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장. 힘은 건전한 인격과 공고한 단결에서 #5/10

5화. 박용만과 하와이 순방

by 은명

5화. 박용만과 하와이 순방


대한인국민회 북미지방총회는 1914년 4월 6일 캘리포니아주 정부로부터 정식 사단법인 인가를 받았다. 중앙총회는 북미지방총회를 선두로 하와이와 시베리아 그리고 만주지방의 3개 지방총회와 긴밀한 연통망을 구축하고 체계를 세워나갔다. 미주 독립운동 단체를 하나로 통합하여 한인들의 권익을 위해 활동하는 자치 기구로 기능하게 된 것이다. 중앙총회 산하에 캘리포니아 클레어몬트 학생양성소, 네브라스카 소년병학교, 하와이 대조선국민군단 등 교육훈련기관이 소속되었다. 여기에 흥사단까지 설립되었다. 만주와 시베리아 국민회는 일본 제국주의의 영향력이 날로 커짐에 따라 어려움을 겪고 있었지만, 지역 조건과 사정에 따라 중앙총회의 방침을 수용하면서 지방회 조직을 늘려나갔다. 전 세계 116개가 넘는 지방회 조직이 생겨났다.

중앙총회는 1915년 2월~4월까지 총회를 개최하여 제3대 총회장과 부회장을 선출하고 이를 전 지역으로 공포했다. 총회장에 안창호, 부회장에 박용만이 뽑혔다. 안창호는 총회장 취임을 수락했다. 6월 23일 총회장과 부회장의 취임식이 개최되었다. 박용만은 취임식에 참석하기 위하여 하와이에서 건너왔다.


취임식이 있기 전날 샌프란시스코 회관에 제3대 중앙총회 주요 인사들이 속속 모였다.

안창호는 이들을 반겼다. “동지들, 반갑습니다. 박용만 동지는 멀리 하와이에서 일부러 오셨구려. 고맙소. 늘 보고 싶었다오.”

박용만도 쾌활한 목소리로 화답했다. “도산께서 중앙총회장직을 어깨에 짊어지시니 제가 구경만 할 수는 없지요. 미력이나마 세계 통일기관으로 성장한 국민회를 위해 열심히 해 보렵니다.”

“하와이 국민회와 하나가 됩시다. 그래서 통일된 힘을 보여줍시다. 참, 제 옆에 곽림대 총무를 소개합니다. 곽 동지는 청년학우회를 함께 발기한 동지요. 이번에 흥사단 약법을 같이 만들었다오.” 안창호는 옆에 앉아 있는 곽림대를 소개했다.

곽림대가 일어서서 박용만과 이대위에게 허리 굽혀 인사했다. “105인 사건으로 2년 만에 풀려나 곧장 이리로 왔습니다. 전공은 전기공학이고 관심 분야는 군사학이죠. 도산께 꼭 붙들렸습니다.”

안창호가 자랑스럽게 인사를 덧붙였다. “안중근이 곽 동지의 처조카랍니다. 여기, 클레어몬트학생양성소 주임을 맡겼지요. 국어를 가르칩니다.”

박용만도 일어나 곽림대에게 악수를 청하며 반겼다. “곽 동지의 인상이 참 좋소. 도산께서 자랑하실만하오. 게다가 안중근 의사가 처조카라니 더 가깝게 느껴집니다.”

“고맙습니다. 사력을 다해 중앙총회 총무직에 임하겠습니다.” 곽림대가 박용만의 손을 잡고 미소로 화답했다.

안창호가 박용만에게 물었다. “하와이 섬들은 어떻게 관리하고 있소?”

“각 섬에 국민회 경찰부장을 두었습니다. 법정도 국민회 경찰 조사와 초심을 법정 행사로 인정하고 있습니다.” 박용만은 자신감 넘치는 소리로 말했다.

