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화. 경제운동, 북미실업주식회사
1912년. 안창호의 나이는 34세. 안창호는 샌프란시스코 국민회 사무실에 거점을 두고 북미실업주식회사 발기에 온 정성을 쏟았다. 실업 증진. 1907년 신민회 취지서와 통용 장정에서 밝힌 바대로, ‘실업 주식회사 설립을 권장하고 경영방침을 지도하여 민족 자본을 형성한다.’ 안창호는 이때 이미 공공성에 기초한 민족의 3대 자본을 생각했다. 그것은 금전과 신용과 지식이다. 부강한 나라, 적국을 상대로 독립전쟁을 치를 수 있는 나라. 그 기초는 금전의 자본이요, 신용의 자본이요, 지식의 자본이다. 이 3대 자본을 축적해야 한다. 근대화와 산업화를 이루는 신국건설에 어느 한 요소도 제외될 수 없다. 금전의 자본을 위해 실업 증진이 필요하고, 실업은 신용의 자본을 전제로 한다. 신용의 자본을 위해 민주시민의 기초훈련이 필요하고, 지식의 자본을 위해 교육이 필요하다. 이러한 실행 전략들은 공립협회 활동을 통해서 합의를 이룬 것이다. 캘리포니아 일대 한인사회는 공립협회를 중심으로 단결했고 한인 노동자의 삶의 질은 날로 향상되었다. 안창호는 노동자들의 권익 보호와 실직관리, 저축과 투자의 중요성을 가르쳤다. 회사의 윤리경영과 투명성에 대해서도 주인의식을 강조했다.
안창호의 경영원리는 간단했다. 우선, 현장 노동자들이 스스로 자각할 수 있도록 기다려 주는 점진적 방법이다. 그리고 집단 안에서 스스로 지도자를 뽑고 그에게 권한을 위임하는 방법을 가르쳤다. 여기에 공론 형성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소식지나 신문을 공유하는 방법이 사익을 보호할 뿐 아니라 공동체의 이익, 즉 공익적 힘이 된다고 가르쳤다. 이것이 안창호가 늘 생각하고 있던 새 국민을 위한 기초훈련, 민주시민 훈련이었다. 청년 지도자 안창호는 ‘오렌지 하나를 따도 정성껏 따라.’라는 가르침으로 의식개혁과 생활 개혁을 이끌었다. 정직, 근면, 성실, 사랑, 무실역행을 가르친 것이다. 이 가르침은 미국 자본주의 사회의 근간이 되는 시민윤리와도 맞아떨어졌다.
안창호는 경제 교육도 잊지 않았다. 투명경영과 상생. 상투를 잡고 서로 싸우던 한인 노동자들은 서로 협력해야 이익이 창출된다는 것을 깨우쳤다. 안창호는 공동체 조직 윤리와 신성단결을 가르쳤다. 그리고 이 단결의 힘으로 무너져 가는 조국을 되살릴 수 있다는 신념을 불어 넣었다.
1912년 1월, 안창호는 샌프란시스코 국민회 사무실에서 임준기와 송종익을 만났다. 이번엔 국민회가 북미, 하와이, 시베리아, 만주리아로 발전하여 대한인국민회로 확대되자, 이를 뒷받침하는 경제 공기관으로 북미실업주식회사 발기를 준비하던 중이었다.
평소 역사에 관심이 많던 임준기가 안창호를 보자 큰 소리로 말했다. “형님, 중국에서 신해혁명이 일어나 중화민국을 새로 건설했다는 소식 들으셨죠? 혁명 세력은 조선의 몰락을 보고 봉기했다고 합니다. 청나라도 결국 막을 내리나 봅니다.”
안창호 역시 예감한 일이었다. “권력 부패가 자초한 일이잖소. 우리가 그랬듯이. 양계초가 조선의 망하는 과정을 타산지석으로 삼아야 한다고 했거늘. 청나라도 거기까지가 운명이었던 가보오.”
