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장.힘은 건전한 인격과 공고한 단결에서 #8 (상)

8화. 멕시코 사정과 한인 지도자들 (상)

by 은명

8화. 멕시코 사정과 한인 지도자들 (상)


다음 날, 안창호는 동료들과 작별하고 철도를 이용해 베라크루스로 향했다. 베라크루스는 사방으로 고지대와 저지대로 연결되는 교통의 요지이다. 그곳에서 코앗사코알코스로 이동하여 국민회 회관을 찾아갈 예정이었다. 코앗사코알코스 지방회는 1917년 6월에 설립되었다. 베라크루스에서 가까운 와하케뇨국민회가 1915년 1월에 설립되었는데, 그때 회장에 신광희, 서기에 김기창, 재무에 박국천, 대의원으로는 김태진, 김윤원이 선출되었다. 신광희는 회관에 일신국어학교를 설립하여 70~80명의 한인 2세들에게 국어 교육을 했다. 그런데 1917년 미국과 적대적이던 멕시코 혁명군이 노략질과 방화로 와하케뇨 회관을 파괴했다. 아무 힘도 없던 한인들 대부분이 바다와 항구가 있는 코앗사코알코스로 도망쳤다. 신광희, 김태진 등도 혁명을 피해 미주로 이주했다.


안창호는 순방 여정을 서둘렀다. 푸에블라 에네켄 농장에서 모기와 벌레에 물려 발목 부스럼이 자꾸 덧나고 있었다. 게다가 음식이 도무지 입에 맞지 않고 소화도 안 되어 변비에 치질 기운까지 생겼지만 스스로 힘을 내자고 다짐했다. ‘변소가 문제다. 다음 농장에 가서는 내 반드시 변소를 손수 지어줄 것이다.’

안창호는 고대 아스텍문명의 도시 베라크루스에 도착하여 이곳저곳을 둘러보았다. 스페인이 침략해서 문명의 흔적을 파괴했지만, 대신 가톨릭의 도시처럼 변해 있었다. 베라크루스는 ‘성스러운 십자가’란 뜻이다. 금과 은이 많이 나서 흑인 노예 백만 명이 팔려왔던 침략자와 이주민의 통로. 그래도 골목 골목에는 멕시코인들의 전통과 노래와 춤이 살아 있었다. 안창호는 씁쓸한 생각이 들었다. ‘우리 민족은 희락을 잃었다. 우리의 흥은 어디로 사라진 것일까?’

안창호는 베라크루스에서 화물여객선을 타고 코앗사코알코스로 이동했다. 코앗사코알코스는 1033명이 태평양 연안 살리나크루스에 도착해서 기차로 내륙을 관통하여 멕시코만에 처음 도착했던 항만도시이다. 와하케뇨와 프론테라가 그리 멀지 않은 거리에 있었다. 안창호는 코앗사코알코스에 도착해서 국민회 회관을 찾았다.

김기창과 이근영이 황사용과 함께 코앗사코알코스 국민회관에서 안창호를 기다리고 있었다.

“오, 동지들, 기다리고 있었군요.”

이근영이 반색하면서 안창호의 손을 잡았다. 황사용은 빙그레 웃고 있었다.

김기창은 황해도 억양으로 인사했다. “묵경에서 바로 오실 줄 알고 기다렸는데 푸에블라와 와하케뇨를 거쳐 오셨군요.”

“형님 안색이... 어디 병은 안 나신 겝니까?” 황사용이 걱정스러운 얼굴로 물었다.

“아, 괜찮아요. 덕분에 어저귀 단을 묶는 일은 귀신이 다됐소. 하하.” 안창호가 유쾌하게 말했다.

이근영이 물었다. “총회장님, 그러면 와하케뇨도 가셨던 것입니까?”

“아니요. 가려다가 말았소. 미국 입국자는 제한을 받는다고들 가르쳐 줍디다. 프에블라에서 조금 떨어진 동포 40명쯤 되는 어저귀 농장에 주로 있었소.”

