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만의 하얀 피겨 스케이트
철산동에 이사 온 후 첫겨울방학이었다.
그 해 겨울은 유독 추워서 거의 매일 영하의 기온을 웃도는 날씨였다. 날이 너무 추우니 놀이터도 나갈 수 없고 방학이라 외갓집을 다녀온대도 여전히 겨울방학은 참 길기도 하였다.
당시 우리가 사는 12단지 건너편 13단지 상가 앞 큰 공터에 물을 가득 채워 넣은 실외 스케이트장이 아이들에게는 엄청 큰 인기를 끌었다. 지금 생각해 보면 아무런 제빙시설 없이 오로지 바깥기온으로만 의존해 스케이트장이 만들어진 게 참 신기할 뿐이다.
아무튼 그 스케이트장이 생기면서 12, 13단지 사는 아이들은 너나 할 것 없이 스케이트장으로 향했다. 나는 그때까지만 해도 숫기 없는 아이였는데 건너 단지로 이사 온 민아 아주머니가 어느 날 우리 집으로 전화를 하셨다.
“정민아~ 민아는 스케이트 배워서 타는데 너도 같이 탈래?~”
민아 아주머니는 특유의 친절한 목소리로 내게 스케이트를 권하셨다.
“저는 스케이트가 없어요~”
“아~여기서 스케이트 빌려주니까 걱정마!”
나는 다음날 민아가 스케이트 타는 걸 구경할 겸 스케이트장으로 구경을 나갔다. 그 작은 스케이트장에는 온통 동네 아이들로 가득하였다. 게다가 안전장비나 안전요원도 없었기 때문에 혹여 스케이트날에 베이는 사고라도 날까 걱정이 되기도 하였다. 그때 내 눈에 띈 건 다름 아닌 민아의 스케이트 색깔이었다. 다른 아이들은 어두운 블루계열의 스케이트인데 민아 것만 독보적으로 하얗고 빛이 났다.
“아줌마~민아스케이트는 왜 색깔이 달라요?”
“아~~ 민아는 아줌마가 하나 사줬어~좋겠지?”
민아아주머니는 그전에도 엄마에게 종종 여러 가지로 자랑을 하셨는데 어린 나에게까지 그런 모습을 보이다니 무척 어른답지 못하다는 생각을 하였다.
‘와.. 올겨울 한번 탈 건데 스케이트를 샀다고?.. '
나는 갑자기 질투심이 확 달아올라왔다. 민아와는 국민학교 1학년때 같은 반이 된 뒤로 엄마들끼리 친하게 지내셔서 꾸준히 연락이 되는 친구였다. 하지만 어쩐 일인지 민아는 내게 그렇게 맘이 편한 친구는 아니었다. 언젠가부터 민아는 인기가 많아지면서 줄곧 반장에 뽑히고 키도 나보다 훨씬 컸던 데다가 항상 친구들도 많았다. 그래서였을까? 나는 민아에게 적잖이 시샘이 나기도 하였다. 그런데다 우리는 공부도 비슷하게 해서 시험을 본 날이면 꼭 틀린 개수를 우리의 동의도 없이 엄마들끼리는 공유하곤 했다.
그러던 민아가 우리 동네로 이사를 온 것이다. 그것도 우리 집보다 훨씬 넓은 30평이 넘는 평형대로 말이다. 민아네가 이사 와서 우리 가족이 다 같이 집들이를 다녀온 날 나는 태어나서 처음으로 배가 아픈 게 어떤 뜻인지 알게 되었다. 정말 먹은 게 없는데 배가 너무 아팠다.
그리고 민아 어머니는 우리 엄마에게는 없는 탁월한 인테리어 센스가 있었다. 소파도 당시 유행하던 등나무로 된 소파였고 식탁도 테이블보를 씌운 멋스러운 4인용 식탁이었다. 게다가 민아와 동생이 함께 쓰는 방에는 2층 침대가 있었다. 세상에 2층침대라니..
그리고 레이스가 달린 거실의 커튼도 매우 화려해서 민아의 집이 마치 궁궐처럼 보이기까지 했다. 이렇게 여러가지로 나보다 앞서있던 민아는 그저 불편한 엄마 친구 딸(엄친딸)이었다. 불행 중 다행이었던 건 민아와 난 같은 국민학교를 다니지는 않았다는 사실이다.
그런데 그런 민아가 지금 반짝이는 새하얀 색 피겨스케이트를 타고 누구보다 우아하게 스케이트장을 누비고 있는 것이다. 나는 다른 건 몰라도 피겨 스케이트만큼은 민아에게 질 수 없었다.
“엄마~나도 민아랑 똑같은 스케이트 사줘!”
