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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uffyeon Nov 03. 2021

겨울 바다


일기를 쓰기로 마음을 먹었다. 불안과 우울이 나를 좀먹을 때마다 일기를 썼다. 행복한 순간보다 불행한 순간에 일기를 써왔다. 이제는 행복도 불행도 아닌 별것 아닌 순간들을 남기고 싶다.

올해 초 미친 듯이 책을 읽다 편집자라는 직업이 눈에 들어왔다. 나는 선택하는 것에 늘 조심스럽고 무서워하고 두려워하는 사람이라 막연히 하고 싶다는 마음만 크게 키워갔다. 그러다 민음사 유튜브에서 말줄임표라는 채널을 알게 되었다. 오늘은 화진님과 기현님의 일기를 엿보고 곧 출간할 매일과 영원 에세이 시리즈의 첫 작가 문보영 시인의 일기를 읽을 수 있었는데 그게 너무 좋았다.



 일기는 너무나도 인간적이고 선한 면을 지니고 있다는 것. 누군가의 일기를 읽으면 그 사람을 완전히 미워하는 것이 불가능해진다는 점.



'그렇게 아무거나 쓰다 보면 어느 날 그 글은 소설이 되기도, 시가 되기도 한다. 일기는 무엇이든 될 수 있기에. 일기가 집이라면 소설이나 시는 방이다. 일기라는 집에 살면 언제든 소설이라는 방으로, 시라는 방으로 들어갈 수 있다고 믿는다.'





나는 이제껏 종종 블로그에 시나 글을 써서 올렸는데, 그것들이 꽤나 힘이 되었다. 무언가를 써야 할 때가 존재하는데 그때마다 과거의 문장이 도움을 주었다. 조악하고 별 볼일 없을지라도 조금씩 아주 조금씩 나의 글은 별 볼일 없는 것으로 쌓여간다.


어제는 친구들과 대천에 갔다. 며칠 전부터 가기로 했던 날이라 나는 꽤나 신나 있었다. 필름 카메라를 챙겼고, 특별한 날에만 쓰려고 아껴둔 비싼 필름 하나를 더 챙겼다. 제원이의 폴라로이드도 챙기고 핸드폰 삼각대도 챙겼다. 사진을 찍는 건 꽤나 귀찮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선명한 건 사진이었다. 그래서 어릴 때 그렇게 사진 찍는 걸 좋아했을지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테이프가 덕지덕지 붙어있는 렌터카를 타고 햇빛이 반짝이는 겨울의 국도를 달렸다. 차창에서 쏟아지는 빛에 멍울져가는 민성이를 찍었고 가는 길에 휴게소를 들려 라면을 먹고 두 사람도 못 들어갈 아주 작은 흡연실을 찍었다. 요즘 즐겨 듣는 애니 노래도 듣고 민성이가 좋아하는 검정치마 노래도 들었다. 목적지를 향하는 그 시간이 좋았다. 아마 나는 그 시간을 그리워했던 것 같다는 생각도 했다.



해변에 도착해서 우린 열심히 사진을 찍었다. 서로를 찍어주고 지나가는 행인에게 사진을 찍어달라 부탁도 하고 함께 찍기 위해 삼각대를 설치했다. 열심히 리모컨을 눌러댔다. 대천은 흐렸고 일몰은 보지 못했다. 그런 바다도 괜찮다는 생각을 했다.



한 친구가 다음에는 눈 내리는 속초 바다를 보고 싶다는 말을 했다. 그 순간을 상상했다. 아주 시린 바람과 흰 눈에 덮여있는 해변가를. 아주 반짝이는 그 겨울 바다를. 그리고 너는 말했다. 같이 보러 가자고 펜션을 빌려서 이번에는 하루가 아닌 더 많은 시간을 보내자고.  

그때 나는 너에게 생겨난 반짝이는 미래가 좋았다.

내년에도 우리가 함께할 수 있다는 것이 좋았다.



난 너에게 분홍빛으로 물든 겨울 바다를 보여주고 싶었는데 알고 보니 반짝이는 미래를 주고 싶었구나.

절망과도 같은 세상에서 희미한 사랑을 주고 싶었다.


몸을 녹이러 카페에 들어가 우리는 서로의 얼굴을 그렸다. 서로의 눈을 바라보고 천천히 얼굴을 들여다보았다. 그림 실력이 없어서 사진과에 왔나 보다라는 농담도 하면서.

네 눈과 네 볼의 모양과 네 코의 형태를 천천히 따라서 그리다가 너와 마주친 눈을 피하기도 하면서, 넌 그런 나의 눈을 똑바로 쳐다보았다.

자세히 바라보는 눈빛은 언제나 사랑 같다.

 그리고 우리는 서로의 형편없는 그림을 보고 웃었다.



천안에 돌아오니 별이 아주 많았다. 대천은 흐렸는데 천안은 하루 종일 맑았나 보다. 별은 많았고 가장 반짝이는 별의 이름을 알기 위해 어플을 켰다. 그 별의 이름은 기억나지 않지만 우리는 아이스크림을 먹으면서 오랫동안 함께 새벽을 보냈다. 거짓말을 못한다고 걱정했던 너는 꽤나 라이어 게임을 아주 잘했고 가장 잘할 줄 알았던 나는 정말 젬병이었다. 두 시간 동안 라이어는 열심히 거짓말을 해야 했고 나머지는 제시어에 대해 천천히 떠올리며 말했다. 한 명이 우스워지는 그 시간이 꽤나 다정했다고 생각한다.



2020.12

instagram @muffye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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