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6장. 동지를 믿고 속아라 #5/10

5화. 공산주의 노선의 등장

by 은명

5화. 공산주의 노선의 등장


1920년 1월 21일, 뜻밖에도 헤이그 특사였던 이준의 아들 이용이 안창호 집무실을 방문했다. 이용은 이동휘와 함께 간도와 시베리아에서 무장투쟁을 해왔다. 이번 상해 방문은 이동휘의 부름 때문이었다.

‘이준의 붕어빵이로군.’ 안창호는 이용을 보자마자 독립협회 시절, 만민공동회 연설장에서 열변을 토하던 이준의 모습이 떠올랐다. 이용은 안창호를 보자 반가운 마음에 모든 것을 털어놓았다. 이용은 러시아에서 안창호에 대한 평가가 두 갈래임을 잘 알고 있었다. ‘대한국민의회 사람들은 임시정부는 무효라면서 저분을 비난하고 있다.’ 그러나 도산이 따뜻하고 섬세한 인물임을 아는 이용은 안타까운 마음이 컸다. 사실 대안과 실천이 없는 비난은 소모전일 뿐이다. 이용은 이동휘 총리의 명령으로 북간도 명월구에 사관학교 설립 문제를 의논하러 왔다. 안창호는 이용을 통해서 궁금했던 시베리아 사정을 자세히 듣게 되었다.


1918년 러시아 혁명군은 체코의 반란군을 진압하기 위해 시베리아로 진군했다. 연합국이 체코 반란군을 지원하고자 시베리아로 간섭군을 파견했다. 동양 점령 기회를 노리던 일본도 가세하여 시베리아 출병에 나섰다. 1918년 8월 일본군 대 병력이 블라디보스토크에 상륙하여 곳곳에서 러시아 적군파와 살육전을 벌였다. 러시아 적군파와 한인으로 구성된 빨치산부대가 무력 저항에 나섰다. 일본군은 파죽지세로 시베리아 바이칼 동쪽까지 점령해 들어갔다.

그러나 한인사회는 민족진영과 공산주의 진영으로 나뉘어 갈등을 빚고 있었다. 이동휘 총리의 상해 부임을 두고도 의견들이 분분했다. 대한국민의회는 처음에 임시정부를 지지했다. 그러나 문창범이 상해를 다녀온 후로 대한국민의회 측은 상해 의정원이 이승만 내각으로 기울어있다고 생각하여 의정원을 부정하고 임시정부에 등을 돌렸다. 이용은 러시아 한인 무장세력은 혁명의 영향으로 볼셰비키당 소속 적군파가 우세하다고 전했다. 주로 고려공산당 이르쿠츠크파 소속 군대였다.


안창호는 이용이 제공한 정보를 바탕으로 이동휘 총리를 방문하고 하루 속히 광복군총영 설치가 필요함을 강조했다. 이를 위한 정부 내 군사연구부를 가동해야 함을 강조했다. 총리는 이를 선전위원장 안창호에게 위임했다. 안창호는 이탁과 오동진을 앞세워 남만 광복군사령부와 임정 산하 광복군총영 설치를 서둘렀다.

또한, 여운형과 신익희 등 청년들은 선전위원장 안창호를 앞세워 중국국민당 인사들과도 활발한 교류의 길을 열었다. 중국은 1919년 5월 4일, 중국국민당을 창당하고 내부 혁명을 치르면서 근대화를 추진하고 있었다. 때마침 레닌 정부는 1919년 7월, 과거 제정 러시아가 중국과 맺었던 모든 불평등 조약을 폐기한다는 카라한 선언을 발표했다. 중국 지식인들은 레닌 정부에 기대와 호감을 갖기 시작했다. 북경대 교수이던 진독수와 이대조는 중국개혁의 모델은 마르크스주의와 레닌 혁명이 답이라고 판단했다.


선전위원장 안창호는 여운형과 신익희의 도움으로 손문과 교류했다. 또한 진독수(1879-1942)와 이대조(1889-1927)를 친구로 사귀게 되었다. 소련에서 파견된 보이틴스키가 중국공산당 창당을 촉진하러 진독수를 찾아왔을 때도 여운형은 안창호를 소개하고 외교활동을 했다. 안창호는 보이틴스키를 진독수에게 안내하면서 한국 사정을 알렸다. 이 같은 분위기 속에서 1921년 창사와 상해에서 한중호조사가 결성되어 선전, 통신, 경제, 교육 분야에서 활발한 교류 활동이 일어난다. 이에 참여한 인사는 김홍서, 김규식, 이탁, 여운형, 김문숙, 한진교, 윤현진, 서병호, 김철, 이유필, 신익희 등이었다. 한중호조사는 소련대사 카라한과 교섭하여 한국 독립운동 방안을 모색했다. 레닌 정부가 1919년 3월 국제공산당(코민테른)을 창설하고 극동의 약소국을 지원하기로 나선 것이다. 이러한 기류 속에서 1921년 7월 23일, 중국공산당이 상해에서 창당되었다.

