정말 아득한 꿈 속처럼 물속을 구경하였다. 꿈인지 생시인지는 모르겠으나 내 기억의 저장소에는 그렇게 저장되어 있다. 내가 물에 꼬르륵 빠져드는 순간 나는 눈을 떠버렸고 물속에서 작은 개구리도 보면서 아주 잠깐 깊은 물속의 생명체들과 인사를 나눈 것이다.
할아버지는 얼른 물에서 나를 꺼내어 일으켜 세워주시고 자신의 목에 둘렀던 수건으로 온몸을 닦아냈다.
“아이고~~~ 온몸에 흙이 잔뜩 묻었다야~~~~~”
나는 약간의 눈물을 보이긴 했으나 그렇게 많이 울지는 않았다. 방금 전까지 물속에서 보았던 장면들이 진짜인지 상상인지 헷갈렸기 때문이다.
그렇게 할아버지는 나를 다시 얌전하게 정돈시키고는 자전거에 태워 집으로 향하셨다.
“정민아~~~~ 아이스크림은 너 집 가서 옷 좀 갈아입고 나가서 다시 사야겠다. 저기 윗말 회관까지 갈라니께 너무 힘들지?”
“알았어. 할부지~~”
나는 위의 이야기를 언젠가 꼭 글로 쓰고 싶었다. 40년이 넘도록 내 기억 속에서 사라진 적이 없는 할아버지와의 소중한 추억이기 때문이다. 할아버지는 내가 서울로 올라간 뒤로도 종종 우리 집을 오셨는데 항상 말끔한 한복 두루마기에 지팡이를 짚고 중절모를 쓴 멋쟁이 할아버지의 모습이었다. 그때마다 우리 세 자매 먹으라고 슈퍼에서 단 한 상자의 크라운 산도 딸기맛을 사 오시곤 하였다. 하지만 우리 중 어느 누구도 그 산도를 좋아하지는 않았다. 다만 할아버지는 자신이 사 올 수 있는 그럴싸하고 값이 나가 보이는 ‘산도’를 고집스럽게 꼬박꼬박 사 오시고는 늘 말씀하셨다.
“옜다~~ 산도 먹어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