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화. 독립운동의 큰 그림, 청년훈련단체 흥사단
안창호는 이제 마음 한구석에 미뤄두고 있던 흥사단창립을 어떻게 진행해 나갈 것인가를 놓고 고심했다. 안창호는 청년학우회 취지서를 써준 신채호의 얼굴이 떠올라 그에게 편지를 썼다. 『신한민보』 주필로 초청하면서 미주에서 같이 일해 줄 것을 간곡히 청했다. 그러나 1912년 11월 1일 신채호에게서 답장이 왔다.지금은 미주로 갈 수 없다고 했다. 안창호가 연해주를 떠난 후에 권업회가 결성되었고, 신채호는 『권업신문』 주필을 맡았고 대한광복회 부회장을 겸하고 있다고 했다. 신채호의 답장을 받은 안창호는 크게 상심했다. 안창호는 이번에는 신채호와 친동기 간처럼 지내는 장도빈을 떠올리고, 손수 노동으로 마련한 여비 2천 달러를 장도빈 앞으로 보내면서 『신한민보』 주필로 초청했다. 그러나 장도빈 역시 건강상의 이유로 미국행을 포기했다. 안창호의 인사 영입은 좌절되었다.
1913년 4월. 안창호는 독립운동 단계별 방략도가 그려진 수첩을 들고 신한민보사가 있는 샌프란시스코 국민회 총회관으로 갔다.
안창호는 마침 자리를 지키고 있던 홍언 편집장에게 인사를 건넸다.
“아우님, 엄청 바쁘지요? 아무리 신문이라지만 중앙총회 결성 소식을 전 세계로 알리는 일이 쉬운 일은 아닐 테니.”
홍언은 일을 멈추고 안창호를 쳐다봤다. “형님이 리버사이드에서 다시 건너오신 이유가 있지요? 이번엔 청년학우회 조직, 아니 흥사단 조직 때문에...!”
안창호가 웃으며 대꾸했다. “하하하! 아니, 홍 동지! 그걸 어떻게 아셨소?”
홍언도 웃으며 맞장구쳤다. “방에 들어오실 때 형님 이마에 ‘흥사단’이라고 적혀있던걸요? 미주 도착하자마자 흥사단 구상을 하지 않으셨던가요?”
“그렇소. 내 청사진을 한 번 봐주겠소?” 안창호는 독립운동 단계별 방략도를 꺼냈다.
“형님, 방략도에 대한 궁금증이 있었는데, 드디어 보게 되네요.” 홍언이 자세히 들여다보았다.
“뭐 연상되는 거 없소?” 기대에 찬 표정으로 안창호가 물었다.
“글쎄요... 기초부터 위로, 위로 가면 맨 위에 국권 광복과 조국 증진. 꼭대기에 십자가를 장식하면 완전결과라.... 중세 고딕풍 교회가 연상됩니다.”
홍언은 상상력이 남다른 데가 있었다. 안창호는 기뻐서 소리쳤다.
“하하하. 역시 홍언 동지는 대단하오. 밑에서부터 그렸다오. 아무리 봐도 기초가 중요하단 말이지. 독일이나 영국에서 유명한 성당이 꼭 이런 모양입디다.”
홍언은 감탄했다. “오, 정말 대단하십니다. 십자가 첨탑이 있는 건축물 구조로 청사진을 그리다니요. 어떤 목표로 정진할 것인지 눈에 확 들어옵니다.”
“무엇보다 기초 조직을 튼튼하게 하려면 단결이 중요하지 않겠소? 그래서 단결을 상징하는 무언가가 꼭 필요하다고 생각했소. 깃발, 문장, 옷 띠, 뺏지, 노래 등등. 이것도 한 번 보겠소?” 안창호는 주머니에서 주섬주섬 종이를 꺼냈다. 메모지에는 크레용으로 색칠한 깃발 도안과 잉크 펜촉을 기러기 모양처럼 그린 도안이 나란히 그려져 있었다.
“형님, 감동입니다! 방략도 자체의 이념이 인류평화인데 거기에 도달하기 위한 거대한 새가 연상되기도 합니다. 구만리 장천을 단결해서 날아가는 기러기 떼 말이죠.”
홍언은 눈을 동그랗게 뜬 채 방략도와 도안을 번갈아 보며 감탄사를 연발했다. 상상력이 정말 대단했다.