다른 한편, 안창호는 이광수로부터 러시아인 포타프가 독립신문사를 찾아왔다는 보고를 받았다. 포타프는 무관이며 대한제국 말기 러시아공사관이다. 포타프는 유럽 대전에 참여했고 1917년 2월혁명 때 볼셰비키에 협력하여 친위대 병력으로 차르 체제를 붕괴시키는 데 공헌했다. 1918년 이르쿠츠크에서 왕당파 콜차크에 추방을 당해 일본으로 망명했다가 상해로 왔다. 이광수에 의하면 포타프가 한국의 독립을 돕겠다는 뜻을 밝혔다고 했다. 이광수는 여운형에게 이를 전달하고 포타프와 일단 소통하게 했다. 여운형은 포타프가 러시아 혁명당의 영수로서 민족자결과 민족 평등을 위해 한국의 독립운동에 참여할 것을 약속했다고 전했다.

안창호는 이 기회를 통해 한국, 중국, 러시아 3국 연맹을 구상했다. 그리고 이 소식을 이동휘에게 보고하고 모스크바 특사 파견 안건을 국무회의 회의에 올렸다. 그러나 이동휘는 상해로 오기 전 1919년 7월, 공산주의 국제연합기구인 코민테른에 가입하기 위해 한인사회당 박진순, 박애, 이한영 3인을 모스크바 사절단으로 파견한 상태였다. 이들은 시베리아 점령군 백군파를 겨우 피해서 11월 15일 모스크바에 도착했다. 그리고 도착 즉시 코민테른에 가입하고 활발한 활동을 펼치고 있었다. 이동휘 국무총리는 모스크바에서 개최되는 2차 코민테른 회의(1920.7.19.~8.7)에서 임시정부 승인과 자금 지원 등의 요청 결과에 주목하고 있었다.


1920년 1월 22일, 이동휘 총리가 주재하는 국무회의가 열렸다. 안창호도 참석했다. 국무회의는 안공근, 여운형, 한형권 3인을 모스크바 외교원으로 공식 선정했다. 그러나 이동휘 총리는 여운형 파견을 반대했다. 여운형이 노령의 민심을 수습하기는 어려울 거라는 게 표면적인 이유였지만, 사실 이동휘는 레닌 정부에 임시정부 승인과 자금지원 요청을 해 놓고 있는 상황에서 여운형이 개입되는 것을 염려했던 것이다. 안공근은 연락이 닿지 않고 있었다. 그래서 한형권과 김립이 임정 특사로 가게 되었다. 특사 임명 과정에서 여운형은 심한 갈등을 겪고 임정을 떠나겠다고 했으나 안창호가 화를 누르라며 말렸다.


이동휘는 ‘모스크바로 직접 가 볼까?’ 하는 생각으로 홀연히 상해를 떠나 웨이하이(위해위) 항으로 갔다. 이동휘의 불안한 태도를 눈치채고 있던 안창호는 김립에게 단도직입적으로 말했다. “총리가 임시정부 외교 임무를 띠고 모스크바로 직접 가시는 것은 막아야 합니다. 우리 외교는 소련뿐만 아니라 미국 관계도 생각해야 합니다. 내 생각으로는 차라리 김립 동지가 한형권을 수행하는 특파 요원으로 가면 좋겠습니다.”

김립은 안창호의 말에 설득되었다. “네, 무슨 뜻인지 잘 알겠습니다. 총리가 직접 모스크바 외교에 나서는 것은 우리 독립운동에 비추어 큰 모험이라고 생각됩니다. 제가 총리를 설득해 보겠습니다.”

이동휘는 일단 상해로 돌아왔다. 안창호는 이 일에 대해 주변에는 침묵했다.


봄이 되자, 총리 이동휘는 상해에서 공산주의자 그룹을 결성했다. 여운형은 안창호의 권고에 따라 상해 공산주의자 그룹에 가입했다. 그리고 중앙위원으로서 번역부에서 일을 맡았다. 여운형은 마르크스의 「공산당선언」을 한국인 최초로 번역하였고, 부하린(Bukharin)의 『공산주의독본』, 영국노동당의 『직접행동』 등을 직접 번역해 만주와 국내에 배포하였다. 이 그룹에는 여운형 외에도 조완구, 신채호, 안병찬, 이춘숙, 조동호, 최창식, 양헌, 선우혁, 윤기섭, 김두봉 등이 가입했다.