이어서 임준기가 청나라의 패망 요인을 논리적으로 풀어냈다. 그는 정치 분석에도 취미가 있던 터였다. “청나라가 무너진 것은 비전이 뚜렷하지 않은 의화단운동의 실패가 원인이오. 반 기독교 운동 설정 자체가 잘못된 거지요. 대신 신국건설의 꿈을 가진 혁명 세력의 승리라고 봐야죠. 혼란한 틈새에 제국 열강의 침략이 노골화된 것이 혁명 세력을 키운 것이죠. 부청멸양(扶淸滅洋)의 이슈가 너무 신비적이었어요. 의화단은 처음부터 실패 요인을 안고 있었던 겁니다.”
안창호는 임준기의 분석에 동의했다. “세계 약소국은 대부분 공화주의로 근대국가를 건설하려고 하더이다. 백성이 주인이 되는 나라. 신해년 10월 혁명도 새로운 혁명 세력들이 어떤 이념으로 백성을 위한 최선의 근대국가를 형성할지.... 내부적 혁명을 겪어야만 할 것이오. 일단은 손문 중심으로 공화제 형태의 중화민국이 선포되었지만....”
“형님 말씀대로 청나라가 무너졌으니 그동안 세계로 쫓겨난 중국인 화교들이 부와 세력을 모아 결집하겠지요.” 임준기가 진지한 표정으로 말했다.
임준기의 말을 경청하던 송종익이 입을 열었다. “화교의 결집력은 대단한 것 같습니다. 중화주의 기치로 뭉쳐 전통의 뿌리를 유지하면서 중국의 자존심을 전승해 나간다. 청조가 무너지면 화교 출신들은 해외에서 쌓아 올린 부와 자존심을 혁명에 쏟아붓겠지요.”
“우리도 단결하여 실업을 일으키고 세력을 쌓아 화교들처럼 독립에 투자해야지요.” 임준기가 결론을 내렸다.
안창호가 다시 말문을 열었다. “내가 시베리아 열차를 탔을 때, 그리고 베를린과 런던, 파나마운하 공사장을 거쳐 미 대륙 횡단 열차로 오면서 무엇을 느꼈는지 아시오? 산업근대화. 모든 것이 참으로 대단했소. 대륙을 횡단하고 뱃길을 단축하고. 그 뒤에 받치고 있는 자본의 힘, 국가의 힘, 정치와 경제. 결국, 인간이 만들어 내는 힘이 위대한데 침략, 강탈, 전쟁으로부터 인류의 평화와 행복은 또 어떻게 지켜낼 것인가? 이런저런 생각을 많이 했다오. 개인은 참으로 무력합디다.”
“형님의 행보. 말이 쉽지 결국 고난의 행보였던 거죠. 자초하신 것은 아닙니까? 하하.” 임준기가 유쾌하게 말했다.
안창호는 임준기의 말에 수긍했다. “자초라... 그런 면이 있었소. 우리는 5년 전, 국권 회복을 위해 결사체가 필요했고 극동에 통일연합기관 설치가 가능하다고 확신했었지. 단결이 힘의 상징이라 여겼었소. 그런데 현실은 암담했소. 분열과 다툼. 그러는 동안에 일본이 차관을 쓰게 하여 그 돈으로 철도와 도로를 놓고 항만을 개발하고. 그것이 그대로 우리가 갚아야 할 빚이 된 거요. 산업화! 나는 그때 우리 민족의 무력함을 체감했지. 군대해산 때도 결국 패인은 신무기의 위력에 굴복한 거요. 그런데 연해주 의병대의 투쟁 의지는 참으로 놀라웠소. 하지만 우리가 신무기를 생산해 내지 못한다면 독립전쟁은 불가하다는 생각을 했었소.”
“형님 말씀대로 아직은 실업을 권장해서 자금의 위력을 깨우치게 하는 일이 급선무일지도 모릅니다. 농업 노동이 중요한 단계죠. 미주 동포사회가 그런 단계에 있죠.”
송종익이 조심스럽게 말했다. “실업 부흥에 대한 이해도가 낮은 상태에서는 열심히 땀 흘려 번 돈을 아껴서 회사에 투자하면 어떤 이익이 돌아오는지 명확히 알아야 합니다. 그 이익이 사익인지 공익인지 하는 것도 이해하기가 쉬어야 합니다. 여기로 목숨 걸고 이민을 온 사람들은 자기 생존을 위해 온 것이니.”
