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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시인 손락천 Feb 03. 2017

출근길에서

또 한 수 배웠어

착각일까?
어제까지만 하더라도 고약했던 차가움인데, 오늘은 왠지 “맵지? 시간 갈수록 더 맵지?”라며 배시시 웃고 있는 것 같다.  



  바람 없는 은근한 추위는 타협을 불허하는 강짜와 같다. 차라리 차갑고 매서운 바람이 낫지, 은근히 몸을 엄습하는 오늘 같은 바람은 언제든 절레절레 고개 흔들 사양의 대상인 게다.     


  그러고 보면 고약한 성격은 사람에게만 있는 것이 아니구나 싶다. 날씨도 이런 강짜 같은 날씨가 있고, 영화도 [화차]처럼 아주 천천히 찜찜하고 섬뜩한 심연으로 이끄는 영화가 있으니 말이다.    


  그런데 가만 생각해보니 우습다. 나는 시절 따라 흐르는 계절의 선명한 빛에 그토록 열광하는데, 사실은 그 흐름의 절정이 바로 이렇게 은근한 가학 속에서 피어올랐던 것 같아서다. 

   

  겨울의 추위보다 훨씬 고약한 꽃샘추위에서 꽃이 피고, 한여름의 더위보다 훨씬 고약한 늦봄 더위에서 열매가 맺히며, 가을의 서늘함보다 훨씬 고약한 한여름 태풍에서 푸름이 굳어지고, 겨울의 차가움보다 훨씬 고약한 가을 무서리에서 잎새가 붉어지며, 봄의 꽃비보다 훨씬 고약한 눈보라에서 세상이 하얗게 덮이니 말이다.    




  출근길, 범어역에서 법원 쪽으로 오르는 동대구로 보도를 걷고 있다. 을씨년스러운 촉감은 늘 이곳에서 최고조에 이른다. 아마 점점 직장이 가까워지고 있기에 더욱 그럴 테다.    


  나는 습기에 묻은 찬 내음을 깊이 들이쉬며 생각했다. 그랬구나. 나는 변화 후의 열매에 대해서는 그토록 열광하면서도, 정작 변화 자체에 대하여는 달가워하지 않았고, 그래서 변화하려는 기척마저도 싫어했던 것이구나.       

  변화는 정체와 죽음에 대한 거부인 것을. 그래서 사실은 정체와 죽음이 고약한 것일 뿐, 그것에 대한 거부와 변화는 고약한 것이 아니었던 것을.     




  법무빌딩 앞. 일터가 있는 건물의 공동 출입문을 열자 훅하고 찬 기운이 덮쳐왔다.


  그런데, 착각일까? 어제까지만 하더라도 고약하다고 여겼을 이 차가움이 오늘은 왠지 “맵지? 시간 갈수록 더 맵지?”하고 배시시 웃으며 농을 거는 것만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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