“오, 자체 경찰권 행사라...! 대단하오. 한인들이 억울할 일은 없어야 하니 잘 된 것이오. 만주나 시베리아도 국민회 자치제도가 확립되어야 할 터인데.... 애국금은 잘 걷히오? 자치제도의 재정 말이오.” 안창호가 물었다.

“교민들 신뢰로 재정이 안정되어 대조선국민군단과 이에 딸린 사관학교를 거의 동시에 창설(1914)할 수 있었습니다. 작년 4월에 하와이 군사령부의 설립 인가를 받았습니다.” 박용만은 소상하게 보고했다.

“참, 대단하시오. 훌륭하십니다.” 모두 박수를 보냈다.

안창호가 신중하게 말했다. “국민 애국금 제도를 정착해야 하오. 그래야만 독립운동 사업을 벌일 수 있을 테니까요.”

“내친걸음으로 총회관 건립과 한인중앙학원을 건축하려고 하는데 훼방꾼이 나타나서 휘젓고 있지요. 결국, 신문사와 농상주식회사 재산은 모두 지방총회로 넘겼습니다.” 박용만이 체념하듯이 말했다.

모두 다 놀라서 눈을 동그랗게 뜨고 이구동성으로 외쳤다.

“누구요? 훼방꾼이?” 다들 이렇게 말하면서도 누구인지 짐작하는 눈치였다.

안창호도 짐작이 되었지만 이름을 거명하지는 않았다. “어쩌겠소. 지켜봅시다. 애국하는 마음이야 다 같을 거요.”

박용만은 실의에 빠진 듯했다. “그분과 의형제를 결의한 과거가 있지만, 그 일도 제가 잘못 판단한 것이고, 하와이국민회를 쉽게 넘겨준 일도 제 잘못이고, 모두 다 제 탓입니다. 엎친 데 덮친다고 일본이 미 국무성에 대조선국민군단의 군사훈련을 중지하라고 압력을 넣는 바람에 미국이 승복했답니다. 조만간 해산명령이 떨어지겠지요. 공공연하게 알려진 미일 간 가쓰라태프트 밀약 때문인가 봅니다.”

안창호는 국제정세가 어려울 때 이승만과 박용만이 대립하는 것은 일을 더 어렵게 만들 뿐이라고 생각했다. “중앙총회 일정이 끝나면 내가 하와이로 가서 그분을 만나보리다.” 안창호도 힘이 빠졌다.

홍언이 분위기를 바꾸려고 밝은 표정으로 이야기를 꺼냈다. “이건 조금 다른 이야기인데, 여기 이대위 선배께서 발명한 한글타자식자기로 『신한민보』는 날개를 달았습니다. 실험을 끝내고 읽기 쉬운 신식문자로 인쇄를 시작했답니다.”

모두 손뼉을 치며 말했다. “정말 대단합니다. 글자를 읽기가 얼마나 쉬워졌는지 모르오. 중앙총회가 잘 되고 있다는 징표입니다.”

박용만이 웃으며 말했다. “한글 타자기가 하와이에도 곧 건너오겠지요? 『신한국보』 를 1913년부터 『국민보』로 개칭했답니다. 아무래도 국가보다는 국민이 우선이니...!”

이대위가 입을 열었다. “사용해 보고 보완해서 하와이에도 보내야죠. 현재는 그 타자기로 『한국통사』를 치는 중입니다. 상해에서 박은식 선생이 『한국통사』를 출간했는데, 한문으로 되어있어 읽기가 쉽지 않아 제가 타자기 실험을 하는 중입니다. 올해 9월 2일 자에 첫 장이 나갑니다.”

“오, 박은식 선생께서 『한국통사』를 출간하셨군요. 이대위 동지의 한글 번역본을 어서 보고 싶습니다. 박은식 선생은 신규식 동지와 3월에 신한혁명당을 조직하셨다지요?”

박용만이 결의에 찬 목소리로 말했다. “신한혁명당 동지들을 꼭 한번 만나보고 싶습니다.”

안창호가 동의했다. “나도 그들이 보고 싶습니다. 우리가 흩어져 있는 동지들의 근황을 알 수 있는 것은 신문의 힘입니다.”