임준기가 말했다. “태동실업은 좋은 본보기입니다. 형님이 떠날 때, 미주 한인들은 조국의 앞날을 많이 걱정했죠. 그래서 해외 기지 개척이나, 두만강과 압록강을 넘어 동포들의 삶의 기반을 제공하는 투자라는 애국적인 명분에 공감이 있었습니다.”
“그렇다면 현재는 여러 가지 문제점이 나오고 있는 것입니까?” 송종익이 거리낌 없이 말했다.
안창호는 잠시 생각에 빠졌다. 김성무의 얼굴이 떠올랐다. 봉밀산 토지는 국유지를 구매한 상태다. 농경지 일부는 현지 중국인으로부터 임대한 토지이다. 김성무는 일단 필요한 농기구를 갖추고 농업경작에 착수했다고 했다. 가끔 마적 떼가 출몰하여 행패를 부린다고도 했다. 불안한 땅. 내 나라 땅을 빼앗긴 탓이다.
임준기가 안창호의 침묵을 깼다. “형님, 미국에서 상업과 공업은 훗날로 미룹시다. 우선 농업 발전에 집중해서 자본금을 키워나갑시다. 우리가 잘할 수 있는 것은, 농업이죠. 땅은 정직하니까요. 가끔 지진이나 홍수로 망치는 일도 있겠지만....”
안창호가 임준기의 말에 동의했다. “모든 어려운 일은 가장 쉬운 것부터 시작한다.”
송종익이 그동안 약속한 투자자 이름을 거명했다. “김인수, 송종익, 김종혁, 조성환, 김기만, 정원도, 임준기, 손양선, 강번.”
안창호가 웃으며 말했다. “나도, 내 이름도 명단에 넣어주시오. 그러면 10인 발기인이 되는군요. 나도 열심히 투자금을 모아 보겠소. ”
“아하? 예!” 송종익이 놀라는 표정을 보고 모두 웃었다.
임준기가 송종익을 향해 물었다. “우리 회사 투자금 목표액이 3년 안에 4만 5천 달러라고 했나요? 그럼 매주 300달러를 모아 투자해야 하는데. 우선, 발기인 열 명이 감당해야 하는 주식이니 우선 『신한민보』에 광고를 내고 시작합시다.”
송종익이 걱정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첫 투자금이 중요합니다. 약속한 금액 투자요. 발기인들이 모범을 보여줘야 할 텐데 말입니다.”
이제껏 심각한 표정을 짓고 있던 임준기가 웃으며 말했다. “보따리를 하나 풀어볼까요? 사실은 투자금을 모으느라 제 여식에게 입힐 옷을 고물상에서 공짜로 건졌답니다. 죽은 아이 옷이었다고 하네요. 하하.”
이 말에 안창호가 버럭 화를 냈다. “아니, 열 살 소녀 옷을...! 어떻게 그럴 수가 있단 말이오?”
임준기는 뭐 어떠냐는 듯 대꾸했다. “보배한테는 비밀이죠. 집사람이 가져왔다니까요? 형님, 괜찮아요. 지금 다들 고생인데요.”
보배는 11살 된 딸의 이름이다. 임준기는 아무렇지도 않다는 표정을 지었지만, 안창호가 그렇게 화내는 모습은 처음 본지라 이내 머쓱해졌다. ‘괜히 이야기했나?’
안창호는 마음이 아팠다. 임준기의 딸은 자신의 딸이나 다름없었다. 안창호는 그날 저녁 숙소에 자리를 펴자마자, 리버사이드에 있는 혜련에게 옷을 몇 벌 만들어 보내 달라고 편지를 썼다.
안창호는 다시 진지해졌다. “세계 여기저기에서 조직되고 있는 대한인국민회를 통합하려면 총회를 조직해야 하오. 그리고 우리가 시작하려는 북미실업주식회사가 장차 공적 기업의 모델이 되어야 합니다. 정치와 경제. 이 두 기반 위에서 독립운동의 청사진이 나와야만 하오.”
