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장. 힘은 건전한 인격과 공고한 단결에서 #6/10

6화. 세계 한인의 대동단결 호소

by 은명

6화. 세계 한인의 대동단결 호소


1915년 12월 21일. 안창호가 샌프란시스코에 도착하니 국민회 동지들이 환영을 나와 있었다. 환영식에서 하와이 순방 소감을 말했다. 하와이에서 벌어지고 있는 계파 갈등과 분규 소식을 전하면서 안창호는 마음이 편치 않았다. 안창호는 우리 민족은 가족, 이웃, 사회 공동체를 중요하게 여겨왔으며 공동체의 신성단결은 개인의 건전인격이 전제되어야 한다고 말했다. 안창호는 숨을 크게 들이쉬고는 ‘건전한 개인주의는 인류 행복의 기초’라고 다시 한번 강조하며 말을 마쳤다. 강영대가 이를 받아 적었다.


안창호는 다음 날 리버사이드 집으로 돌아왔다. 해 묵은 치통이 다시 안창호를 괴롭혔다. 그래도 겨우 한 살배기 어린 딸 수산을 안아 볼 수 있어 행복했다. 안수산이라는 예쁜 이름은 홍언이 지어 주었다.

안창호는 집에 도착해 있던 편지를 읽었다. 양기탁이 유하현 백서농장에서 보낸 편지였다. 반가웠다. 마침 국내와 만주 소식이 궁금하던 차였다. 양기탁(1871~1938)은 『대한매일신보』를 발행하면서 국채보상지원금총합소를 설치하고 자금 모금에 앞장섰다. 그는 이토 히로부미에게 눈엣가시 같은 존재였다. 이토 히로부미는 황무지개척권을 요구했고 양기탁은 『대한매일신보』를 통해 이에 반대하는 보안회 운동을 했다. 1910년 4월, 양기탁은 안창호 망명을 지지하면서 만주 무관학교와 기지 개척을 약속했다. 국치 후 이에 대한 군자금 모금 활동 중 1911년 1월 보안법 혐의로 구속되어 2년 징역을 살고 있었는데, 다시 105인 사건 주모자 혐의로 가중 처벌 6년 형을 받았다. 양기탁은 1915년 2월 가석방되어 압록강을 건넜고, 7월 단동에서 신채호를 만났다. 신채호는 1915년 7월, 국내 영주 풍기에서 대한광복회가 결성되자 박상진과 함께 단동에 거점을 마련하고 군자금 모금과 의열 투쟁 지원에 나섰다. 대한광복회는 복벽파와 공화파를 통합하여 공화주의 이념을 표방한 국내 민족운동단체다. 신채호를 만난 양기탁도 1916년 7월 박상진을 통해 국내와 연계된 독립운동을 모색했다. 그러나 양기탁은 일본 밀정들을 피하기 어려운 처지였다. 그는 10월경 북경으로 피신했다가 서간도 신흥학교가 있는 곳으로 망명하여 김동삼을 만나 백서농장에 합류했다. 양기탁은 신민회 기지 개척 총괄자로서 각처 독립운동 단체 통합을 추진하고 있었다. 양기탁은 이와 관련된 경위를 안창호에게 편지로 전했다.

안창호는 공화주의 이념을 비롯해 독립운동의 방법론적 뜻을 같이하는 양기탁을 대선배로서 존경했다. 공화국 건설과 노선 통합운동. 안창호에게 양기탁은 자신의 몸을 아끼지 않고 솔선수범하는 독립혁명 영수였다. 안창호는 양기탁의 편지에 고무되었다.


1916년. 공립협회가 하와이합성협회와 통합하여 국민회로 거듭났던 2월 1일 창립기념일이 다가오고 있었다. 총회장 안창호는 하와이를 순방하면서 상처를 안고 돌아왔고 이로 인해 병이 났다. 하와이는 미주 한인사회 형성의 뿌리나 다름없었다. 거리는 많이 떨어져 있어도 오가는 한인들에게는 친하게 지내는 이웃과 같았다. 그런 하와이 한인사회가 분규와 갈등에 휩싸인 것이다. 해결의 기미도 보이지 않았다. 안창호는 하와이를 위해 ‘국민회 통합’ 기념일을 챙겨야 한다며 일어섰다. 로스앤젤레스지방회 축하식장에서 연설할 내용을 머릿속에 정리하며 회관으로 갔다.

