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래전 이야기와 오래된 차 이야기
하동 ‘에피소드 티’ 다도 체험이 끝난 후 너울과 나는 옆 건물의 차판매장으로 내려갔다. 소소한 기념품을 사는 건 빼놓을 수 없는 여행의 재미이기에. 하지만 마침 차판매장은 점심 휴식시간이었고, 우리는 20분 남짓한 시간을 보내기 위해 그 바로 옆의 야생차 박물관으로 향했다.
야생차 박물관에 들어서니 우편에는 체험영상실이, 좌편에는 하동 차를 소개하고 다구와 차의 역사를 소개하는 상설전시관이 있었다. 2층 특별전시관에서도 도예가 주윤경 작가의 전시가 진행 중이었다. 상실전시장에는 차를 만드는 각종 제다 도구와 다기들이 전시되어 있고, 왼쪽 작은 방으로 들어서면 하동 차의 역사와 지금의 명인들에 대한 설명이 있었다.
하지만 몇백 년이 넘은 유물들 사이에서 내 눈에 들어온 건 한쪽 벽 면에 크게 그려진 하동의 지도였다. 야생차 박물관은 하동의 가장 북쪽 읍인 화개면에 위치해 있었고, 차 재배지도 모두 화개면이어서 관광지는 보통 하동의 위쪽 지역인 하동읍, 악양면과 화개면에 집중되어 있다. 내 눈에 들어온 건 관광지도에도 별다른 명소가 없는 고전면과 양보면이었다.
나의 할아버지는 고전면 출신, 할머니는 양보면 출신이시다. 고전면은 하동읍 밑에, 양보면은 고전면 옆에 위치해 있다. 할아버지는 젊은 시절 고전면의 면장을 하셨다고 한다. 어렸을 때 나는 할아버지가 결혼 전 할머니를 만나기 위해 걸어서 언덕을 넘어 양보로 갔었다는 이야기나, 할머니가 결혼 후 친정을 가기 위해 아빠 손을 잡고 한참 언덕을 넘어가야 했다는 이야기를 들은 기억이 어렴풋이 있다. 그 얘기를 들었을 때는 할머니 할아버지가 산골짜기 어딘가 서로 많이 떨어져 있는 마을에 사셨나 보다, 하고 생각했다. 하지만 지도로 보니 고전면과 양보면은 하동 안에서도 참 가까이에 사이좋게 붙어 있었다.
왜 나는 단 한 번도 고전과 양보가 어디 위치한 지명인지 찾아볼 생각을 하지 못했을까, 그리고 기억하지 못하는 나의 일부가 나의 관심을 한 번도 받아보지 못한 그곳에서 시작된 것일까 하는 생각으로 나는 한참 지도를 바라보았다. 내가 기억하는 것보다 더 예전부터 할아버지 할머니는 진주에 사셨다. 하지만 그분들이 먼 옛날에 하동에서 태어나고, 자라고, 언덕을 넘어 만나서 결혼하고, 자식들을 낳고, 삶의 터전을 일구었다는 사실이 나에게 어떤 친밀감을 주기를 바랐던 것 같다.
사실 하동은 나에게 기타 여행지들과 다르지 않다. 살아본 적도 없고, 아는 사람도 없다. 그럼에도 해외살이를 하며 일 년에 한 번 보는 할아버지와 돌아가신 할머니의 얼굴을 떠올리니 마음 한켠이 뻐근했다. 너울에게 수다스럽게 양보면과 고전면을 소개하면서 나는 하동과 내가 어떤 특별한 관계가 있다고 믿고 싶어 졌다. 이 한적하고 조용한 동네가 내가 표현할 수 없는 어떤 방법으로 나를 위로한다는 듯이.
상설전시관을 돌아본 후 나보다 차에 대해 잘 알고 있는 너울은 박물관 지기에게 몇 가지 질문을 했다.
“하동 녹차와 보성 녹차가 다르다는데 어떻게 다른가요?”
그 질문에 박물관 지기는 바로 대답을 하는 대신 우리에게 물었다.
“잠시 시간이 되시면 설명을 드려도 될까요?”
우리가 고개를 끄덕이자 지기는 지기는 우리를 다시 상설전시관 내 차명인관으로 안내해서 하동 차의 역사를 설명했다.
“현재 역사적인 기록으로는 차가 서기 800년대 신라시대 때 당나라에서 건너왔다고 하지만 사실 하동 차의 기원이 그것보다 오래되었다는 설이 있습니다. 서기 40년대에 가락국의 시조 수로왕의 왕비가 인도 아유타국 출신이라고 알려져 있는데요, 그녀가 가락국에 도착했을 당시 배에 인도에서부터 각종 보물과 물건들을 들고 왔는데 그중 차나무도 들고 왔다는 설이 있습니다.
"따라서 하동에 화개면의 대비마을은 바로 허황옥 왕비가 다녀가서 붙여진 이름이고, 수로왕의 일곱 왕자가 수행했다고 하는 칠불사 등, 구전으로 내려오는 설과 하동 곳곳의 지명에서 그 흔적을 찾아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하동에서 신라시대 때 차 나무를 심은 곳 외에 야생차나무가 발견되는 것을 보면 하동의 차의 역사가 기록된 것보다 오래되었다는 것을 짐작해 볼 수 있습니다. 물론 기록으로는 신라시대 때 기록이 남아있기 때문에 공식적으로는 그렇게 알려져 있지만요.”
그 이후에도 지기의 설명은 계속되었다. 조선 후기의 초의선사와 추사 김정희의 차로 이어진 우정까지 하동 차의 오랜 역사를 알려주고 제다도구와 다기까지 작은 박물관에 비치된 많지 않은 유물들을 하나씩 정성스럽게 설명했다.
알찬 설명을 듣고 나오는데 너울과 나는 결국 지기가 우리의 질문에 직접적인 답을 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우열을 가리거나 차이를 논하기보다 그저 정성스러운 설명을 통해 우리가 하동의 차를 알게 되길 바라는 마음이 아니었을까 하고 짐작해 보게 된다. 하동의 차에 대한 지기의 조용한 애정이 느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