“와하케뇨는 여기와 가깝습니다. 혁명 와중이라 어수선하지만, 청년들 몇몇이 남아 있으니 시간이 나시면 잠깐 들러보시지요.” 김기창이 안내하겠다고 나섰다.

“와하케뇨는 사탕수수 농장이 많습니다. 한인들은 사탕수수밭이나 제당 공장으로 몰려갔습니다. 미국 자본으로 운영합니다. 일당도 멕시코 돈으로 2원이나 돼서 제법 큰 돈입니다. 혁명주동자들은 미국 자본에 반발해서 파괴를 했던 것이고요.” 이근영이 설명했다.

“그래서 와하케뇨 한인들 300명이 대부분 코앗사코알코스로 이주했소?” 안창호가 물었다.

“코앗사코알코스는 어업이 주종입니다. 해 보지 않은 일이어도 한인들이 워낙 적응력이 뛰어나고 능력자라 어업에서도 성공하는 이들이 많이 나왔습니다.” 이근영이 대답했다. 역시 지도자들다웠다.

안창호가 물었다. “프론테라는 어떻소?”

이번에는 김기창이 1911년 프론테라국민회를 창립하던 당시를 떠올리며 대답했다. “저희는 어저귀 농장에서 100페소를 미리 주고 나와서 메리다에서 어정쩡하게 한 2년 지내다가 계약이 끝난 한인들과 1910년 12월에 프론테라로 이주했습니다. 신광희가 타바스코 커피밭 농장 주인과 협상해 5년 계약을 성립시켰습니다. 그리고 토지를 개간하여 신한동이라는 마을을 만들었습니다. ‘타바스코 신한동 헌장 12조’를 정하여 자치제도를 마련하고 기지 개척 정신으로 살아가고 있는데 1911년 여름에 대홍수가 나서 농장이 모두 물에 잠겨버렸습니다. 한인들은 간신히 몸만 빠져나와 다시 유카탄반도로 돌아왔습니다. 프론테라는 과테말라와 국경을 두고 있는데 그때 물난리만 아니었어도 밭농사에 익숙한 한인들이 살아가기에는 조건이 좋은 곳이었죠. 그때 제가 서기를 맡았습니다.”

‘신한동 헌장 12조라...!’ 안창호는 신한동 마을 이름 역시 고종의 꿈인 신한국과 무관하지 않다고 생각했다. 안창호가 깊은 관심을 보이며 물었다. “밭농사요? 어떤 농작물?”

“커피 농사죠. 아열대 기후에 습도도 적절하고.” 한약재를 다루던 약종상 출신 김기창은 프론테라를 잊을 수 없었다. 과테말라 국경과 인접해 있고 한산하고 낙후된 곳이지만, 미래를 위해 무엇인가를 시작해 볼 수 있는 곳이었다.

“나도 그곳에 꼭 가보고 싶소. 북미실업회사에서 투자할 만한 곳인지도 알아보고 싶군요.” 기지 개척에 꿈이 있는 안창호는 프론테라를 꼭 둘러보고 싶었다.

김기창이 말했다. 개성 출신 말투가 배어있었다. “하루 시간을 내서 모시고 가겠습니다. 참, 총회장님 숙소는 제가 따로 마련하였습니다. 황사용 회장님과 같이 지내시지요.”

“아닙니다. 회관이 있으니 거기서 묵겠소. 비용을 아낍시다.” 안창호는 극구 사양했다.

안창호는 코앗사코알코스 국민회관 숙소에서 지내기로 하였다. 국민회 회관은 교통국이나 다름없었다. 세계 도처에 있는 연락망. 연통할 수 있는 거점. 이것을 세계 통일연합기구가 활용한다면 얼마나 좋을까? 안창호가 서둘렀다. “일단 여기서는 항만 어업현장으로 가겠소. 동포들이 어찌 사는지 궁금합니다.”

