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화. 해외 통일연합기관, 대한인국민회중앙총회
1912년 7월 5일, 파차파에서 안창호와 이혜련의 둘째 아들, 필선이 태어났다. 장남 필립과는 7살 차이다. 안창호는 혜련에게 늘 고마웠다. 아버지로서 남편으로서 아무것도 해주지 못하고 같이 있어 주지도 못하고 있지만, 혜련은 묵묵히 가정을 지켜내고 있었다. ‘내가 사랑하는 오직 한 여인, 혜련!’
북미실업 발기와 동시에, 안창호는 세계 조직으로 뻗어 나간 대한인국민회가 통일기관으로 기능하도록 중앙총회결성을 서둘렀다.
안창호가 미주로 돌아왔을 때 이미 북미지방총회와 하와이지방총회가 있었다. 멕시코시티와 메리다지방회는 북미지방총회에 소속되었다. 1912년 8월 5일 간도국민회에서 보낸 황병길의 보고서에 따르면, 시베리아와 만주는 이강, 정재관, 김성무 등이 고군분투한 결과 33개의 지방회가 결성되었고 앞으로 조직이 더 늘어날 것으로 보인다고 했다. 재외 한인들의 경우엔 개인의 힘만으로는 생존이 어려웠다. 그러므로 단체를 중심으로 단결해야 했다. 안창호는 시베리아 열차 안에서 구상했던 독립운동단계별방략도를 다시 살폈다. 안창호는 유럽을 거쳐 오면서 독립국 대한의 새로운 정치체제는 역시 공화주의에서 그 대안을 찾아야 한다고 결론을 내렸다. 공화주의는 근대 시민사회의 보편적 원리이며 인류 평등의 기초원리이다. 공화주의로 민족을 대표하는 통일연합기관. 이는 세계로 흩어진 한인들의 생명과 삶과 권익을 보호할 수 있는 독립운동 최고기관의 위상을 갖는 정치단체요, 자치행정 기능을 갖는 단체를 말한다. 을사늑약 이후로 결심을 굳히게 된 민족 통일연합기관 설치. 안창호에게 그것은 꿈이고 도전이었다. 손문처럼 혁명당까지는 아니어도 이에 비준하는 정치체계를 갖추어야 한다.
안창호는 그것이 지금 할 수 있는 최선이라고 믿었다. 중앙총회를 설립하고 지방회를 계속해서 확산해 나가야 한다. 중앙의 역할과 기능은 중요하다. 명령 체계의 단일화, 연통제, 교통망, 노선통합 등 생각하면 할수록 복잡하지만, 이는 임시정부와도 같은 기능을 할 것이다. ‘모든 큰일은 가장 작은 것에서부터 시작하고, 가장 어려운 일은 가장 쉬운 것에서부터 풀어야 한다. 조국광복의 그날까지...!’
문득 안창호는 청나라 제국을 무너뜨린 중국의 신해혁명 진행 과정이 궁금했다. 그러던 차에 1912년 6월, 북경에서 보낸 조성환의 편지를 받았다. 마침, 중국의 혁명 정황에 대한 보고였다. 신해년 10월 10일 우창 봉기 성공으로 혁명 세력은 우한에 공화제 호북군 임시정부를 수립하고 손문을 기다렸다. 12월에 귀국한 손문은 이듬해 1월 1일, 남경에서 중화민국을 선포하고 초대 총통으로 부임했다. 봉건제가 종식되고 공화제가 수립될 기회였다. 그러나 손문은 신중했다. 중국의 사회 · 경제는 열강의 세력 다툼 속에 있었고 봉건적 구습에 젖어 있는 상태였다. 손문은 ‘혁명은 아직 성공하지 않았다. 계속 노력하자.’라고 호소하고 혁명파, 입헌파, 구 관료 등이 연합한 임시참의원으로 내각을 구성했다. 결과적으로 혁명 세력은 힘을 발휘하지 못했다. 임시내각은 2월에 주권 재민, 내각제도, 국민기본권 등 손문의 삼민주의를 바탕으로 하는 임시약법을 제정 공포했다. 그러나 손문은 고심 끝에 구 관료 원세개에게 전권을 위임했다. 그 결과 혁명 세력은 약화되었다. 조성환은 이러한 보고와 함께 우리의 광복과 독립운동 방향을 걱정하고 있었다.
