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걸음이 머무는 자리
너울과 나는 하동 야생차 박물관에서 실컷 시간을 보낸 후 늦은 점심을 먹었다. 그리고 재첩국을 든든하게 먹고 노을 지는 것을 보기 위해 서둘러 화엄사로 떠났다. 하동에서 구례까지 그리 멀지 않아서 화엄사에 금방 도착했다.
우리는 일찍 온 김에 연기암에 올라가 보자고 하고 캐스퍼가 잘 버텨주길 바라며 능선을 올랐다. 가다 보니 연기암 가는 길은 아직 한참 남았는데 연기암 가는 길 화살표가 그려진 곳 반대쪽에 아주 깨끗하게 닦은 돌담이 보였다. 화강암과 작은 나무들이 어우러진 돌담이 정갈하였다.
“여기 어딜까? 우리 연기암 말고 여기 가보자!”
차를 세우니 입구에 큰 우물이 있고 ‘금정사’라는 글씨가 보인다. 네이버지도에 검색해 보아도 금정암 말고는 나오지 않는 걸 보니 아마 암사에서 얼마 전에 절이 된 것인가 보다.
계단을 올라 절 안쪽으로 들어가니 경사 때문인지 절의 가장 가운데 탑을 올려다보게 되었다. 절 안의 길과 바닥은 모두 새로 깐듯한 화강암으로 깨끗했고, 돌마다 연꽃이 새겨져 있었다. 내 걸음이 그 연꽃을 흐릴까 조심조심 걸었다. 모든 전각은 동양의 오방색을 사용한 형형색색의 무늬로 가득했다. 연꽃을 새긴 나무에 칠해진 다채로운 색깔은 화려해서 눈이 부실 정도였다. 가장 가운데 있는 전각에 들어가 보고 싶어 기웃거리니 옆 암사에서 창 너머로 보이는 스님이 들어가 보라고 손짓했다.
뻑뻑한 문을 열고 들어가니 바닥에 온돌의 따뜻한 기운이 감돈다. 그 안에서 우리는 조용히 앉아 불상을 올려다보고 천장 테두리로 그려진 그림들을 구경했다. 절을 많이 다녀보지 않았지만 이렇게 작으면서도 정갈하고 화려한 곳은 처음이었다. 들어올 때부터 대문 너머로 보이는 전각에 압도당했고, 시선보다 훨씬 높이 있는 불상이 나를 내려다보는 것 같았다.
다 나가서 뜰을 걸어보니 지리산이 굽이굽이 펼쳐진다. 웅장하지만 위협적이지 않고 산세가 겹쳐지며 보이는 풍경이 장관이다.
“전경 참 좋네.”
우리는 웃으며 그 풍경을 한참 바라보았다. 그 먼 옛날에 화엄사를 주변으로 화엄사가 내려다 보이는 암사들이 더 많았을지도 모른다. 금정사 맞은 편의 언덕에서 금정사를 바라보면 어떻게 보일까. 차를 타고 올라온 나로서는 이 산속 언덕 중턱에 누군가 마음을 수련하기 위해 자리를 잡았었다는 게 마치 피라미드는 어떻게 지었는가 만큼이나 신기한 일이었다.
겨울이지만 소나무의 푸르름이 남아있는 지리산. 날씨도 푸근한 데다 안개구름이 내려앉아 있어 더 계절감이 느껴지지 않았다. 산의 나무도 자라고 사라지면서 계속 변화했을 것인데 마치 그 산이 화엄사가 지어지기 더 이전부터 지금 모습 그대로 있었을 것만 같은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그 굽이치는 산세를 보고 있자니 며칠 정도는 도시에서 벗어나 이곳에 머물러도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제 내려갈까?”
해가 지기 전에 서둘러 도착한 화엄사는 천년의 역사답게 넓고 사람들이 많았다. 교과서에서만 보던 보물들이 울타리도 없이 옛날부터 있던 자리 그대로 세월을 다 맞고 있었다. 국보로 지정된 돌탑과 석등에 남은 검은 흔적들을 보며 보존하려는 시도는 없었는지 궁금하기도 했다.
화엄사의 바닥은 흙이 오가는 걸음들로 단단히 다져져 있었다. 바닥이 화강암으로 이루어진 곳은 절의 일부뿐이었다. 절 안의 경사도 완만해서 천천히 밑에서부터 산책 삼아 올라갈 수 있었다. 입구에는 귀여운 동자승 모양의 불상이 있어 미소를 짓게 되었고, 편안함이 느껴졌다.
화엄사의 대부분의 전각은 나무로 만들어져 있어 세월의 흔적이 많이 보였다. 금정사와 같이 세련되고 화려함은 없었지만 천년 간 사람들이 다녀간 흔적이 고스란히 남아 있었다. 지리산의 풍경과 어우러지는 예스러운 건물을 걸으니 과거로 여행을 온 듯한 기분이다.
무엇이 그 세월 동안 사람들의 발걸음을 이곳까지 이끌었을까. 그 때나 지금이나 사람들은 같은 소원을 가졌는지, 무엇을 위한 발걸음이었을지 생각해 보게 된다. 오늘 여기 온 내 발자국은 아마 내 다음 사람이 밟으면 사라질 만큼한 존재하고 흔적없이 사라질 것이다. 사람이 지은 건물이 사람보다 오래 존재하는 걸 보자니 유한한 우리의 삶에 가장 필요한 건 위로인 것 같다. 저마다 그 위로를 어딘가에서 찾고 싶어서 부지런히 오가는지도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