안창호는 회관에서 황사용과 강영소를 만났다. 두 사람은 LA 국민회 지방총회의 알파요 오메가 같은 존재라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어찌 보면 북미지방총회는 황사용이 길을 열었고 이제 강영소가 이끌어 가고 있었다.

황사용(1881~1964)은 공립협회 시절부터 함께 해 온 후배요 동지다. 황사용은 공립협회가 국민회로 개편되어 연해주로 파견된 초대총회장 정재관의 후임이었다. 황사용 국민회 북미총회장은 1909년 4월부터 1910년 1월까지 멕시코에 파견되어 다녀왔다. 멕시코 이민자들의 참상을 조사하고 국민회 메리다지방회를 설립하고 돌아온 후에는 샌프란시스코에 국민회관도 마련했다. 1910년 5월, 대한인국민회로 개편된 이후로 1대 북미지방총회장으로 활약했다. 황사용은 1912년 미국 남감리교회 전도사로 활동, 1917년에 댈러스의 서던감리교대학을 졸업했다. 1918년부터 1926년까지 호놀룰루한인감리교회 담임목사로 시무하고, 다시 LA로 돌아와 한인감리교회 목사로 지낸다. 강영소는 1914년 이래 북미지방총회에서 이대위 총회장을 보좌해 오다가 1916년 1월 20일, 이대위 후임으로 북미지방총회장으로 선출되었다.


안창호는 두 사람을 보자마자 기분이 좋아졌다. 몸 상태가 좋지 않았지만 마치 비타민을 먹은 것처럼 활력이 되살아났다.

“오, 동지들! 반갑소. 무탈하게 잘들 지내셨소? 나는 하와이 방문 이후로 다소 피폐해진 내 몸을 위해 수련하는 데에 공들였다오.”

황사용이 먼저 입을 열었다. “형님, 저는 신학에 빠져 열심히 지력을 키우고 있습니다. 미래에 먹고 살 일을 위해서이기도 합니다.”

“오, 댈러스에 있는 감리교신학대학이라고 했소?”

“예. 내년에 졸업하면 발령을 낸다고 합니다. 어디든 명령에 따라야겠지요.”

“동생 황사선 군도 잘 있소? 어떻게 지낸답니까?”

“여전히 북미총회 부회장이지요. 이대위 형님 지도를 받으며 교회와 교육 활동으로 열심입니다. 내일 기념식에 나타날 것입니다.” 황사용이 말했다.

강영소가 대화를 경청하다가 한마디 거들었다. “황사선 군이 이번 북미총회장 자리를 맡아주고 제가 부회장을 했어도 좋았는데....”

황사용이 고개를 저으며 강영소를 보고 말했다. “아닙니다. 동생은 세탁업을 펼쳐 놓고 게을리할 수 없나 봅디다. 부인이 인계할 수 있도록 기초를 다져야 한답니다. 그래야 자신이 하고 싶은 민족운동을 할 수 있다고. 대신 이대위 형님과 아우님을 열심히 도울 것이라고 했습니다.”

안창호가 이들의 말을 흐뭇하게 들으면서 생각했다. ‘역시 흥사단 최고 회원들이군. 맡은 일에 충실한 청년들. 황사선은 105인 사건으로 맘고생이 많았었지.’

“강영소 군! 아들은 잘 자라고 있소? 흥사단 창립할 때 아들 오산이를 낳았다고 했지요? 강오산. 내 그림자 같은 친구 이강의 별칭이 오산인데. 태명을 그대로 이름으로 지었소?”

안창호는 흥사단 동맹수련회 장소로 활용된 강영소의 집을 드나들며 부인의 태기를 보고 그렇게 태명을 지어주었다. 홍언이 옆에 있다가 ‘형님이 가장 그리워하는 사람, 이강 형님. 그분의 아호가 오산이라고....’ 강영소는 부친 강명화의 의견을 물어보지도 않고 아들의 이름을 정했다.