1912년 10월 하순, 안창호는 다시 샌프란시스코로 갔다. 안창호는 샌프란시스코 회관에서 국민회 중앙총회 결성 준비로 바쁜 일정을 보냈다. 『신한민보』 편집을 맡고 있던 홍언과 함께 있었다. 홍언(1880~1951)은 작년 9월 안창호가 샌프란시스코에 도착했을 때 처음 만난 동지였다. 그때 홍언은 하와이에서 『신한국보』 책임자로 활동하다가 11월부터 『신한민보』 주필을 맡게 되어 샌프란시스코로 왔다고 했다. 안창호는 소설과 수필을 쓰는 작가 홍언이 처음부터 마음에 쏙 들었다.
“이 보오, 홍언 동지. 4개 지방총회 3인 대의원 선발은 잘 추진되고 있지요?”
“형님, 북미 대의원 박용만 동지는 따로 연락해 두었습니다. 이대위, 김홍균 대의원에게 연통해서 같이 오라고 했습니다. 하와이 대의원 윤병구, 박상하, 정원명은 함께 건너오라 했고요.”
홍언은 사석에서 안창호를 형님으로 호칭했다. 안창호는 그런 홍언이 좋았다. 격의 없이 토론할 수 있는 사람이었다.
“오, 박용만 동지는 네브래스카에 있겠군요. 8월에 졸업했으니 정치학 전공자가 되나요?”
“잘 되었지요. 학력을 갖춘 지도자가 많이 필요하니까. 이대위 형님 말로는 하와이에서 박상하 목사가 『신한국보』 경영을 맡을 계획인데, 주필로 박용만이 적임자라 했답니다. 그 일로 북미 대의원 1인을 새로 선발해야 하는데, 그 일은 형님이 하시죠.”
“알겠습니다. 이번 총회가 끝나는 대로 이대위 회장과 의논해서 선발합시다.” 안창호는 마음속으로 황사용을 점찍고 있었다.
“형님, 그런데 시베리아와 만주리아는 어떻게 할까요? 미국까지 오게 할 수 있을까요?” 홍언은 늘 멀리 있는 조직이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시베리아는 통신으로 전권 위임을 받읍시다. 이강 동지가 그렇게 조언해 왔습니다.”
안창호는 이강의 의견이 언제나 소중했다. 소통의 창구. 이강이 그런 친구였다.
“아, 잘됐습니다. 그럼, 김병종, 유주구, 홍신언 3인은 통신으로 위임장을 처리하기로 하고, 만주리아는 어떻게 할까요?” 홍언은 언젠가 치타와 만주를 꼭 방문하고 싶었다.
“이강과 정재관이 김성무 의견도 전해왔는데, 만주지방 대의원은 대리를 추천해서 위임한다고 합니다. 김성무 동지가 가까이 있는 박공육(영갑) 동지에게 전권을 위임했다는군요.” 안창호는 김성무의 얼굴을 떠올리며 말했다.
“대리라... 혹시 형님도 포함인가요?” 홍언이 웃었다.
“아니, 홍 동지가 그걸 어떻게 알았습니까? 하하, 그렇소. 나와 홍 동지, 그리고 강영소 동지요.” 안창호는 홍언이 옆에 있어 든든했다.
“아니, 저도요? 하하.” 홍언이 유쾌하게 웃었다.
“대리직임은 참으로 막중하오. 책임감 말이오. 이강과 정재관, 김성무 동지는 역시 남다르오.” 안창호의 솔직한 심정이었다.
“참, 형님은 이대위 형님을 아직 못 만났지요?” 홍언이 웃으며 물었다.
“그러게 말이오. 북미총회 부회장을 맡으면서 강제 병탄의 부당성을 지적한 서한을 일왕에게 보냈다고 들었습니다. 번역에 능하다지요? 앞으로 같이 할 일이 태산이오.”
