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리산 기슭의 밤

캄캄한 겨울밤의 온기

by 도리

겨울산의 해는 빨리 졌다. 동지 이틀 전이어서 그런지 5시가 채 되지 않았는데도 하늘이 오렌지빛으로 물들며 해가 뉘엿뉘엿 지고 있었다. 우리는 길이 어두워지기 전에 출발하여 하동 야생차 박물관의 차 판매장 직원이 추천해 준 구례의 토지 다슬기 식당에서 다슬기 수제비를 먹었다. 초록색 맑은 국물은 청양고추의 깔끔한 매콤한 맛이 살짝 나면서 시원했고, 다슬기는 씹으면 쌉싸름하면서 고소하고 끝에 단맛이 났다.


“충북도 내륙이어서 우리도 다슬기를 많이 먹었어. 우리는 다슬기를 올갱이라고 불렀어. 어렸을 적 할머니 댁에 살았을 때 올갱이 된장국을 자주 먹었어. 어렸을 때 먹었던 맛이 생각난다.”

어렸을 때 충청북도에 있는 할머니 댁에서 자란 너울이 다슬기 수제비를 먹으며 반가워했다. 너울과 내가 처음 만난 도시는 학교에서 조금만 차를 타고 나오면 새파란 동해바다가 펼쳐지는 포항이었고, 학교를 졸업한 후에는 둘 다 서울에 지냈다. 너울이 충북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다는 건 이미 들어서 알고 있었지만 가로등도 한적한 구례에 와서 함께 다슬기탕을 먹으며 그 얘길 나누니 왜인지 시골 마을을 당차게 돌아다니는 너울의 어린 시절이 그려졌다.


이렇게 이미 알고 있는 사실도 어디서 언제 얘기를 하느냐에 따라 다른 의미로 다가온다. 그래서 오랜 친구를 만나면 새로운 이야기를 하지 않아도 새롭게 알게 되는 것들이 있다.


수제비와 함께 공기에 조금 담긴 밥을 국물에 말아먹으니 속이 든든해졌다. 우리는 19번 국도를 타고 하동으로 다시 돌아와 너울이 예약한 에어비엔비 숙소에 도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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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슬기 수제비

“어서 와요 어서 와. 들어오세요.”

어둑어둑한 숙소에 들어서며 ‘사장님’ 하고 부르자, 조금 떨어진 곳에서 조용한 밤하늘에 싱그럽게 퍼지는 쾌활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사장님은 마치 오랜 친구가 놀러 온 것처럼 반갑게 우리를 맞아주셨고, ‘왔으니까 놀아야지’, 하고 우릴 부르셨다.


우리는 하룻밤을 보낼 안채에서 짐을 풀고 사장님 공간의 다실로 갔다. 다실은 화분이 많아서 그런지 건조하지 않았다.


“이거 내가 마시던 차인데 이번까지 먹고 새로 우려 줄게요.”

사장님은 차를 우려 주며 말했다. 시간이 이미 저녁 9시여서 내가 카페인에 약하다 하자 차를 물에 타주었다. 너울과 나와 사장님의 자리에는 각기 다른 모양의 찻잔이 놓여져 있었다. 사장님은 투박하게 생겼지만 사장님의 손에 착 붙는 다관으로 시원스럽게 차를 따라주었다. 보이차와 사장님의 차를 섞은 차에서는 구수한 맛이 났다.


그 밤에 나눈 대화가 다 기억나지는 않지만 사장님은 하동 좋죠, 오늘은 뭐 했어요, 하동 왔으면 이걸 해보세요, 저길 가보세요, 등 여행지에서 할만한 질문은 하지 않았다. 일전에 하동에 왔을 때 같은 숙소에 머물렀던 너울은 사장님께 안부를 물었고, 우리는 자신의 앞에 놓인 찻잔 물끄러미 바라보다 마시며 자연스럽게 대화했다. 문득 사장님은 밤이 긴 겨울이 좋다고 하였다.


“난 밤이 긴 겨울이 좋아요. 씻고 나서 보고 싶었던 드라마나 영화를 봐도 아직 9시야. 아직도 보낼 시간이 많아서 밤이 긴 게 좋아.”

밤이 좋다는 사장님의 말에 적막한 밤이 푸근하게 느껴졌다. 도시는 늘 불빛이 가득해서 해가 졌다고 밤을 느낀 적이 있었나, 하고 생각해 보게 되었다. 도시에서는 시간에 따라 일상을 산다. 지하철도 시간표대로 오고, 식당들도 시간에 따라 열고 닫는다. 시골도 마찬가지일 테지만 일출과 일몰에 영향을 받지 않는 도시의 삶과 다르게 느껴졌다.


시계가 가르쳐주는 시간이 아닌, 해가 뜨고 지는 자연의 시간에 따라 보내는 일상. 해가 떠 있는 동안은 해야 할 일들을 하고, 해가 지면 일을 멈추는 하루. 밖이 추운 만큼 집안의 따뜻함이 좋은 겨울. 해가 빨리 지는 대신 일을 멈추고 쉼의 시간을 누리고 혼자의 시간을 즐길 수 있는 겨울밤.


그러고 보니 내가 처음 직장생활을 시작했을 때가 10년 전 이맘때였다. 첫 입사일이 아직도 기억난다. 12월 21일. 그날 환한 형광등 아래에서 어떻게 지나갔는지 모를 긴장된 하루를 보내고 건물 밖을 나왔는데 이미 해는 지고 없었다. 가로등과 건물에서 나오는 인위적인 빛만 환했다. 이제는 햇빛도 자유롭게 볼 수 없구나 하는 생각과 함께 괜스레 마음이 울컥했지만 까만 밤하늘을 보며 별을 찾아볼 새도 없이 퇴근길 바쁜 사람들 틈에서 서둘러 지하철로 내려갔었다.


그때 아무것도 알지 못하는 신입사원에게는 앞으로 할 일들처럼 캄캄하기만 했던 밤하늘이 누군가에게는 어둡기 때문에 좋은 밤이었을 것이다. 지금의 나는 그 어두움이 싫지 않다. 그리고 밤이 긴 겨울이 좋다는 사장님의 말과, 그 말에 문득 떠올랐던 첫 입사일이 하동 여행이 끝나고도 기억의 언저리에 맴돈다.


찻잔을 만지작거리며 작게 일렁이는 찻물 속에서 여러 기억이 떠올랐다가 가라앉고 여러 가지 생각이 담겼다. 산에서 보내는 밤은 촉촉한 산의 공기와 자박거리는 낙엽, 바람을 막아주는 나무들 덕분인지 생각보다 시리지 않다.

IMG_8363.jpeg 온기를 담은 찻잔들


토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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