안창호는 덩달아 흥분했다. “기러기 떼! 그 새를 우리 단체의 이미지로 해야겠소. 독립을 향해 날아가고 있는 기러기 떼. 단결과 질서의 상징. 문무의 조화. 건전인격, 신성단결, 충의남여, 동맹수련, 정의돈수!”
홍언은 안창호가 나열한 핵심 용어들을 모으면 취지나 목적문이 나올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형님, 단체 이름은 흥사단으로 결정하신 거고, 시간을 주신다면 제가 취지문 초안을 써 볼까요?”
“좋습니다. 지난번에도 중앙총회 선포문과 결의문을 작성해 주지 않았소. 그러니 내가 또 의지할 수밖에. 홍 동지가 곁에 있어 행복하다오. 고맙소.” 안창호는 진심이었다.
홍언도 기분이 좋았다. 안창호가 옆에 있으면 늘 든든했다. 대화하다 보면 자연스럽게 마음이 열렸다. 명석한 이론과 정연한 논리가 대화에 깔려있었고, 과장하거나 실언을 하는 일이 없었다.
안창호는 다시 명랑한 어조로 말을 꺼냈다. “음, 저... 그런데 말이오. 아무래도 홍언 동지가 흥사단을 창립할 수 있게 창립위원장을 맡아주면 좋겠소. 내 홍언 동지가 시키면 무슨 일이든 맡아서 하겠소. 하하.”
홍언은 웃는 얼굴로 화답했다. “사양하면 도리가 아니죠. 형님께서 저를 인정해 주시고 의지하시니 어깨가 무겁긴 합니다. 그래도 사양하지는 않겠습니다.”
안창호는 진심으로 고마웠다. “아우님, 그대가 옆에 있으니 참으로 행복하오. 기운이 납니다.”
“형님이 앞장서고 계시니 흥사단은 분명 신성단결의 모범단체로 태어날 것입니다. 그런데 흥사단창단 실무 보조로 저한테는 강영소와 송종익 동지가 필요합니다.”
“나도 강영소 형제와 송종익 동지를 주목하고 있다오. 그 둘은 성실하고 정직한데다 나이도 비슷해서 서로 잘 맞을 거요. 앞으로 큰일을 해낼 사람들이지. 아우님이 동지들을 잘 끌어 주세요.”
강영소(1886~1934)는 강명화 선생의 둘째 아들이다. 강명화 선생은 고향 강서에서 개화 지식인이자 6남 1녀의 아들 부자로 이름난 사람이다. 1905년 가족을 이끌고 하와이에 막바지로 이민을 왔다. 을사늑약 이후에는 일본 통감이 이민정책을 제한하여 하와이 이민 행렬이 뚝 끊어졌다. 강명화 가족은 본토로 이주해 리버사이드에 정착했고, 강명화 선생은 안창호가 이끌던 공립협회 리버사이드 지방회에 가입하고 회장을 지냈다. 그는 공립협회의 한인사회를 ‘도산 공화국’이라고 추켜세운 바 있다. 그의 둘째 아들 강영소는 하와이 합성협회 지도자로 활동하면서 공립협회와 통합하여 국민회를 발족하는 데 공헌했다. 강영소는 1910년에 샌프란시스코로 와서 홍언(1880~1951)과 가까이 지냈다. 그러나 그는 건강이 좋지 않았다. 아버지 강명화는 로스앤젤레스에서 멀지 않은 업랜드에 동생들과 거주하고 있었다. 강영소는 로스앤젤레스에서 머물다가 홍언의 추천으로 신한민보사 총무를 맡게 되어 샌프란시스코에 거처를 정했다. 그리고 1911년 5월, 딸 단희와 부인을 이주시켰다. 강영소가 부친에게 말로만 듣던 안창호를 처음 만나게 된 때는 국민회 중앙총회를 발족할 때였다. 당시 강영소는 홍언, 안창호와 나란히 만주리아 대의원 대리로 선발되었다. 강영소는 안창호를 존경하는 마음이 앞서 홍언과 함께 협력자를 자처했다. 이때부터 강영소는 창해소년이라는 필명을 썼는데, 이는 안창호와 홍언의 필명 동해수부에서 한 글자씩을 따온 것으로 짐작된다. 그만큼 재치와 감성이 넘치는 사람이었다. 강영소의 맏형 강영대는 1914년 6월 도산과 함께 흥사단약법 기초위원과 행정 세칙 제정위원으로 선발되어 흥사단창립에 공헌했다. 강영소의 동생들 강영문, 강영각도 모두 흥사단에 가입했다.