안창호는 하루빨리 이대위를 찾아가 볼 생각이었다. ‘그는 내가 못 이룬 유학의 목적을 달성 중이다. 내 고향 강서 친구. 버클리 명문대학에서 역사학 전공이라.... 부럽군. 그런데 몸이 약한 것이 흠이다.’
“캘리포니아대학을 다니면서 『신한민보』 논설하랴, 번역하랴, 최근에는 목사안수 준비까지 엄청나게 바쁘다고 합니다. 그렇게 촌각을 다투다가 건강을 잃을까 걱정됩니다.” 홍언의 진심이었다.
“공감하오.” 안창호가 걱정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안창호가 본론으로 들어가 핵심 사안을 말했다. “중앙총회는 민주공화국으로 새 국가 이념을 확립한다. 중앙총회는 조국광복이 되는 그날까지 해외 한인의 최고기관으로 자치와 명령권을 갖는다. 재외동포는 각 지방총회가 결정하는 의무금을 중앙총회로 보내기로 조치한다. 어떻소?”
홍언이 신중하게 답했다. “신국 비전과 신민의 의무군요. 가장 중요한 핵심이죠. 그런데 중앙총회를 어떻게 신뢰할 수 있게 하는가에 대한 문제가 있습니다. 복벽주의냐 공화제냐 하는 문제는 미국 내 한인사회에서는 어느 정도 통합이 되었다고 하더라도 국내와 연해주, 중국 등지에서는 여전히 갈등의 핵심입니다. 각 지방회의 애로사항이기도 할 것입니다.”
안창호의 눈빛이 빛났다. “맞소. 홍 동지 말대로 이념통합이 가장 어려운 문제입니다. 연해주에서 지도자들이 갈등하고 대립하는 동안 조국 독립은 점점 더 멀어지고 있다고 생각했지요. 시간이 없습니다. 우리는 국민이 주체가 되어 공화제 국가체제로 독립전쟁을 해야 합니다.”
홍언이 안창호의 말을 이어갔다. “공화제로 치르는 독립전쟁은 세계연대가 수월할 것입니다. 자력은 불가능해 보여도 연합국을 형성한다면 가능하죠.”
“바로 그거요. 지금은 제국 시대이지만 머지않아 연대의 힘이 제국침략을 무력하게 만들 것입니다. 제국 간 대립은 큰 전쟁을 가져오겠지요. 유럽과 러시아는 마르크시즘과 사회주의 운동이 확산일로에 있습니다. 인간해방과 평등주의. 꿈같은 철학과 사상들이 물밑에서 꿈틀거리는 것을 알아챘소. 러시아와 새 중국이 어떻게 연합할 것인가도 관건입니다. 청년들은 손문 이야기를 많이 합디다. ‘천하위공 3민주의. 민생, 민권, 민족.’ 우리 독립운동이 어영부영할 때가 아니더라 이런 말입니다.” 안창호는 잠시 가쁜 숨을 내쉬었다.
“흩어진 신민회 세력을 하나로 통합하기는 어렵고 국민회 조직은 확산일로이니, 국민회가 중앙총회로 통합되어 세계통일기관으로 기능하면 좋겠군요.” 홍언이 요점을 짚었다.
“바로 그 점이오. 반대 세력도 나오겠지만 이는 통합 중앙총회에서 민주적 절차에 따른 공론을 형성하고 다수파 의견에 복종하도록 규약을 만들면 되지 않겠소?”
안창호는 중앙총회의 기능을 최대한 민주적 절차로 균형을 이루게 하되, 공화국 이념이나 민주주의 가치를 훼손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다. ‘백성이 잘 살아가도록 제도를 확립하고 대신 세금을 걷는 거야. 의무금. 그래야 조직체도 유지된다.’
홍언이 신중하게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제가 11월 8일 대의원 총회를 위해 선포문과 결의문 초안을 만들어 보겠습니다.”
안창호는 만족스러웠다. ‘홍언이 초안을 만들고 다른 대의원들이 모여서 검토한 뒤 통과시키면 된다.’