“네, 알겠습니다. 제가 동행하겠습니다.” 이근영이 안내자로 나섰다.

그때 황사용이 머리를 긁적이면서 말했다. “형님, 저는 샌프란시스코로 돌아가겠습니다. 교회 사목 발령을 기다리는 중이라.... 그 대신 메리다에는 곽림대 중앙총회 총무가 나타날 것 같습니다.”

“오, 그렇군요. 발령이 캘리포니아로 나길 바라오. 호놀룰루는 아무래도 머니까.”

안창호는 황사용이 가까이 있기를 바랐으나 결국 호놀룰루 한인감리교회 담임 목사로 발령이 난다.

“곽림대가 교대하기로 했다고 했소? 그렇게 하세요. 곽림대가 오면 이근영 동지와 같이 의논할 것도 있습니다.” 안창호가 말했다.

이근영은 무엇인가 기억을 더듬더니 신광희가 멕시코를 떠나면서 포부로 밝힌 내용이 떠올랐다. “아, 곽림대 총장은 혹시 군사학에 관심이 많다는 분 아닙니까? 독립전쟁 준비, 그리고 비행학교 설립. 신광희는 공군을 양성해야 한다고 했습니다.”

“오, 두 분이 그런 대화를 나눈 일이 있군요. 북미실업회사에서 비행학교를 설치할 부지도 알아보고 있다오.” 안창호는 마음이 들떴다.

제국군인 출신인 이근영은 신이 나서 말했다. “비행학교 부지는 아리조나 노갈레스 미 국경지대도 좋을 텐데. 그렇다면 멕시코에서 비행사 지원자도 많이 나올 텐데요.”

안창호가 관심 있게 물었다. “노갈레스요? 그곳에 기지 개척이 가능한지도 살펴 둬야겠소. 돌아갈 때는 육로로 가야겠구먼!”

안창호는 마음이 바빠졌다. 좋은 동지를 만나면 그만큼 가능성도 많이 열린다. ‘메리다에 멕시코국민회지방총회를 두자. 역량을 한데 모아 미주와 형제애로 지낸다면 독립의 힘은 그만큼 축적될 것이다. 남쪽에는 프론테라, 북쪽에는 노갈레스!’


안창호는 코앗사코알코스국민회관에서 얼마간 머물다가 12월 2일, 메리다국민회관으로 거점을 이동했다. 도착한 다음 날, 270여 명이 모여 환영회를 열었다. 안창호는 ‘대동일치’라는 주제로 연설하였고, 3시간에 걸쳐 한인사회 경제발전과 대동단결을 호소했다.

안창호는 환영식에서 이종오 선생과 인사를 나누었고, 다음 날 아침에 식사를 같이하자고 집으로 초대를 받았다. 이종오의 나이는 49세로, 온화하고 겸손한 성품으로 이민자들의 존경을 받고 있었다. 이종오의 집에는 덩치 좋은 내시 4명과 궁녀 한 사람이 시중을 들고 있었다. 부인은 없었다. 안창호는 자세한 사정을 묻지 않았다.

이종오가 먼저 말을 꺼냈다. “총회장님 소식은 많이 들었습니다. 연설 모습을 보니 과연 최고 지도자요. 메리다로 바로 오시지 않고 어저귀 농장에서 지내다 오셨다지요? 괜한 고생을 하셨습니다!”

“동포가 어떤 노동으로 어떤 고생을 하고 있는지 알고 싶어 농장 일을 해 본 것입니다.” 안창호는 깍듯이 존칭을 써서 말했다.

“지금 사정은 많이 좋아졌습니다. 계약이 끝난 후에는 임금도 받고 돈도 만져볼 수 있게 됐고. 이 사람은 계약 후 다른 어저귀 농장에서 그 일을 계속하고 있지요. 아는 거라곤 어저귀를 베고 단을 묶고 하는 일밖에 모르니.... 쯧쯧.” 이종오는 낮은 목소리로 표준어를 써 가며 천천히 말했다.