1920년 5월 말 모스크바에 도착한 한형권과 김립은 먼저 가 있던 박진순 일행과 해후했다. 이들은 이동휘 당수가 통합임시정부 국무총리에 부임한 사실에 힘입어 각국 대표들과 활발한 교류를 펼쳤다. 이들은 제2차 코민테른 회의에 대한민국 대표로 참석했다. 이들은 국빈대우를 받으며 레닌과 아시아 외교 담당 카라한을 만났다. 한국대표단은 임시정부 승인과 한국 독립군 장비를 적군파 기준으로 마련해 줄 것, 또 시베리아에 독립군 사관학교를 설치하게 해줄 것 그리고 대한민국임시정부에 자금을 원조해 줄 것 등 4개 항의 요구 조건을 제시하였다. 레닌은 이 모든 조건을 수용하고 금화 400만 루블의 자금을 약속했다. 400만 루블은 미화로 240만 달러다. 그러나 시베리아 주재 전권위원 슈마츠키가 극동 사회주의 활동비로 200만 루블을 가로챘다. 한국 대표들은 나머지 200만 루블을 약속받았다.


한형권은 1920년 9월, 1차로 지급된 금화 60만 루블 가운데 20만 루블은 소비에트 외무부에 보관을 요청하고 나머지 40만 루블을 상해로 운반하기로 했다. 금화 40만 루블은 궤짝 7개(327.6kg)로, 궤짝 1개 무게는 약 47kg였다. 이는 당시 가격으로 미화 23만 8820달러, 엔화 51만 5852엔에 해당하며 이는 오늘날 우리 돈 510억 원에 해당한다. 그러니 200만 루블은 약 2550억에 해당하는 금액이다.

1920년 9월, 1차로 지급된 40만 루블의 금괴는 한형권 6만, 박진순 34만으로 나누고, 박진순의 34만은 다시 김립이 12만, 박진순이 22만으로 나누어 운반하기로 했다. 이들이 운반하는 금괴는 시베리아 열차를 타야 했고 열강의 봉쇄를 뚫어야 했다. 시베리아 열차는 몽골 접경지역인 울란우데와 이르쿠츠크를 지난다. 상해로 가려면 울란우데에서 북경으로 가는 열차로 갈아타야 하는데, 이 열차는 몽골의 울란바토르를 지난다. 울란바토르에서는 이태준이 몽골 국왕의 신뢰를 받으며 동의의국을 개업하여 독립운동을 지원하고 있었다. 모스크바로 이동하는 독립운동가들은 이곳을 지나면서 이태준의 도움을 받고 있었다. 이태준은 한인사회당 비밀요원으로 활동했다. 이태준은 김립이 12만 루블의 금괴를 상해로 운송하는 과정에 참여했다. 12만은 8만과 4만으로 나누어 4만 루블 금괴는 이태준의 집에 보관하고, 1차로 8만 루블 금괴를 만주리아와 북경, 장가구를 거쳐 상해로 무사히 운반하였다.

이태준은 금괴 운반 과정에서 북경에 들렀을 때 김원봉을 만나 의열단에 가입했다. 김원봉은 그때 마침 폭탄제조 기술자를 찾고 있었고, 이태준은 김원봉에게 폭탄제조 기술자인 헝가리인 친구 마쟈르 소개를 약속했다. 1921년 2월. 이태준은 김립과 함께 숨겨놓았던 나머지 4만 루블을 운반하려고 울란바토르로 갔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이태준은 자신의 병원에 들렀을 때 그곳을 점령하고 있던 러시아 백군파 운게른 부대에 잡혀 ‘묻지마’ 식으로 피살되었다. 다행히 집에 보관했던 금괴는 들키지 않았다. 김립은 이를 찾아 박진순에게 전달했다. 친구 이태준을 잃은 마쟈르는 스스로 김원봉을 찾아갔다.

박진순은 레닌의 임시정부 지원자금 1차분 40만 루블을 1921년 봄, 이동휘에게 전달했다. 이동휘가 1921년 1월 24일 사직 선포문을 발표하고 총리직에서 물러나 위해위로 떠난 시점이다. 안창호는 김립을 설득하여 이동휘가 상해로 돌아오도록 했다. 이동휘는 상해로 돌아와 고려공산당 활동에 집중했다. 이동휘는 수령 자금 대부분을 공산당 활동경비로 사용했다. 임시정부에는 김립을 통해서 보조금으로 5천 엔을 집행하도록 조치했다.


(다음 화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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