“네, 잘 크고 있습니다. 커서 어느 곳에서 어떻게 살든지 나라를 위한 일꾼이 되길 바랄 뿐입니다. 오산 선생의 민족혼을 이어받으면 좋겠습니다.”

“하하. 강영소 군이 그렇게 말해주니 내 친구 오산이 더욱 그립소. 시베리아 사정이 좋지 않다고 들었는데 어떻게 지내고 있을지....”

강영소는 안창호의 젖은 눈가를 바라보았다. “선생님이 약해지시면 우리는 의지할 데가 없어 난감해집니다. 고향을 등진 타국생활이라는 게 이토록 힘겨운 일이군요.”

황사용이 눈을 감고 기도하듯 말했다. “그래도 우리는 외로움을 이겨내고 서로 의지하며, 기도하면서 살아가야 합니다. 무실역행하면서요.”

안창호가 한동안 눈을 감고 말이 없자 두 사람도 잠시 침묵을 지켰다. ‘그렇다. 마음의 평정은 기도이다.’

안창호는 다시 현실로 돌아왔다. “나는 내일 국민회 창립기념일에 ‘세계 한인의 대동단결’을 주제로 연설하겠소. 하와이국민회가 저렇게 분열되는 것을 지켜만 볼 수는 없지 않소. 국민회가 어떻게 탄생했는데. 시베리아와 만주 사정이 곤경에 처해 가는데 미주가 분열되면 통합된 모든 것은 허사로 돌아갑니다.”

황사용이 말했다. “국민회의 첫 업적이라면 멕시코 한인 유민을 포용하고 단체를 만들어 준 일입니다. 멕시코 국민회는 북미총회만 바라보고 있을지도 모릅니다. 도산의 뜻이 잘 전달되면 좋겠습니다.”

“오, 맞소. 그래서 국민회 창립기념일을 지키자는 것입니다. 황 동지가 멕시코 메리다지방회를 설립했었지요. 내년에 같이 멕시코 순방을 다녀옵시다.”

“네. 시간을 내도록 하겠습니다. 그렇지않아도 멕시코로 계속 유입되고 있는 한인 노동자들의 생활에 문제가 많은 것 같습니다, 생활 개혁과 계몽, 단결의 중요성을 일깨워야 합니다.” 황사용이 힘을 주어 말했다.

“국민회지방회 조직과 동시에 흥사단 훈련기관도 조직해 봅시다.” 안창호는 황사용과 멕시코 순방을 위한 계획을 짜야겠다고 결정했다.

다음 날, 안창호는 ‘세계 한인의 대동단결을 위해 국민회가 그 동력이 되자.’를 핵심 주제로 국민회 창립 기념 연설을 했다. 내용은 강영소가 받아 적었다. 이날 모인 사람들은 안창호가 발의한 클레어몬트학생양성소 유년부 하기 강습소 설치를 논의했다. 무럭무럭 자라고 있는 한인 2세들에게 국어와 역사를 가르치기 위함이었다. 학생양성소는 4월 27일에 발기대회를 열었다. 그리고 8월 25일 하기 국어강습소가 문을 열었다. 안창호도 틈틈이 역사를 가르쳤다.


해가 바뀌고 1917년 1월 10일. 안창호는 5년간 키워 온 북미실업주식회사 창립식을 흥사단 본부 건물에서 개최하였다. 10인 발기인으로 1912년 1월 29일에 시작한 북미실업주식회사가 각고의 노력 끝에 창립식을 하게 된 것이다. 자본총액이 5만 달러에 달하자, 열심히 주식에 참여하고 있는 한인들에게 자신감을 주고 이를 분발시킬 겸 체제를 정비하고 공개할 필요가 있었다.