임준기가 무릎을 치며 동의하고 나섰다. “공기업. 북미실업주식회사는 장차 독립 신국의 경제 기반의 모델이 된다! 형님, 참 대단하시오. 경제단체를 견인하는 국민회는 동포의 임시정부가 되는 셈이군요.”
안창호는 임준기의 화답에 기분이 좋아졌다. “올해 상반기에 회사가 설립되면, 가을에는 대한인국민회 중앙총회를 발기할 생각이오. 그리고 내년에는 어떻게든 인적자원을 총동원해서 흥사단을 조직할 계획이오. 조만간 동지들께 내가 그리고 있는 독립운동 청사진을 보여드리리다.”
북미실업주식회사는 1912년 1월 29일, 샌프란시스코 국민회관에서 발기총회를 열었다. 모두의 노력으로 회사에 투자하겠다는 주주들이 꾸준히 늘어나 3월 말경, 150여 명이 청약했다.
1912년 4월이 되자 안창호는 리버사이드 농장으로 돌아왔다. 뜻밖에 김필순이 보낸 3월 8일 자 편지가 기다리고 있었다. 안창호는 봉투 겉면에 김필순의 서명을 보자마자 가슴이 뛰었다. ‘무슨 일일까? 그냥 안부겠지?’ 그러나 편지 내용은 그가 서간도로 탈출했다는 소식을 자세히 전하고 있었다. 김필순은 데라우치 총독이 신민회 관련 인사들을 마구 잡아들이고 있어 위협을 느끼던 중, 중국의 신해혁명(1911.10)에 고무되어 서간도 탈출을 무사히 결행했다. 김필순은 후배이자 제자인 이태준의 도움을 받아 간호사로 위장한 여동생 김순애와 동행하였고, 1911년 12월 31일 무사히 국경을 넘었다고 했다. 이어서 김필순은 서간도 소식을 상세하게 전했다. 1910년 7월, 길림성 유하현으로 탈출한 이회영과 이동녕은 삼원보에 정착하여 자치 조직 경학사와 신흥강습소를 설치하고 기지 개척을 시작했다. 그러나 1911년 가을 흉작으로 어려움을 겪다가 통화현 합니하(哈尼河)로 이주하여 새로운 자치단체 부민단을 조직하고 신흥중학으로 개칭하여 심기일전하였다. 김필순은 부민단에 합류하여 의료활동을 벌였다. 그러면서 곧 내몽골 치치하얼로 이동하여 윤오 형님과 가족들을 이주시키고, 안창호와 약속했던 기지 개척 사업에 매진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안창호는 김필순의 소식에 안타까운 마음이 들었다. ‘미국이 후원하는 세브란스의학원도 김필순같이 유능한 사람을 잃을 수밖에 없구나....!’ 안창호는 나라를 상실했다는 절망감이 잠시 되살아났다. 그러다가 편지 내용 중 이태준이 탈출을 도왔다고 하는 대목에서 저절로 미소가 지어졌다. 안중근 사건으로 용산헌병대에서 만신창이가 되어 풀려났던 자신의 모습과 자신을 걱정하던 김필순과 이태준의 얼굴이 주마등처럼 스쳤다. 안창호는 이태준도 김필순을 뒤따라 탈출했을 것이라고 믿었다. 아니나 다를까 안창호는 7월 16일, 남경에서 보낸 이태준의 편지도 받았다. 김필순의 망명으로 이태준 역시 주변으로부터 따가운 시선을 받았다. 이태준은 이를 피해 부랴부랴 남경으로 탈출했고, 언어장벽과 빈곤과 외로움에 시달리다가 다행히 중국인 기독교인을 만나 남경기독병원에 취직했다고 썼다. 이태준은 김필순의 연락처를 알려달라고 했다.
안창호는 즉시 ‘필순은 현재 서간도 부민단에서 활동하고 있으나 곧 내몽골 치치하얼 방향으로 개척 가능한 거처를 탐색 중’이라고 답장을 써 보냈다. 나중에 김규식을 통해 알게 된 바로는, 이태준은 안창호의 답장을 받자마자 서간도 부민단에 성금을 보내 김필순을 후원했다고 한다.
(다음 화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