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실, 어디에나 있지만, 어디에도 없는 12

하늘의 일, 사람의 일 1-12

by 시인 손락천

1-12


사이드 책상에 서류 뭉치가 높게 쌓였고, 책상에도 맥락 없는 여러 서류가 펼쳐져 있다.


그리고 원래는 백지였을 연습장을 메모와 메모 사이를 그은 줄이 새까맣게 채웠다.


“그래서 말이지요. 지하주차장에 대한 합의를 한 것이 2010. 11. 29.입니다. 그리고 그때는 구미역사에 KTX가 정차했고요.”


“그래서 당시 서브프라임은 구미역사에 KTX가 정차한다는 것을 전제로 하여 유동인구와 수요를 계산해서 지하주차장의 예상수익을 분석했습니다. 물론 그러한 수지 분석에 대해서는 한국철도공사도 잘 알고 있었고, 그 수지 분석에 따른 수익을 고려할 때 서브프라임이 지하주차장 건축으로 인하여 입게 된 손실을 충당할 수 있다는 결론을 내고 지하주차장에 대한 최종 합의를 했던 겁니다.”


“자 그렇다면 과연 한국철도공사가 이런 합의를 할 때 KTX의 구미역사 정차가 폐지될 것이라는 사실을 알았느냐가 중요합니다.”


“만약 한국철도공사가 KTX 정차 폐지를 미리 알고 있었다면, 한국철도공사는 그것을 전제로 한 수지 분석이 잘 못 된 것인 줄 알면서도, 마치 그러한 수지 분석과 같은 수익이 날 것처럼 서브프라임을 속인 것이 됩니다. 즉, 서브프라임은 이러한 기망행위에 속아 지하주차장과 관련한 합의를 하였다는 논리가 성립됩니다.”


“그래서 우리가 깊게 고민하고 또 준비해야 하는 것은 이러한 프레임의 기망행위를 구성하는 데에 무리가 없을 정도의 증거를 얼마나 확보할 수 있느냐에 있습니다.”


“쉽게 생각해서는 안 되는 것이 증거라는 것은 보는 시각에 따라 그러한 사실을 증명하는 증거로 보일 수도 있지만, 때로는 전혀 다르게 받아들여질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좀 고생이 되겠지만, 전 직원을 동원해서라도 증거를 찾는데 노력을 해줬으면 좋겠습니다.”


나는 길게 말했지만, 탁자에 마주한 일호는 길어지는 말에도 가타부타 대답이 없다. 그러나 나는 이미 안다. 그것은 말수가 적은 그에게는 긍정의 신호이자 일종의 결기 같은 것임을. 그래서 기다려 주어야 한다는 것을.


일호는 한참 뒤에서야 겨우 말을 꺼냈다.


“그래요. 여러 증거를 모을 수는 있겠지만, 그게 반박을 불허하는 증거일 리는 없겠지요. 그래도 한 번 찾아보겠습니다. 설마 국가의 기반시설을 담당한 공사 중의 공사와 대한민국의 재판 시스템이 아무리 믿을 수 없는 상태로 전락했다고 하더라도, 설마 수십억 원을 오롯이 임차목적물에 투입한 채 한 푼의 수익도 얻지 못한 임차인을 그대로 나가라고 하겠습니까?”


“증거가 부족해도 어느 정도의 입증이 있고 그것으로 억울함이 엿보인다면 법원에서 조정이라도 해주겠지요. 일이 되고 아니고는 하늘의 뜻이니 일단 저로서는 사람이 할 수 있는 일에 최선을 다 할 겁니다.”


그랬다. 말이 필요 없었다. 사람의 일이라는 것. 그것을 다 한 사람에게는 하늘에 대한 원망이라는 것이 별 의미가 없을 테다. 결국 하늘의 일은 하늘의 일. 사람이 그것을 좌우할 수는 없다. 다만 사람의 일을 다 했으면, 결과에 대한 아쉬움은 남을 수는 있겠지만, 결과에 대한 원망은 없을 거다.


소송을 하면서 겪는 흔치 않은 일이다. 노력과 결과에 대하여 이토록 분명한 시각을 가진 의뢰인을 만난다는 것은.


아무리 큰 소송이든, 아무리 운명을 건 승부든, 사람의 삶은 그 결과의 승패에도 불구하고 삶을 이어간다. 승패의 여하함이 사람의 삶에 영향을 미칠 수는 있겠지만, 그것은 성취도에 관한 영향일 뿐, 결코 산다는 것의 본질 자체에 영향을 미치는 것은 아닌 까닭이다.


오히려 삶에 대한 뚜렷하고 흔들리지 않는 가치관을 가진 사람이라면 승리에 자만하지도 않을뿐더러, 패배에 낙담하지도 않을 터다. 그러한 부류의 사람에게는 패배라는 것이 도리어 약일 수가 있다. 보석은 깎일수록 더욱 빛을 발하는 법이 되기 때문이다.


그리고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어쩌면는 지금 그러한 보석과 마주하고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는.


나는 긴 회의를 마치고 차를 몰아 팔공산으로 향했다. 대구시에서 군위군으로 넘어가는 한티재. 여름에도 서늘한 바람이 부는 그곳에서 찬바람을 맞고 싶은 까닭에서다.


답답함이란, 그리고 희망이란 먼 곳에 있는 것이 아니라 작은 머릿속에 상존하면서 어떤 바람을 맞느냐에 따라 무엇으로든 환기될 수 있다. 일호의 말에, 그리고 이제껏 그렇게 살아오지 못했던 내 태도에 대한 깨달음에 문득 떠오른 생각이었다.


어둠이 뭉개져 차 앞을 막고, 차는 간신히 어둠을 쪼개며 산을 올랐다.


거짓말인 것처럼 한티재의 6월 초여름은 도심과는 전혀 달랐다. 찬바람이 드세다. 차를 주차한 자리에서 매점으로 향하는 불과 몇 미터 안 되는 거리를 걷는 동안에 벌써 팔에 소름이 돋았다.


나는 매점의 자판기에서 따뜻한 커피 한 잔을 뽑아 전망대에 섰다.


먼 곳의 불빛이 마치 보석처럼 박혀 빛났다. 정작 그곳으로 내려가면 온갖 삶의 행태들이 어지럽게 산란해 있을 테지만, 설사 그러한 카오스라 하더라도 일종의 질서와 아름다움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그것은 오로지 멀어져야만 비로소 확인이 된다. 바로 지금처럼.


문득 의뢰인이 굳이 스스로 소송을 진행하지 않고 변호사 사무실에 맡기는 것도 그와 같은 이유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분쟁에 대해서는 그 분쟁의 당사자가 다툼의 내용을 가장 잘 알고 있을 테지만, 분쟁에 함몰되어 있는 의뢰인으로서는 그 분쟁이 배열된 일련의 질서를 찾기가 힘든 것일 터다. 중이 제 머리를 깎기 힘든 것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