1912년 11월 8~29일, 샌프란시스코 회관. 4개 지방총회의 대의원 회의를 소집했다. 북미는 이대위, 박용만, 김홍균이 대의원으로 참여했다. 하와이는 윤병구, 박상하, 정원명이 참석했다. 시베리아는 통신으로 김병종, 유주규, 홍신언을 대의원으로 선정하여 전권을 위임했다. 만주리아는 안창호, 강영소, 홍언을 대의원 대리로 위임했다.
이날 안창호는 혹시나 해서 미리 도착해 박용만을 은근히 기다렸다. 그를 만나고 싶었다. 이대위가 넌지시 알려 준 바로는 북미국민회에서 박용만이 네브래스카 소년병학교를 추진했다고 하는데, 이에 관한 소식과 멕시코 한인들의 하와이 이주 문제가 궁금했다. 그러나 박용만과 박상하는 시간을 겨우 맞춰 회의장으로 들어섰다. 회의가 시작되었다. 북미 대표 이대위가 지휘봉을 들었다. 12인의 중앙대의원은 안창호를 중앙총회 임시 총회장으로 선임했다. 회의봉을 잡은 안창호는 대의원회의를 소집하게 된 경위를 설명하고 참석 의원들의 소회를 먼저 듣기로 했다. 박용만이 가장 먼저 나서서 중앙총회의 필요성을 강조했다.
“저는 국치 이후로 줄곧 무형 국가론을 제기해 왔으나 여기에는 많은 문제가 있다는 점을 인식하게 되었습니다. 가장 중요한 건 기초의 문제입니다. 기초가 튼튼했다면 국치도 없었을 테니까. 해외로 나간 동지들이 곳곳에서 기지 개척과 사관 양성을 위해 뼈아픈 노력을 하고는 있으나 아직은 역량 부족임을 절감하고 있던 터입니다. 그러나 미주는 공화제로 이념적 통합을 이루고 세계 여러 곳에 국민회를 설치하여 기초를 놓고 있으니 참으로 다행입니다. 말이 길어집니다만, 대동보국회와 공립협회 그리고 하와이합성협회의 통합은 매우 상징적인 의미가 있는 역사적 사건이라 해도 과언은 아닙니다. 이제 국민회 중앙총회가 세계 한인의 최고기관으로 거듭나는 일은 향후 임시정부의 토대가 될 터이니 그 기대도 매우 큽니다.”
의원들은 박수로 화답했다. “그렇소. 우선 미주라도 중앙총회를 결성합시다!”
안창호는 박용만에게 미소로 신뢰를 보냈다. ‘이념으로 갈등하고 있을 때가 아니다. 또 무력투쟁은 아직은 때가 아니다. 젊은이들의 목숨이 너무 아깝다. 외교에 기대어서도 안 된다. 국가가 상실됐는데 어느 나라가 이러한 사정을 알아주겠는가. 그러다 보면 결국은 위험한 위임통치론을 들고나올 수도 있다. 이를 경계해야 한다. 지금은 장기적이고 종합적으로 준비해야 한다. 내 「방략도」가 얼마나 중요한가.’
안창호가 잠시 이런 생각에 빠져있을 때 이대위가 박용만을 두둔하면서 입을 열었다.
“박 동지는 멕시코 한인들의 열악한 노동 사정을 돕기 위해 하와이 이주 대책을 놓고 미국 상공부 장관과 회담을 열었습니다. 『신한민보』 주필직까지 사임하고 애를 썼지요. 비록 성과는 없었지만 대신 하와이 노동 여건이 개선되고 한인사회가 안정화되어간다니 다행입니다. 그런데 멕시코 이주 노동자들의 인권 문제는 여전히 심각합니다.”
멕시코 문제는 안창호가 궁금했던 의제이기도 했다. “멕시코 한인 문제는 중앙총회에서 돕도록 나서봅시다. 박영순 동지의 이야기를 들어보니 그동안 북미국민회가 애를 많이 썼더군요. 그들에게 하와이 이주 자유권을 얻어 주기보다, 스스로 자신들의 열악한 노동조건을 해결해 나갈 수 있도록 계몽해 봅시다.”
