쉼과 맛
안채로 돌아오니 불을 땐 방이 따끈했다. 코끝이 살짝 시린데 미리 펼쳐두었던 이불 속에 들어가니 몸이 녹아내렸다. 너울이 왜 겨울에 이 숙소를 다시 오고 싶어 했는지 이해되었다. 평소 집에서는 등이 더운 걸 선호하지 않는 나도 그 따뜻함이 좋아서 계속 누워있고 싶었다.
우리는 몸을 데우고 누워 2025년도 결산을 시작했다.
“올해 가장 뿌듯한 일은 뭐야? 가장 힘들었던 일은? 작년과 어떤 점이 제일 달랐어?”
너울은 보통 연초의 새로운 시작과 설렘을 좋아하지, 연말은 빨리 끝났으면 한다고 했다. 하지만 올해는 무언가 연말이 기대된다고, 마무리를 할 수 있다는 것이 설렌다고 했다. 나는 보통 연초에는 무언가 잘 시작해야 한다는 부담감을 갖기 때문에 연말에 한 해가 마무리된다는 설렘이 더 좋았다. 우리는 또 우리의 성향이 이렇게 다르구나, 싶어 웃었다.
올해 나는 2년 넘은 경력 단절 후 다시 일을 하게 되었다. 이전에 내가 하던 일과는 다르고 매일 출근하는 것도 아니지만 일이 있다는 즐거움이 컸다.
경력 단절한 2년 동안 두 번의 연말이 있었는데 첫 연말은 내가 무엇이 괴로운지도 모를 만큼 마음이 바닥을 쳤다. 책을 읽어도 내가 이걸 왜 읽지, 책을 읽어서 뭐 하나,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손에 잡히는 것이 아무것도 없었다. 두 번째 연말은 너울이 소개해준 상담소에서 3달 정도 상담을 받은 후였다. 1년간 무엇이 나를 괴롭혔는가에 대해 알게 되긴 했지만 마음의 조각들을 붙들 힘이 없는 상태였고, 나를 끌어내리는 감정들을 견뎌내는 것이 힘이 들었다.
그래서 일을 시작하면 내 괴로움의 많은 부분이 해결되지 않을까 하는 기대감이 있었다. 하지만 일을 시작한다고 괴로움이 사라지는 건 아니었다. 대신 감정이 저하되는 것이 단순히 내가 일을 없어서가 아니라는 걸 깨달았다. 우선은 해외살이에 적응하고, 생활 반경이 달라지고, 전혀 새로운 사회에 들어가기 위해 애썼던 그 과정이 쉽지 않은 과정이었다는 걸 받아들여야 했다. 그리고 다른 한편으로는 감정의 흐름과 낮아짐이 나의 상태와 무관하게 찾아올 수 있음을 인지하고, 감정과 내 상태를 분리해서 보려는 노력이 필요하다는 걸 알아가는 시기였다.
연말이라는 시간이 덕분에 1년을 돌아보고 어떤 변화가 있었는지 되짚어볼 수 있었다. 혼자서 일기 쓰며 정리했을 수도 있지만 내 입으로 대화를 꺼냈을 때에 구체화되는 생각들이 있다. 그리고 내가 어떤 이야기를 하는지 잘 알아듣는 너울 덕분에 정리된 생각도 있다. 너울이 생각하는 1년 간 자신의 변화와 내가 느꼈던 변화를 주고 받을 수 있어서 가능하기도 했다. 일상에는 가끔 이런 쉼표가 필요하다고 느낀다.
그렇게 우리는 넷플릭스의 새로운 시리즈 ‘불량연애’를 보다가 불을 끄고, 잠을 청하려다 다시 얘기를 나누기를 반복하며 한참을 더 수다를 떨다가 잠에 들었다.
다음날 아침, 사장님은 따끈한 떡과 귤과 함께 차를 내려주었다. 떡을 속이 든든할 만큼 먹었는데도 차를 마시니 입맛이 돋아서인지 배가 더 고파졌다. 전날부터 하동에서 차를 마시니 뭔가 속이 비워지며 더 입맛이 돌았고, 하동의 음식들도 다 정갈한 한식이라 입에 잘 맞았다.
우리는 사장님의 남미 여행 이야기를 재미있게 들으며 차를 마셨다. 숙소 곳곳의 어딘가 익숙한 듯 낯선 문양의 천들이 남미 여행에서 사 오신 기념품들이었다. 밤이 긴 게 좋다고, 밤에 보고 싶었던 영화도 보고 실컷 놀 수 있어 하지가 오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사장님이, 해발 4,500미터가 넘는 고지를 올라가며 남미를 종횡하는 모습을 그려보니 한 인간 안에 우주가 있다는 말이 떠올랐다. 그는 그의 삶의 일부를 들려준 것뿐인데 그 작은 일부가 다채롭고 풍성했다. 모든 사람들에게 그런 이야기가 있지 않을까, 우리의 삶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많은 빛깔을 가지지 않았을까 하고 생각하게 되었다.
하루 머물다 가는데도 정겨운 숙소를 떠나는 게 아쉬워 우리는 이리저리 사진을 찍으며 짐을 쌌다. 그리고 나는 숙소를 나서자마자 배가 고프다고 밥을 먹으러 가자고 했다.
“배가 고파? 나는 아침 든든히 먹어서 다른 일정들을 앞당길까 했는데.”
너울이 웃으며 근처에 꼭 가봐야 할 식당이 있다고 무량원으로 데리고 갔다. 뜨끈한 청국장에 밥을 비벼먹으니 어찌나 맛있던지. 식당의 반찬은 하나하나 다 맛있었다. 간도 맞고 식감과 본연의 맛이 살아있어서 간결한데 간단하지 않았다. 이 미묘한 한식의 진미를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한 끼를 먹으면서도 감탄하면서 먹고, 그 먹는 즐거움이 여행의 묘미 중 하나였다. 음식의 맛이 좋았던 것인지, 차가 속을 가볍게 해 주어 음식의 풍미를 더 살려준 것인지는 알 수 없지만, 어느 쪽이든 입이 즐거운 여행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