안창호는 일단 리버사이드로 돌아왔다. 그리고 상점 일로 바쁜 송종익을 찾아갔다.
송종익은 안창호를 ‘선생님’이라 호칭했다. “어이쿠, 선생님 오셨습니까?”
“북미실업 주주 모집은 잘되고 있소?”
“로스앤젤레스 한인 동포들은 도산 선생님 말이라면 어떻게든 해야 한다고 믿고 있습니다. 정말 대단한 일입니다. 몸소 노동의 모범을 보이시니 신뢰가 쌓인 것이죠.”
“그렇게 말해 주니 고맙소. 송 동지가 재무 관리를 잘하고 있으니 그것이 신용이고 자본이오. 동포들은 그 점을 간파하고 있는 겁니다. 하하.”
“그런데 샌프란시스코 일은 잘 추진되고 있지요?”
“흥사단 말이오?”
“예.”
“홍언 주필과 강영소 동지가 협력하고 있어 잘 되고 있다오.”
“강영소 동지가 아주 멋쟁이 아닙니까? 그 동지 형제들은 백만대군이고. 아주 부럽답니다.” 자신의 처지가 외로웠던 송종익은 부러움을 내비쳤다.
“하하. 그렇소? 부친 강명화 어른이 대단하죠. 가화만사성의 표본이라오.”
“그 집안이야 말로 중국식으로 본다면 화교의 표본 집단이죠. 늘 그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가화만사성 하면 치국평천하에 도달할 수 있을 테니.”
“미주 한인사회도 지금은 터를 잡느라 고생이지만, 단결력만 갖춘다면 독립에 공헌하는 세력화가 어렵진 않을 텐데....”
안창호도 중국 화교 집단이 부러웠다. 화교들은 만주족의 지배를 피해 해외로 나가 집안 세력을 확장하고 가문의 인재를 양성하고 있었다. 문무에 부까지 갖춘 글로벌한 신진세력 양성. 거기에 동족애, 민족애까지.
“저에게 뭔가 하실 말씀이 있지요?” 송종익은 궁금했다.
“아, 참. 내 정신 좀 보게.” 안창호는 웃옷 안주머니에서 접어둔 종이를 꺼냈다.
“혹시 지난번 북미실업 발기 때 보여준다고 하신 그 청사진입니까?”
“아, 그 그림은 홍언 동지한테 놓고 왔소. 집에도 비슷한 메모지가 있긴 한데... 이건 흥사단 목적문과 뭐 이런저런 생각들을 모아본 메모지요.”
“아, 흥사단 관련 메모들...! 제가 시간을 통 못 내서 죄송합니다.” 송종익은 풀이 죽었다.
“아니오. 어차피 송 동지가 앞으로 많이 참견해 줘야 하오.”
송종익이 말했다. “시간을 내겠습니다. 그런데 발기 시기는 언제쯤으로 생각하십니까?”
“우선 동맹수련 회원 7인을 창립 준비위원으로 해서 25인 발기인을 모집할까 하오.”
“아, 강영소 집에서 정기적으로 만나 동맹수련하는 분들이 창립 준비위원이라는 말씀이시죠?”
“그렇소. 나를 포함하여 하상옥, 정원도, 강영소, 홍언, 양주은, 이대위. 이들과 내가 노력해서 발기인 25명이 되면, 곧바로 임시규정을 선포하고 창립식을 진행할까 생각 중이오.”
송종익이 메모를 훑어보며 말했다. “발기인은 선생님께서 일일이 직접 만나셔야 하겠지요. 독립으로 가는 기초단계에서 초석이 될 사람들이니 매우 중요합니다. 시간이 걸리겠군요. 가입 절차도 따로 있겠지요?”
“그렇소. 그래서 생각해 둔 방법이, 가입 의례 절차를 따로 두려고 하오. 이런 모든 절차를 8도 대표로 창립위원회를 구성해서 협의해 나가려고 하오. 함께 만들어 가는 것이 중요하니까.”
“오, 역시 선생님 대단하십니다. 적임자 선발이 중요하겠네요. 추천보다는 선생님 안목으로 창립위원회를 구성하는 것이 좋을 듯합니다만....”