11월 8일, 본회는 박용만을 중앙총회 외교원이자 헌장수정위원으로 위촉했다. 이날 결의를 통해서 중앙총회가 해외 한인의 대표기관임과 동시에 대한제국이 아니라 민주주의 체제인 대한민국으로 발흥한 것을 선언하였다. 그리고 운영자금 규정으로 중앙총회에 대한 지방총회의 의무금은 2백 달러로 정했다. 11월 20일에는 중앙총회 결성 결의문과 선포문을 채택하였다. 대한인국민회 중앙총회 발기 선포문은 총회에 참석한 3명, 안창호, 박용만, 박상하가 대의원 대표로 서명했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았다.
“우리는 나라가 없으니 우리의 단체를 무형 정부로 인정하고 자치제도를 실행하여 장래 국가건설에 공헌할 것이다. 지금 국내외를 막론하고 국권 회복을 위하여 살며 이를 위하여 죽으며 이를 위하여 일하는 단체는 오직 해외에 대한인국민회만 있을 뿐이다. 큰 것을 위하여 작은 것을 희생하며 마음을 한곳으로 모아 대한인국민회가 해외 한인의 자치기관이 되게 해야 살길을 찾을 것이다. 대한제국은 이미 망했으나 정신상 민주주의 국가는 바야흐로 발흥되며 대한인국민회가 중앙총회를 세우고 해외 한인을 대표하여 일하게 되었으니, 해외 한인의 최고기관으로 인정하고 자치제도를 실행하자. 각지에 있는 재외동포는 대한인국민회의 지도를 받을 의무가 있으며 대한인국민회는 동포에게 의무이행을 장려할 책임을 져야 할 것이다. (<신한민보>1912.11.20.)”
중앙총회장은 북미와 하와이에서 교차로 맡되 부회장도 교차 선발하기로 했다. 이에 따라 초대 중앙총회장 선발은 안창호에게 위임하였다. 안창호는 『신한민보』 사장 최정익을 제1대 총회장으로, 하와이 박상하를 부회장으로 추천하였고 모두의 동의를 얻었다. 1913년 대한인국민회 제2대 중앙총회장에는 하와이 윤병구, 부회장에는 북미 황사용을 선임했다. 지역 균형을 위해서 결정한 내규인 셈이다.
북미와 멕시코 지방회는 중앙총회 소속에 두었으나, 이대위가 북미지방회 총회장 자격을 위임받아 멕시코 한인 노동자의 인권 문제까지 해결해 나가면서 대한인국민회를 모범적 사례로 이끌었다.
대한인국민회 중앙총회는 1913년 7월 2일 헌장 제1조를 개정하여 대한인국민회가 대한국민을 기반으로 하는 자치정부임을 선포했다. 이대위 북미지방총회장은 이미 ‘한인 사회문제로 일본 영사의 간섭을 받지 않을 것’이라는 전보문을 미국 정부 국무장관 브라이언에게 보낸 바 있다. 이에 대해 브라이언 장관이 화답했다. ‘한인은 일본인이 아니다’라는 대한인국민회 총회장 전보를 받았다면서 앞으로 재미 한인에 관한 일은 일본 정부나 조선총독부 관리를 통하지 않고 대한인국민회와 직접 교섭한다는 내용을 선포했다. 이로써 미주에서는 대한인국민회가 사실상 한인 망명정부 기능을 수행할 수 있게 되었다. 대한인국민회가 한국을 대표하는 공적 단체로 인정받음으로써 한인 유학생들의 입국과 미국 입학이 수월해졌다. 국민회중앙총회는 클레어몬트 학생양성소를 기관 부설로 재창립했다. 미주에서 태어난 2세들에게 우리 말과 글을 가르치는 것을 교육 목표로 하였고, 안창호는 이 학교에 직접 찾아와 학생들에게 민족의 장래를 이야기하곤 했다.
(다음 화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