창립식은 축제를 방불케 했다. 임준기가 사장으로 추대되었고 총무에 송종익, 재무에 정봉규가 선발되었다. 이사원과 감사원을 두고 집행해 나가도록 했다. 규약을 정하고 그 목적을 “해외에 거주하는 우리 대한 남녀노소가 크게 합동하여 거대한 자본을 세워 농상공 간에 가능하고 합당한 사업을 실행하여 실업을 확장함”으로 공표했다.

지난 5년 동안 안창호는 투자자 모집을 위해 한인농장을 순회하며 동포들과 만났다. 총회장 안창호가 멕시코를 순방하고 돌아온 후 1918년에는 자본총액 5만 달러를 넘어섰고 매주 10달러 5천 주가 모였다. 특히 멕시코 한인 255명이 주주가 되었다. 1919년 3월 당시에는 자본총액이 8만 달러를 넘어섰고 회사 총자본이 20만 달러로 증가한다. 순이익 3천원으로 임시정부 국채를 매수하고 일본 상품 배척 운동과 물산장려 운동을 해나갔다. 안창호는 자본금이 10만 달러에 이르면 회사를 중국으로 이전하여 흥업사로 개칭하고 한중 양국의 민간자본을 모집해 은행을 설치하려는 계획도 하고 있었다. 그가 늘 강조해 온 정직과 신용의 가치가 한인사회에서 자본의 덕목으로 크게 자리 잡게 된 것이다. 안창호가 설계한 북미실업주식회사는 세계로 흩어진 한인들의 경제 의식을 고양 시켜 장차 독립에 대비하기 위한 큰 전략으로 계획된 것이다. 안창호는 3.1 민중항쟁 소식을 접하고 재정 부담에 대한 자신감을 가지고 대한인국민회 총회장 포고문을 낸 뒤 상해로 이동한다. 안창호는 북미실업주식회사가 대한인국민회의 공공 주식회사로서 ‘국민적 의무를 지키고 대한민국임시정부의 명령을 받들기를 자청하는’ 경제 공기관이길 희망했다. 이 회사는 1929년 11월까지 계속 운영된다.


1917년 5월 27일, 안창호와 이혜련은 둘째 딸 수라를 낳았다. 두 사람에게서 어느덧 아들 둘, 딸 둘이 태어났다. 필립이 12살, 필선이 5살, 수산이 2살이었다. 아이들 모두 건강했다. 안창호는 육아와 살림에 관한 전권을 혜련에게 위임하고, 본인은 캘리포니아 일대를 유랑하며 집을 떠나 살았다. 나랏일에 바쁘다고는 하지만 가족을 돌보지 못하는 미안함과 죄책감에 아내 혜련에게는 늘 ‘사랑’이라는 말을 달고 살았다. 혜련은 훌륭한 여성이었다. 독립운동가의 아내이자 아이들의 어머니, 그리고 동지들의 조력자로서 그녀의 자세는 흐트러짐이 없었다. 두 사람의 사랑은 신뢰와 존경의 완전체였다.

수라가 태어나자 안창호는 다시 집을 나서서 캘리포니아 중부 새크라멘토 일대를 순방했다. 트레이시, 다뉴바, 멘티카, 스톡턴 등. 최근에는 윌로스시 일대 한인농장을 자주 방문했다. 벼농사에 도전하는 한인들의 수가 많이 늘어 있었다. 트레이시에는 신달윤의 벼 농장이 있었고 프린스톤 벼 농장에는 김종림이 있었다. 두 사람은 재주가 뛰어나 농사에 귀재들이었다. 두 사람 모두 이민 초기 공립협회 동지들이자 친동생 같은 존재이기도 했다. 이들은 국민회 새크라멘토지방회 임원을 맡고 있었다. 안창호는 이들을 만나면 마음이 편해졌다. 깊은 속 이야기도 꺼낼 수 있었다. 이들은 안창호의 절대 지지자들이었다.


