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들에 대한 예의, 그리고 나에 대한 예의 2-11
2-11
퇴근 시간이 늦어졌지만, 한참이나 소파에 앉아 눈을 감고 있었다. 부장의 말이 내내 마음에 남아서다.
사람은 사람을 모른다. 다른 사람은 말할 것도 없고, 자기 자신조차 스스로를 제대로 알지 못한다.
한창 이성주의가 지배하던 근대의 때에도 사람이 이성적으로만 살 수 없는 존재라는 것이 이미 기정사실이었고, 그래서 그러한 이율배반에 대한 짙은 회의(懷疑)가 있었다. 이성을 방해하는 정염. 그래서 데카르트는 관념론을 관철하기 위해서 사람에게는 이성과 정염을 적절하게 조율하여 사람이 이성적인 존재가 될 수 있도록 하는 장치가 내재되어 있다는 가설을 내세웠다. 송과선(松科腺)이 바로 그것이었다. 그러나 후대의 해부학자들은 사람의 그 어디에서도 그러한 송과선의 흔적을 발견할 수가 없었다.
그러던 중에 현대로 넘어오는 길목에서 프로이트가 그 문제에 대하여 새로운 설명을 하기 시작하였다. 사람에게는 의식의 세계를 주관하는 자아와 무의식의 세계를 주관하는 무의식과 두 세계의 충돌을 회피하도록 하는 초자아가 있다는 것이다. 데카르트식으로 말하자면, 의식은 이성이고, 무의식은 정염이며, 초자아는 송과선인 셈이다.
이렇게, 근대에서 현대로 넘어오면서, 개별자로서의 사람은 단일적인 존재가 아니며, 정신적으로 분열된 여러 존재로 실재한다는 가설이 주를 이루게 되었고, 그러하기에 개별자로서의 사람은 그 스스로도 스스로를 통제할 수가 없는, 알 수 없는 존재에 의하여 존재하게 된 어떤 것이라고 인식되기 시작했다.
나는 이렇게 언어학, 문화인류학, 철학, 구조주의를 통틀어 전반적으로 일어난 사상의 흐름이 과연 옳은 것인지, 그른 것인지를 알지 못한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사람과 문화를 다루는 학자들이 그와 같이 연구하고 인식한 데에는 그만한 이유가 있었을 것이라는 점이다.
누가 누구를 판단할 수는 없다. 그러나 사람이 사는 세상이 유지되기 위해서는 어쩔 수가 없이 누군가는 누군가를 판단할 수밖에 없다.
보상팀의 부장은 그가 가진 진실로 스스로와 피해자를 판단한 것인데, 그 진실이 과연 온당한 진실인지는 아무도 알지 못한다.
피해자 역시 그가 가진 진실로 스스로와 주변 모두를 판단한 것인데, 그 진실이 과연 온당한 진실인지를 알 방법도 없다.
각자에게는 그만큼의 이유와 사정이 있겠지만, 결코 그러한 것이 제삼자에게 강요될 수는 없다. 스스로도 스스로를 알지 못하는데, 어찌 다른 사람을 알 수가 있고, 또 그것으로 단정적인 판단을 할 수가 있다는 말인가?
감았던 눈을 떴다. 나는 다만 소송을 하고 있을 뿐이다. 일방적으로 누구의 편을 들어 상대방이 가진 진실의 가치를 폄훼하고자 하는 것이 아니다.
그가 누구든, 그에게 떳떳한 그 무엇이 있다면, 그것이 무엇이더라도 그것은 그에게 그 자체로서 의미를 가진다.
나는 그러한 의미들 속에 존재하고 있고, 제삼자로서 할 수 있는 일을 할 뿐이다.
각자가 가진 의미를 소홀하게 취급하지 않는 것, 그러한 태도야말로 진실이라고 항변하는 이들이 가진 의미에 대한, 그리고 실제로도 그렇게 믿고 있을지도 모르는 이들이 가진 의미에 대한 최소한의 예의이고, 또한 나에 대한 예의일 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