홍언이 신문사로 들어온 소식을 전했다. “참, 러시아가 전시계엄령을 내리고 모든 한인 단체를 강제 해산시키고 있답니다. 시베리아총회도 강제해산을 눈앞에 두고 있습니다. 이 소식도 『대한인정교보』를 통해 알게 됐지요.”

안창호는 이강과 정재관이 무탈하게 위기를 벗어나기를 바랐다. ‘미주로 다시 와도 될 텐데.... 여기도 할 일이 태산이니. 소식을 기다려 보기로 하자.’

곽림대가 홍언이 전한 뉴스에 토를 달았다. “말이 좋아 전시계엄령이지요. 사실은 러시아와 일본이 다시 연합국 내에서 동맹을 맺은 것입니다. 조선을 뭉개려는 일본의 압력일 테지요. 러시아도 미국도 다 일본과 동맹이라니. 일본의 외교 전술에 치가 떨립니다.”

안창호는 화제를 돌렸다. “한글 식자기가 시험 인쇄 중이라면 언제쯤 상품화되겠습니까? 기금을 모아 중앙총회 이름으로 시베리아와 만주 등에 보내면 좋겠습니다.”

곽림대가 생각난 듯 말했다. “김종림 군이 식자기 보급을 위해 후원하겠다고 이미 약속했답니다.”

“아, 김종림 동지의 벼농사가 대풍을 이뤄야 하는데.” 모두 이구동성으로 말했다.


1915년 6월 23일, 취임식에서 중앙총회장 안창호는 다음과 같은 취지의 연설을 했다. “단결하면 생존하고, 아니면 쇠폐를 면치 못한다. 이것이 흥망성쇠의 원리요, 역사발전의 핵심이다. 세계는 지금 군국주의로 무장한 제국들이 이해관계로 엉켜 서로 전쟁을 하고 있다. 일본은 이때를 틈타 제국의 야망을 키우면서 아시아를 농락하고 있다. 우리 민족은 만주, 연해주, 시베리아에서 각기 단체를 설립하여 광복 투쟁을 하고 있으나 단결이 쉽지 않다. 다행히도 단결할 수 있는 단체로 유일하게 남아 있는 것은, 미주 국민회 하나뿐이다. (중략) 국민회는 중앙총회로 힘을 모아야 한다. (이하 생략)” 홍언은 이 연설의 요지를 『신한민보』에 논설로 실었다(1915.7.8). 홍언은 도산이 직접 지도자로 나서주는 일이 감사했다.

안창호가 공립협회 시절부터 생각해 온 세계 통일연합기관의 설치는 대한인국민회 중앙총회를 발족함으로써 그 목표에 한발 다가섰다. 통일연합 최고기관은 무형 정부의 기능을 수행할 수 있어야 한다.


8월 25일, 총회장 안창호는 중앙총회 업무를 이대위와 황사용에게 권한 위임한 뒤 박용만 부회장과 함께 ‘몽골리아’ 선편으로 하와이로 떠났다. 국민회 중앙총회장으로서의 공식 순방이었다. 하와이 국민회를 돌아보고 이승만을 만나서 박용만과의 분규를 중재하기 위해 나선 길이었다. 물론 출발 전에 이승만에게 전보를 쳤다. 그러나 이승만은 8월 31일 안창호 도착 3일 전에 타지로 떠나버렸다. 박용만은 중앙총회장 도산이 하와이로 온다는 소식을 듣고 화를 피하려는 속셈일 것이라고 했다. 그러나 안창호는 그렇게 믿지 않았다. ‘그분이 나를 피할 이유가 없다.’