이곳을 돌아다니다가 이강의 편지를 받았다. 이강과 정재관은 시베리아에서 쫓겨 나와 다시 블라디보스토크로 이동해 활동하고 있었다. 이강은 연해주 사정을 상세히 전하면서 이갑과 이상설의 사망 소식도 전했다. 이상설은 권업회 활동을 하던 중 1914년 이갑 등과 대한광복군 정부 조직에 앞장섰고, 1915년 신규식의 상해 신한혁명단 본부장에 추대되어 고종의 망명정부를 구상했다. 이상설은 끝내 복벽주의를 극복하지 못했다. 그는 병석에 누웠고 결국 1917년 4월 1일 우수리스크 대년병원에서 폐질환으로 순국하였다. 그의 나이 47세였다.

이갑은 병중에 안창호의 초청으로 뉴욕까지 왔다가 입국불허로 다시 치타로 돌아갔다. 그 후 이강의 도움을 받아 국민회시베리아 2대 총회장 소임을 하다가 목릉으로 이주하여 안정근의 우거지에서 6년간 요양 생활을 했다. 부인과 딸 정희가 와서 간호했다. 1914년 목릉 지방에 한파가 닥쳐 2월에 우수리스크로 이주하였고, 그곳에서 이상설과 재회했다. 이갑은 이상설의 타계 소식을 듣고 본인의 죽음을 예감했다. 그리고 같은 해 1917년 6월 13일 타계했다. 그의 나이 40세였다. 안창호는 이갑의 사망 소식에 가슴이 무너져 내렸다.

이강의 소식에 의하면, 신민회 지도급 인사 이동휘와 이동녕도 블라디보스토크에서 권업회 활동을 하고 있었다. 이동녕은 105인 사건 이전에 서간도로 이주하였고, 이회영, 이상룡과 결합했다가 1913년에 블라디보스토크로 이동했다. 이동휘는 105인 사건으로 1년간 대무의도로 유배되었다가 북간도로 탈출했다. 북간도에서 간도국민회를 결성했고 나자구무관학교를 설립했다가 밀정들에게 쫓겨 1915년 블라디보스토크로 망명했다. 이동휘는 정재관을 만나 이동녕, 이상설 등과 권업회에서 활동하였다. 연해주 정착 50주년을 맞아 대한광복군 정부를 조직하던 중, 밀정들의 간계로 러시아 당국에 체포되었다가 풀려났다. 대한광복군 정부는 국민회 정재관과 권업회 이종호의 통합 작품이라고 할 수 있었다. 모두 신민회 인사들이었다. 이들은 신민회 결의를 실천하는 데 주력했다. 대한광복군 정부는 1917년 5월에 고려국민회 즉 전로한족중앙총회로 발전한다.


안창호는 이갑과 이상설을 애도하며 추도회를 열었다. 또 블라디보스토크에서 결집한 신민회 동지 선배들의 건강과 무고를 빌었다. ‘신민회는 각처에서 대동단결의 모범이 되고 있다.’

1917년 7월, 안창호는 샌프란시스코 회관에서 총회 부회장 박용만의 서신을 접수했다. 하와이 방문 때 박용만은 박은식 선생과 신채호, 신규식을 만나보러 중국을 다녀오겠다고 했었다. 서신 내용은 ‘대동단결선언과 찬동취지서’였다. 상해발 ‘대동단결선언’은 해외 독립운동단체들을 통합하는 최고기구를 조직하기 위해서 민족대회를 소집하고자 하는데, 이에 찬동하는지 여부를 묻는 내용이었다. 안창호는 등기우편을 총회장 책상 서랍에 넣어 두었다. 취지는 좋으나 검토해야 할 사항이 많다고 생각했다. 안창호는 멕시코를 다녀와서 다시 검토하기로 했다.

안창호는 새크라멘토에서 멕시코 여행권을 받았다. 그리고 떠나기 전에 가족사진을 찍었다. 둘째 딸 수라는 5개월이 채 안 된 갓난아기였다. 안창호는 가족사진을 찍을 때만 아빠요, 남편 역할을 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자 가슴 한구석이 시렸다. 가족을 위한 희생과 고난은 전적으로 혜련의 몫이었다. ‘혜련은 가족을 위해 아무것도 해주지 못하는 이 미안한 마음을 덤덤하게 받아들이고 있다. 찍어 두자. 가족사진은 가족이 공유하는 기억이고 삶의 흔적이다.’


(다음 화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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