‘과연 기대했던 대로 이종오는 품격이 있는 겸손한 사람이다. 왕족이라는 사실을 드러내지 않는다.’ 안창호는 자세를 고쳐 앉으며 조심스럽게 말했다.

“저, 말씀을 낮추시지요. 그래야 제가 편합니다. 오면서 숭무학교에 대해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1910년 11월에 개교해서 사관생도 118명을 양성했다고요. 대단한 일을 하셨습니다.”

이종오가 말했다. “광무군인이 200명이나 왔는데 그들이 할 일을 했을 뿐입니다. 이근영은 대단한 리더십과 추진력을 갖추고 있지요. 저도 그 앞에서는 꼼짝 못하고 시키는 대로 합니다. 사관 학생들에게 국어를 가르치라고 하니 가르쳤지요. 하하. 멕시코 혁명 여파만 아니었어도 지금쯤 대단한 성과가 있었을 텐데....”

안창호는 숭무학교 이념을 광무제 복원의 꿈을 실현하자는 취지로 이해했다. “멕시코 혁명은 자국의 해방을 위한 것인데 그 틈새에서 대한인 이민자들의 피해가 컸습니다.”

“그렇다오. 이 세상에 신한국을 건국하라고 내주는 땅은 없다는 것을 깨달았소. 그러니 하루속히 우리 땅, 우리나라를 되찾아야 하오.” 이종오는 고종이 막다른 곤란 속에서 이리저리 일제를 벗어나려고 애를 썼으나 너무 늦었다고 생각했다. ‘그러니 나도 이 먼 땅까지 와서 출신을 들먹이며 지낼 수 없다. 그저 한인들을 도우며 독립운동에 생을 바쳐야 한다.’

안창호가 물었다. “앞으로 멕시코 한인들은 어떻게 될까요? 멕시코가 반미 혁명 중이니 한인들은 어떤 꿈을 갖고 살아야 할까요?”

이종오가 웃으며 대답했다. “아니, 우리 그란 마에스트로께서 환영연설에서 이미 비전을 제시하지 않았습니까? 저는 도산 말씀이 옳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결심한 바인데, 내가 곧, 결혼하려고 합니다. 그리고 멕시코로 귀화를 하고자 합니다. 그래야 땅도 사고 건물도 살 수 있겠지요. 그래서 메리다국민회관을 신축하려고 합니다. 도산께서 꼭 주례를 서주고 가셔야 합니다.”

안창호는 놀랐다. 이종오 선생의 큰 인물됨에 감탄했다. ‘이분은 진정한 민족 지도자이시다. 공의를 위해 자신의 인생을 바친 분으로 오래 기억될 것이다.’


메리다 회관에서는 방경일 부부가 삼시 세끼를 챙겨주었다. 안창호는 매일 아침 이종오 선생 댁을 방문하고 문안 인사를 했다. 나라를 사랑하는 두 사람의 교감이 더욱 깊어졌다. 나중 이야기지만 이종오는 메리다에서 한인들의 존경을 받으며 살았고 해방 후에 귀국하지 않았다. 1946년 9월에 사망하였고 메리다 판테온 헤네랄 공동묘지에 묻혔다. 그의 거주지는 오늘날 한국인의 여행 명소가 되었다.


곽림대가 메리다에 도착했다. 안창호는 이근영의 안내로 곽림대와 함께 코앗사코알코스 항만을 탐방했다. 김문영, 서병학, 정지용 등과도 친분을 쌓았다. 이들은 대부분 코앗사코알코스지방회가 설립한 한인 어업촌 치안과 경찰업무를 맡고 있었다. 이근영은 제국군인 공병대 하사관 출신답게 매우 활달하고 적극적인 지도자였다. 1916년에는 용병 40명을 모집하여 과테말라혁명에 참여하기도 했다. 이근영은 국민회 중앙총회장 방문에 고무되었다. 그는 안창호를 앞세워 1917년 12월에는 청산소학교를 설립했고 이듬해에는 군법학교와 형사국어학교를 설립했다. 이근영은 이 지역에 없어서는 안 될 정의로운 실천가, 충의 용감의 화신이었다. 그는 늘 바빴다.