박용만의 말에 의하면, 이승만을 하와이로 건너오게끔 권유한 사람은 바로 박용만 자신이었다. 그러나 1913년 이승만은 하와이로 오자마자 주도권을 잡기 위해 박용만을 멀리했다. 박용만의 노력으로 1915년 1월에 하와이 국민회총회관 건립에 치중하고 있을 때, 회계분규가 일어나 총회장 김종학을 해임하고 그를 공금횡령으로 미국 법정에 고발하는 사건이 터졌다. 이를 빌미로 이승만은 총회관 건립과 한인중앙학원 건축부지의 소유주를 자신의 명의로 하겠다고 선언했다. 이에 지방총회 4인 조사단이 구성되어 사건을 조사하는 과정에서 이승만의 자금 비리와 횡령 사실이 드러났다. 조사단은 이를 법정에 고발했다. 그러자 이승만 측은 오히려 조사단을 불순분자들이라며 살인미수 혐의로 경찰에다 고발했다. 김종학은 3개월 만에 무죄 판결을 받고 풀려났으나, 그 후로 화를 못 이겨 병이 났다.


9월 2일, 하와이지방총회장 정원명과 임원들 그리고 하와이 교민들이 나와서 중앙총회장 안창호를 반기고 환영했다. 이들은 3일간 연속으로 환영연설회를 개최하였다. 9월 12일, 안창호는 박용만과 함께 하와이 근린의 여러 섬을 돌아보고, 오하우섬에 설립된 ‘산너머 병학교’라는 별칭을 가진 대조선국민군단을 방문했다.

박용만이 말을 걸었다. “도산이 오시니 하와이가 활기를 되찾은 느낌입니다. 모두 좋아하고 있습니다. 인기가 참 대단하십니다. 하하.”

안창호는 쑥스러워 화제를 돌렸다. “아후이마누 마을이 아름답군요. 미일 훼방만 아니면 여기가 하와이 독립군 근거지가 될 수 있었을 텐데.... 곧 해산령이라니 정말 아쉽소.”

박용만이 회상했다. “작년 처음 사열식을 할 때만 해도 정말 온마을 한인들의 축제나 다름이 없었답니다. 생업에 종사하면서도 훈련받기를 즐겨 했지요. 나라를 구하는 일이니 모두 뿌듯하게 여겼습니다.”

“‘산너머 병학교’란 별칭이 아주 맘에 듭니다. 박 동지가 교장이겠구려?”

“예, 군단장에 교장까지 다 하고 있죠. 빨리 다음 후배를 찾아야 할 텐데.... 이곳은 파인애플 농장이 있던 곳인데 사관학교를 세운다고 하니까 박종수란 분이 나서서 1500에이커를 기부했답니다.”

“오, 훌륭하신 분이오. 둔전병으로 파인애플 농사를 지으며 군사학 학습과 훈련을 받는다! 참으로 훌륭하오. 나도 밀산 개척지를 둔전병제 모범 마을로 후원하고 싶었소. 홍범도 부대가 밀산으로 가면 개업, 개병의 모범촌이 될 거라고 예상했소.”

박용만은 안창호의 주도면밀한 미래 계획에 이미 공감하고 있던 터였다. “사실은 멕시코 한인노동자 문제도 하와이로 이주시키기보다는 오히려 둔전병을 일으켜 스스로 의식성장을 시도해야 할 듯합니다.”

“오, 맞소. 나도 같은 생각이오. 하와이 일터로 가는 줄 알고 이민선을 탔다가 속아서 멕시코라니요. 훨씬 더 열악한 노동조건으로 에네켄 농장에 고용되었지요. 이주한 지 10년이 넘었으니 이젠 질서를 찾고 살길이 안정될 때도 되었는데....” 안창호가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말했다.

박용만이 말을 받았다. “지도자가 없는 까닭이지요. 말 잘 듣는 순한 천성을 가지고 있는 우리 동포들이 아닙니까? 오죽하면 국민회 북미지방총회가 멕시코 문제를 안고 가겠습니까?”

안창호는 박용만을 ‘참으로 신뢰가 가는 믿음직한 지도자’라고 생각했다.

“내 조만간 멕시코에 다녀올까 하는데, 같이 가시겠소?” 안창호가 박용만의 의중을 떠보았다.

