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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uffyeon Nov 03. 2021

자세히 들여다보는 일

이슬아, 깨끗한 존경

 



 올해 4월, 나는 제주도에서 혼자 여행 중이었다. 뚜벅이 여행자였던 나는 좋아하는 동쪽 부근에 만 있기로 마음을 먹었고 총 세 군데의 게스트하우스를 예약했다. 두 번째 게스트 하우스는 종달 리에 있는 작은 책방이 있는 게스트 하우스였다. 그리고 그곳에서 머문 지 셋째 날이 되던 날, 아주 선명한 유채꽃이 선명하다 못해 멍울져갔다. 4월 16일이 되었다.


매년 이날만 되면 모든 감각을 집중하고 그날의 나를 떠올린다. 그리고 자연스레 얼굴도 제대로 모르는 당신들을 생각한다. 6년 전 나와 동갑인 당신들의 목적지인 이곳에 끝내 남기지 못한 작은 발자국 같은 것을 생각한다. 목에 무언가가 턱 막힌 감각을 느꼈다. 아무것도 변하지 않은 세상이 슬펐고 길가에 피어있는 유채꽃이 너무나 선명한 노란색이라 슬펐다.



난 그날 종달리에 있는 지미 오름에 올랐다. 오름을 오르면서 숨이 차오르는 감각을 느꼈고 평소보다 무리해 후들거리는 다리를 붙잡고 끊임없이 올랐다. 올라가는 도중 수학여행 때 늘 가던 성산이 보이는 광경을 바라보면서, 내가 기억해야 하는 것들을 다시 되새기면서, 정상까지 올라갔다. 숨을 내뱉으면서. 살아있다는 걸 몸속 깊이 느끼면서. 그리고 다음 날 그 감각을 소중히 여기고 나는 그곳을 떠났다. 흩날리는 유채꽃을 바라보며 속삭였다.

 

살아남을 만큼 살아내어 기억할게.


마지막 게스트하우스는 서점과 함께 운영하는 아주 작은 게스트하우스였다. 판매되는 책이 비치되어 있었고 그 책들 사이에서 이슬아 인터뷰집을 발견했다. 머무는 동안 정혜윤 피디의 인터뷰를 읽었고 나는 그 섬을 떠났다.





 여행의 마지막 길에 마주한 정혜윤 피디는 아주 단단한 사람이었다. 그리고 그 단단함이 그때의 나에게 큰 울림을 주었다. 쉽지 않은 길을 걸어가는 이의 발자취를 따라 걷다 보면 연약한 나의 뒷모습이 보이고 그 뒷모습을 제대로 바라보고 싶게 만든다. 하염없이 슬픔에만 잠겨있던 나는 나 자신에게 물었다. ‘그렇게 힘들어?’


나는 슬픔에만 잠겨있는 사람이 되고 싶지 않다는 걸 깨달았다. 진정한 연대의 물음과 그녀의 대답들은 나를 조금씩 다시 태어나게 해주는 것 같았다. 나는 늘 연대에 대해 생각했다. 무엇이 진정한 연대가 될 수 있을까. 어떤 마음과 시선이 그들을 살릴 수 있을까. 어떤 연대는 온갖 고통을 먼저 겪은 이가 자신보다 덜 고통스러워하길 바라며 자신이 겪은 모든 것을 알려주는 일이라 말한다. 그럴지도 모르겠다. 우리는 때로 서로의 유사한 통증의 결을 바라보며 서로를 껴안아 주니까. 나의 고통을 알지도 못하는 사람의 무책임한 위로보다 고통을 겪은 사람의 품이 더 따스하니까. 어떤 곳으로 가야 할지 망설이는 나에게 더 좋은 곳으로 가자며 내미는 그녀의 손을 상상한다. 조금은 거칠지만 분명 따스한 손일 것 같았다. 그리고 난 그 손을 잡고서 끝까지 따라갈 것이다.






 육지에 돌아와 난 다시 책을 펼쳤고 아주 빠르게 읽었다. 그들의 대화 속에서 살구향이 나는 것 같았다. 다 읽고 나니 접어둔 페이지가 너무나 많아 책이 더 두껍고 단단해졌다. 이 접힌 페이지들을 유심히 바라보고 또 바라보면 나는 더 부끄럽지 않은 삶을 살 수 있을까. 그러나 언제나 마주할 때엔 부끄러울 수밖에 없다는 걸 깨달았다. 김원영 작가의 인터뷰를 읽는 동안 벅찬 슬픔을 느꼈는데 그것은 나의 부끄러움과 수치심이었다.


소수자의 삶을 제대로 바라보자고 다짐했던 나의 지난날들이 위선처럼 느껴졌다. 나는 정상성의 관념의 폭력성을 인지하고 있으나 어떻게 그들이 아파했는지 제대로 보지 못했다. 그들의 삶이 흔들릴 때 나의 삶은 전혀 흔들리지 않았다. 나의 편협함을 제대로 인지하고 나아가는 것. 그것이 작은 구원이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점점 지워져 가는 존재에 대해 생각한다. 그들의 신체와 삶이 분명히 그 자리에 존재함에도 불구하고 이 사회는 그들을 제대로 바라보지 않는다. 자세히 바라보는 시선은 늘 사랑 같다는 생각을 한다. 사랑이 무언가를 해결해줄 수 없을 수도 있다. 그러나 나에게 사랑은 그 사람의 왼쪽 어깨를 유심히 바라보고 흔들림을 포착하고 가까운 곳에서 숨결을 맞대는 일이다. 그것이 우리의 불행을 없애줄 수는 없으나 절망이라는 삶 속에서 희미한 사랑은 나아갈 힘이 될 것이라 믿는다.




나에겐 k 라는 친구가 있다. 이 책을 읽으면서 그녀와의 대화가 떠올랐다. 난 자주 k와의 대화 속에서 절망을 놓고 오기를 바랐다. 진정 존경하고 사랑하는 k 는 그런 나를 위해 절망을 숨겨 놓을 자리를 만들어주었다. 세상은 무섭고 두렵지만, 너와의 시간 끝에 남겨진 나는 무엇이라도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이 책에선 그런 온기가 느껴졌다.


글쓰기에서 가장 어려운 것은 ‘나’가 아닌 주어로 시작하는 글이라 생각한다. 시선의 확장과 이동 속에서 끊임없이 갈등하고 끝내 단단해지는 이들의 대화는 내 안의 수많은 나를 잠시 멀리 두고 싶게 만든다. 선과 악의 구분을 넘어서 우리가 가야 할 곳은 유토피아가 아닌 모두 함께 공존하는 디스토피아일 것이다. 그 디스토피아를 향해 우리는 마주 봐야 한다. 우리보다 더 슬픈 이들의 고통을, 인간의 지배 아래 사육당하며 먹히는 얼굴들을, 끊임없이 부정에 놓인 이들을. 결국 사랑의 시선으로 마주하고 또 마주하고 싶다.



2020.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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