“무슨~그냥 대여해 주는 걸로 타!! 내년이면 발이 커져서 또 사야 해~”
나는 그날따라 잘 안 쓰는 떼를 썼다.
“스케이트 안 사주면 나도 스케이트 안 배울 거야!”
“어머~얘가 왜 안 하던 짓을 하고 난리야?”
그때 나는 엄마 앞에서 눈물을 보였다.
“나도 민아처럼 내 스케이트가 있어야 더 잘 탈 수 있을 거 같아서 그래!!”
“.... 참.. 내”
엄마는 말을 더 이상 잇지 못했다.
그런데 며칠 후 엄마가 내게 미리 말도 없이 스케이트를 사가지고 오셨다.
“니 발사이즈가 이게 맞는지 모르겠다. 한번 신어봐!”
“와~~~ 엄마 감사합니다~~~~!!”
스케이트 모양의 가방 안에는 반짝거리는 하얀색 피겨 스케이트가 얌전히 앉아 내 손길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리고 스케이트 날에는 두꺼운 가죽커버가 씌워져 있었는데 그 안의 은색 날이 얼마나 윤이 나던지 내 얼굴이 다 보일 지경이었다.
“대신에 너도 민아처럼 열심히 배워서 스케이트 잘 타봐!!”
“알았어! 꼭 그럴게!!”
나는 그 길로 바로 달려 나가 스케이트장으로 향했다. 첫날이라 스케이트장 선생님께서는 차분하게 스케이트를 신는 방법부터 알려주시고는 천천히 스케이트를 신고 트랙을 한 바퀴 걸어보라고 하셨다. 정말이지 등에 식은땀이 날 정도로 나는 발목에 힘을 꽉 주고 한 바퀴 두 바퀴 천천히 걸었다. 그렇게 다리에 힘을 주고 그다음에는 왼발 오른발을 얼음 위에서 쭉쭉 지쳐보았다. 그렇게 몇 시간이 흘렀을까? 내가 느린 속도이지만 빙상장에서 스케이트를 타고 있는 게 아닌가? 스케이트를 타며 겨울바람을 가르는 일이란 건 정말 멋진 일이라고 생각되었다.
당시 스케이트장은 오후 5시 반이면 폐장준비를 하였다. 나는 폐장직전까지 스케이팅을 연마하여 결국에는 혼자 타는 법을 알게 되었고 다음날도 그다음 날도 꾸준히 스케이트 연습에 매진하였다.
얼마나 열심히 탔던지 집으로 돌아와서 발목을 보니 뻘겋게 부어 올라있었다. 하지만 스케이트를 쉴 수는 없었다.
다음날부터는 양말을 두 개씩 껴서 신고 다시 스케이트 연습에 들어갔다.
그러던 어느 날 민아와 같은 시간 대에 스케이트장에서 만나게 되었다. 우리는 서로 말은 안 했지만 경쟁상대가 분명했다. 나는 마치 국가대표 쇼트트랙 선수가 된 것처럼 몹시 긴장해서 민아를 의식하며 얼음을 지치기 시작했다. 속도를 계속 올려가다 보니 숨도 점점 차오르고 종아리에도 힘이 바짝 들어가는 게 느껴졌다. 처음에는 민아의 속도가 빨랐지만 작고 가벼운 나의 몸은 점점 민아의 속도를 따라붙기 시작했으며 마침내 내가 쉬지 않고 트랙을 도는 데 있어서는 즉 지구력만큼은 민아를 이길 수 있었다. 그렇게 한참동안 스케이트를 타고 있었는데 민아는 스케이트를 타다 말고 갑자기 자기 엄마한테 가더니
“나 오늘은 그만 탈래!!”
하고는 스케이트를 휙 벗어던지고는 스케이트장을 나가버렸다.
'이번 경기는 내가 이겼군 ^^'
나는 속으로 피식하고 웃음이 났는데 저 멀리서 엄마도 흐뭇하게 나를 바라보고 웃고 있었다. 엄마는 비싼 스케이트를 사주길 잘 했다고 생각하며 뿌듯해하는 표정으로 날 바라보고 있었다. 그날도 나는 폐장시간까지 쉬지 않고 빙질을 느끼며 달렸다.
그날 내가 얼마나 스케이트를 신나게 탔는지 운동화로 갈아 신었는데도 여전히 스케이트를 탄 것처럼 걷는 듯 한 느낌이 들 정도였다.
나는 그 새하얀 스케이트를 4학년 겨울 방학 내내 지칠 줄 모르고 탔다. 그때의 노력 덕분에 지금도 스케이트를 탈 줄은 안다. 운동을 못하는 나였지만 승부욕이 한번 발동하면 이길 때까지 하고야 마는 승부근성이 있다는 걸 알게 해 준 스포츠가 바로 스케이트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