박용만은 다른 생각이 있는 듯했다. “이승만 씨가 나를 그냥 놔둘 것 같지는 않고, 그래서 저는 상해나 북경을 다녀올까 합니다. 신규식, 신채호 동지와 박은식 선생을 만나보고 싶습니다.”

안창호는 박용만이 외롭게 느껴졌다. “신규식 동지는 신해년 중국혁명에 참여하고 회원 300명과 동제사를 설립했다지요? 1913년에는 박달학원을 설립해 구미 유학을 알선하고 직업지도를 한다고 보고받았소. 이론가 조소앙과 문일평, 신채호 등이 활동하고 있고. 그들이 박은식 선생을 중심으로 신한혁명당을 조직하고 고종을 당수로 모시려고 했다지요?”

박용만은 안창호가 중국 독립운동 진영을 꿰뚫고 있음에 감탄했다. 안창호가 계속 말을 이었다. “그뿐만 아니라 대동보국단을 상해에 둔다고요? 청년들이 공감할까요?” 안창호는 걱정이 앞섰다. ‘우리 청년들이 세계정세를 정확히 알고 있어야 한다. 그래야만 우리 독립운동의 방향이 명확해진다.’

박용만이 대답했다. “구심점은 박은식 선생이지만 실제 독립운동 노선은 대동보국단이라니, 저도 의구심이 듭니다. 대동보국단은 미주에서 이미 미국식 진보성향으로 통합된 이념이 아닙니까? 지금은 대동단결이 필요한 때. 공화제와 군주제가 대립각을 세울 때가 아니지요.”

“박 동지가 상해로 가서 그분들을 만나게 된다면...” 안창호는 잠시 망설이다가 말을 멈췄다. ‘지금은 다른 의견을 말할 때가 아니다. 박용만이 가서 그들을 직접 만나고 내외 정세 변화를 통찰할 수 있어야만 한다.’

“.....” 박용만은 가만히 안창호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안창호가 다시 말을 이었다. “중국이 민국혁명에 성공했다지만 앞으로 지켜봐야 할 거요. 내부 진통으로 인해 국가 안정을 도모해서 일본과 서구의 제국주의 세력을 몰아내려면 갈 길이 멀 것이오.”

안창호는 그래서 ‘국민 기초훈련 운동’을 병행해야 한다고 역설하려다가 입을 다물었다. ‘박용만은 아직 양계초의 강자 논리를 벗어나지 못했다. 권력 집중, 위로부터의 힘을 너무 믿고 있다. 혁명은 아래로부터, 기초부터 쌓아 올려져야만 성공할 수 있다. 흥사단이 그래서 필요하다...!’

“그나저나 이번 하와이 방문에선 그 양반을 만나지 못할 것 같지요?” 안창호는 체념하듯 말했다.

“아마 그럴 것입니다.” 박용만도 그렇게 생각했다.


10월~11월, 두 달 가까이 두 사람의 하와이섬 순행은 순조롭게 진행되었다. 한인들은 안창호의 연설을 듣기 위해 모였다. 안창호는 ‘애국 사상과 민족주의 정신 고취’를 주제로 연설했다. 반응은 뜨거웠다.

12월 10일, 안창호가 샌프란시스코로 돌아가기 위해 호놀룰루 항에 도착했다. 그런데 충격적인 소식을 들었다. 분노한 김종학이 9월 14일 이승만과의 법정 다툼 과정에서 권총으로 자살을 기도했다는 것이다. 박용만은 자기가 김종학을 방문할 것이니 그냥 가라며 안창호의 등을 떠밀었다.

안창호는 12월 10일 출발하여 12월 21일 샌프란시스코로 돌아왔다. 4개월 여정이었다. ‘이승만. 그는 자신이 최고라는 믿음에 타인을 포용하지 못하는 사람이다. 그래도 성심을 다해 보자.’ 김종학 소식에 충격을 받은 안창호는 태평양을 지나오면서 깊은 생각에 빠졌다.


(다음 화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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