안창호는 혁명의 여파로 분위기가 어수선한 와하케뇨 방문은 포기했다. 미국인들이 경영했다는 사탕수수밭이나 제당 공장이 궁금했지만, 지금은 가지 않는 것이 좋다고 판단했다. 대신 이근영의 안내로 프론테라 타바스코를 방문하기로 했다. 1918년 1월, 신광희와 김기창이 농사를 지으며 마을을 개척했었다는 신한동으로 가보기로 했다. 안창호는 프론테라 지역이 왠지 끌렸다. 다행히 정춘식, 박국천, 오교원, 박선일 등 청년들이 유카탄에서 신한동으로 되돌아와 봄부터 한인 마을을 다시 살려내며 꿈을 키우고 있었다. 안창호는 이들을 만나게 되어 기쁨을 감출 수 없었다. 이들은 통상회라는 단체를 만들어 모임을 하고 의무금을 내고 있었다. 또 얼마 전부터는 ‘애국동맹금’이란 호칭을 붙여 1원씩 동맹 저축을 시작했다고 했다. 안창호는 이 단체에 통상회란 이름 대신 흥사단이라는 공식명칭을 부여하고 흥사단 조직절차를 밟았다.

김기창은 13명과 함께 흥사단에 입단하고 멕시코반을 결성하여 초대 반장을 맡았다. 그 후 김기창은 1921년에 서약하고 통상단우가 되어 메리다를 중심으로 한인사회에 흥사단의 뿌리를 내리는 중추 역할을 했다. 1937년 쿠바로 이주한 회원들과 제15반으로 활동했고, 1948년에는 분리해서 멕시코반 11명, 쿠바반 5명으로 흥사단을 유지한다.


총회장 도산 안창호의 방문은 프론테라 한인들이 하나로 결집하는 계기가 되었다. 이들은 안창호의 한마디 한마디에 귀 기울였다. 안창호는 성심을 다해 이들을 격려하고 잠재되어있는 자부심과 주인 정신으로 민족정신을 일깨웠다. 총회장 안창호는 이들 관리를 위해 프론테라국민회를 조직하여 북미지방회 산하에 두고 이들의 공동체 훈련은 흥사단 이념체계를 적용하기로 했다.

1918년 1월, 곧바로 국민회프론테라지방회가 결성되었다. 이들은 활동 거점으로 회관을 짓기로 하고 동맹저축을 시작하여 1백 원을 모았다. 3월 11일부터 집을 짓기 시작하여 29일에 완공했다. 이들은 31일, 코앗사코알코스와 메리다국민회 회원들을 초청하여 성대한 낙성식을 했다.

안창호는 곽림대 총무와 함께 낙성식에 참석했다. 이종오 선생도 참석했다. 중앙총회장 도산 안창호는 낙성식에 감격하며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1919년 임시정부 수립 이후 프론테라는 독립의연금을 모금하여 국민회 중앙총회로 보내서 내무총장 도산 안창호를 후원했다. 이들은 일본 돈 배척 운동을 전개하고 독립선언서를 스페인어로 번역하여 멕시코 여러 지역 교회로 전달했다. 그러나 멕시코 혁명은 프론테라 지역까지 간섭과 방해의 끈을 놓지 않았다. 한인공동체는 장기계획 중의 하나였던 커피 등의 농사를 계속하기 어려워졌다. 한인 300여 명이 1921년 3월부터 쿠바로 이주하여 생활의 터전을 옮겼다. 지방회와 흥사단 관련 모든 서류를 비롯해 집기들도 쿠바로 옮겼다. 남아 있는 한인들은 국민회와 흥사단을 유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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