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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시인 손락천 Jul 05. 2017

너에게, 그리고 곁에게

철없는 시인의 편지

어쩌면 평생토록 시의 심미에 이르지 못하고 생 속을 내보이는 것에 머물러 있을지도 모르겠다.


  역량에 따라 그렇지 않은 사람도 있겠지만, 나는 감성의 흐름을 온전히 시에 담지 못한다. 어쩌면 평생토록 시의 심미에 이르지 못하고 생 속을 내보이는 것에 머물러 있을지도 모르겠다. 내가 시를 쓰면서도 시라고 하지 않고 굳이 시담이라고 하는 이유다. 말하자면 변명이자 회피다.

 

  천부적인 재능을 가진 사람, 그리고 그러한 재능에 노력이 더해진 사람이 부럽다. 내가 그렇지 못하기 때문이다. 이 부러움의 발로는 시인으로서 좋은 시인이라는 평가를 받고자 하는 데에 있다기보다는 글을 쓰는 사람의 입장에서 만족하고 흐뭇해할 만한 글을 쓰지 못하고 있다는 데에 있다.


  전혀 현실의 생활에 필수적이지 않은 고민이다. 어쩌면 배가 불러 사유의 사치를 부리고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나는 안다. 이제 이러한 사치가 없으면 나는 살아도 산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글을 쓰기 시작한 것이 초등학교 3학년 때부터였다. 줄곧 글을 썼지만 다독, 다작, 다상량에 부족했던 나는 늘 제자리걸음이었다. 그러나 여전히 그러한 상태를 벗어나지 못했지만, 지난 몇 개월 동안 미친 듯이 글을 쓰면서, 그제야 내가 누구이고 무엇을 원하는지를 알았다.


  무엇이든 쓰는 것을 원한 것이다. 잘 또는 좋게 쓰지는 못하지만, 토해내고 싶고, 토해내지 않으면 점점 병들어 가는 성향임을 깨달았다는 말이다.



곁의 사람들에게 권하고 싶다.


  요즘 초등학교 2학년인 딸과 부쩍 친해졌다. 아빠가 이제 화를 내지 않아서 너무 좋고, 기쁘고, 재미가 있다는 것이다. 무엇 때문에 그렇게 찌푸린 얼굴에 화를 담고 살았던 것일까. 하고 싶은 것, 그래서 해야 하는 것, 하지 않으면 화가 가득 차는 것, 하여 엉뚱한 곳에 화풀이를 하고야 마는 것, 그러한 것의 정체를 알지 못했고, 그러한 이유로 일상의 분주함에서 글쓰기를 나중의 순서로 미루어 놓았던 탓이다.


  마음이 편하다. 좀처럼 화가 나는 일이 없다. 까칠함에 앞선 상대방에 대한 수긍이 생겼다. 이제야 조금은 사람다운 사람이 된 것이다.


  그래서 곁의 사람들에게 권하고 싶다. 잠시 일상을 내려놓고 스스로를 관조해보기를. 스스로를 알아야 스스로와 곁에 화사한 생기가 돎을 이제 안 까닭이다. 내가 누구인지, 무엇을 원하는지, 원하는 것에 대한 소홀로써 얼마나 분노하고 있는지, 그래서 길지 않은 인생에서 얼마나 스스로와 곁에게 패악을 저지른 것인지를 말이다.



결국 사람의 변화는 불가능해서 불가능한 것이 아니라, 스스로를 몰라서 불가능한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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