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러나 아직은 부끄러운
이제는 내가 좀 자랐다는 걸 느낄 때마다 어른이었지만 어른스럽지 못했던 한 사람을 떠올린다. 이 지경을 겪었으니 '그도 어른이 되었을까?' 생각이 거기까지 미치고 나면 분노와 후회가 정신없이 밀려와 뱃속을 꽉 채운다. '아 개자식 철천지 원수 같은 놈' 나쁜 마음은 담지 않겠다고 다짐하지만 간사한 나는 내 잘 못을 덮기 위한 위안으로 또 저지른다. 늘 같은 프로세스를 탄다. 어려서 나 자신을 너무 몰라 줏대가 없었다고 위안을 삼았던 시기도 있었다. 그렇게 스스로를 피해자로 생각하면 마음은 좀 나았다. 오랜 고뇌의 시간을 거친 후 여유가 생겨서 고백하건대, 내 잘못된 선택의 기준에 순서가 바뀌었다. 사실 나는 허세와 허영심을 충족시켜줄 선택을 했었다. 나 스스로에게 자신이 없었기 때문이다. 나는 타인에게 보여주고 싶어 했고 인정받는 삶을 쫒았다. 애완동물처럼 타인의 긍정적인 시선 안에서 행복과 안정을 찾았다. 그게 잘 살아온 나를 내 부모님을 나타내 준다고 믿었었다. 사리 분간을 할 수 있는 정도의 시야를 갖게 되니 삶의 본질은 그런 것에 있지 않았다. 아반떼 엔진을 단 벤츠를 탄 삶이었다. 모두가 인정하고 부러워했지만 정작 나는 모래주머니를 찬 것 같았다 앞으로 나아가기가 버거웠다. 요즘은 매일 내가 원하는 진실한 삶을 그린다. '좀 따듯해 보이려면' 겉치레하는 습관을 못 버리고 어느 순간 의미 없는 나비를 그려 넣었다 다시 지운다.
살면서 깨끗하고 올바른 기준을 가진 사람을 만날 때가 있다. 허상을 쫒지 않고 삶의 본질을 아는 사람은 맑은 눈동자와 또렷한 정신을 갖고 있다. 그런 맑은 기운을 느끼면 나는 인정한다 그리고 곧 존경한다. '어른이구나'. 그런 여유와 당당함을 가진 사람들과 같이 살아가고 싶다. 여유와 당당함을 장착한 이후에는 삶의 진정한 즐거움들을 느낄 수 있다. 오롯이 나와 내가 있는 순간에 집중한 즐거움을. 어떤 강한 바람에도 원칙에서 벗어나지 않을 수 있는 확고한 자신함을. 그런 사람들이 내 삶의 그림에 꼭 필요한 오브젝트이다. 좋아요를 많이 받는 것보다 진심 어린 한두개의 댓글이 나를 더 행복하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