그러나 안창호는 생각이 달랐다. ‘개인이나 단체에 맹종하게 해서는 안 된다. 입회와 탈퇴가 자유로워야 갈등이 없을 것이다. 8도 대표의 집단지성으로 끌고 가야 한다.’
“내 부탁인데, 송 동지를 약법 기초위원으로 하고 싶소. 하하. 강영대와 곽림대가 함께 해주면 훌륭한 약법이 나올 듯하오.”
송종익은 겸연쩍은 표정으로 말했다. “저는 빼 주시죠. 저 대신 선생님께서 전권위원으로. 저는 8도 경상도 대표라면 몰라도... 하여튼 다른 역할을 맡겠습니다. 그나저나 강영대 그 사람은 강영소의 친형이고, 곽림대는 누구입니까?”
“곽림대는 1909년 청년학우회를 발기했던 회원이오. 이번에 샌프란시스코로 유학차 망명했소.”
“아, 역시 사람맞이는 선생님 몫이라니까요. 약법제정과 행정 세칙이 기대됩니다.”
“약법제정은 시간이 걸릴 것이오. 송 동지가 시간 내기 어려운 사정을 잘 알고 있소. 샌프란시스코로 이사 가라 할 수도 없으니.... 참, 그렇지! 창립은 샌프란시스코에서 하고, 본부를 로스앤젤레스로 이전하면 되겠소. 하하하.” 안창호는 유쾌하게 웃었다. 송종익도 같이 소리 내어 웃었다.
안창호가 농담처럼 건넨 이 말은 추후 실현되었다. 실제로 샌프란시스코 국민회 총회관에서 이대위 목사 주례로 흥사단을 창립하였고, 이후에는 흥사단을 로스앤젤레스에 있는 송종익의 거주 건물 2층으로 이전하여 송종익이 이사원으로 업무를 보았다. 말이 씨앗이 된 셈이다.
안창호는 창립에 앞서 바쁜 가운데서도 짬짬이 덕, 체, 지의 3대 수련을 실천해 보기로 했다. 샌프란시스코 국민회 중앙총회 회관이나 강영소 집에서 하상옥, 강영소, 정원도, 양주은, 홍언, 이대위 등과 어울려 책을 읽거나 토론하거나 운동을 했다. 형식과 절차를 갖춘 동맹수련이었다. 동맹수련은 동지 간 시너지 효과가 컸다. 서로 약속만 잘 지키면 누구나, 아무 데서나 할 수 있었다. 시간 지키기, 약속 지키기, 거짓말 안 하기, 핑계 대지 않기, 지속적이고 정직한 활동 보고 등. 동맹수련은 곧 인격 수련이었다.
흥사단 발기인으로 공식 서명한 최초 7인은 하상옥, 강영소, 정원도, 안창호, 황사용, 양주은, 홍언이다. 이들의 1차 목표는 발기인 25명을 확보하는 일이었다. 마침내 1913년 5월 13일, 샌프란시스코 국민회 총회관에서 발기인 25명이 모여 흥사단 창립총회를 개최했다. 회의는 가장 먼저 임시규정을 채택했다. 임시규정에 따라 안창호를 전권위원으로, 강영소를 주무원 대리로 선정했다. 임시규정에는 발기인 41인 이상이 될 때 8도 대표로 창립위원회를 구성하여 임원 선출 및 약법과 행정 세칙 등을 결정하고, 사업과 결산을 심의한다. 8도 대표 창립위원회가 흥사단 초대 의사부가 되는 것이다.
전권위원으로 뽑힌 안창호는 8도 대표를 선정하여 ‘창립위원회’를 구성하는 일에 몰두했다. 1913년 12월 20일, 발기인 41명의 투표지가 접수되고 개표가 완료되었다. 그 결과 경기도(홍언), 강원도(염만석), 황해도(민찬호), 함경도(김종림), 전라도(정원도), 평안도(김홍균), 경상도(송종익) 7인이 선출되었다. 1914년 6월 8일에는 이사부장 대리로 안창호를 선출하고 송종익, 이일, 강영대를 이사원으로 선출했다. 그리고 7월에 충청도 대표 조병옥을 선출하여 8도 대표가 결정되었다. 이렇게 하여 흥사단은 의사부(창립위원)와 이사부 체제를 갖추고 1914년 12월에 남방 클레어몬트와 북방 새크라멘토에서 각각 제1회 대회를 개최하였다.
(다음 화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