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화. 차리석과 안태국
안창호는 국무총리 이동휘의 명령에 따라 1920년 2월 8일부터 군사연구부 조직에 나섰다. 이 과정에서 안창호는 안정근, 이탁, 왕삼덕, 김구, 이유필 등 옛 신민회 서북 계 동지들과 편하게 해후했다. 이러한 행보를 두고 기호계를 누른다느니 매사에 나선다느니 하는 억측의 소리가 들려왔다. 안창호는 자유롭게 활동하고 싶었다. 그래서 임명 한 달 만인 2월 14일 선전위원장 사직서를 임시의정원에 제출했다. 사직서는 부결되었다. 이동녕 내무총장은 오히려 3월 10일 안창호를 내무부 지방선전총판으로 임명했다. 안창호는 심기일전하여 의정원을 통해 선전부 규정을 제정하고, 비밀기관 지방선전부를 조직해 나갔다. 안창호는 평안도와 황해도지방 선전대를 조직해 나가는 과정에서 옛 신민회와 청년학우회의 동지들을 다시 만나게 되었다. 차리석과 안태국이 그들이었다.
차리석(1881~1945)은 1911년 105인 사건에서 8년 형 선고를 받고 항소심 무죄로 1913년 7월 풀려났다. 그는 대성학교 출신 청년들이 비밀결사로 조직한 평양축구팀 기성볼단 고문에 추대되었고 1915년에는 안치정, 안세환 등 신민회 동지들과 진남포에서 광산 경영을 하면서 군자금을 비축해 왔다. 그 후 1919년 평양에서 만세운동에 참여하고, 6월에 압록강을 건너 안동으로 왔다. 차리석은 도산의 내무총장 취임 소식을 듣고 8월에 상해로 망명했다. 차리석은 은밀히 안창호와 해후했다.
차리석이 청사로 내무총장 도산을 찾아갔을 때 안창호는 만날 틈 없이 국정을 이끄느라 바빴다. 차리석은 그런 도산 안창호를 보면서 생각했다. ‘조금도 변하지 않았군. 아니, 지금은 신민회 조직을 주도해 나갈 때보다도 훨씬 자신감으로 꽉 차 있어. 차장들에게 부드럽고 겸손한 자세는 예나 지금이나 똑같군. 모두 그에게 설득되고 반하고 있지 않은가. 국정 방략이라....’
“아니, 차동지가 어떻게 여기에! 언제 상해로 온 것이오? 아, 내가 복이 많은 사람인가 보오. 천군만마가 이렇게 내 앞에 있지 않은가?” 안창호는 기뻐서 어쩔 줄 몰랐다.
“형님과 국정을 이끄는 청년들 눈이 빛나고 있군요. 그 어떤 어려운 일도 해낼 것 같이 말이지요.” 차리석이 빙그레 웃었다.
“회포는 천천히 풉시다. 하하. 동암과 마주하는 이 순간이 마치 마법 같소. 분명히 하느님의 은총이구려. 예사롭지는 않소. 뜻하고 있는 일이 잘 되려나 보오.”
차리석은 안창호가 임시정부를 어떻게 지도해 나가는지를 지켜보았다. 통합내각 구성에서 노동총판으로 물러나는 의연하고 아름다운 모습도 지켜보았다. 권력의 자리를 탐하지 않는 사양지심. 그를 거부할 수 없게 만드는 부드러운 카리스마. 차리석은 그 모습을 보고 행복했다. ‘그가 시키는 일은 무엇이든 할 것이다.’
안창호는 차리석에게 『독립신문』을 맡기면서 이광수를 돕게 했다. 차리석은 창간 때부터 차필성으로 이름을 바꾸어 독립신문사에서 활동을 시작했다. 필성은 망명하면서 반드시 대한의 독립을 이루고야 말겠다는 각오를 담아 지은 이명이었다.
이동녕 내무총장 명령으로 지방선전 총판을 맡은 안창호는 차리석에게 평안도와 황해도 지방선전부 이사를 맡기면서 상해 흥사단조직의 전권을 위임했다. 안창호는 이미 미주에서 박선제 목사와 김항주를 상해로 불러 흥사단 원동위원부를 조직하도록 조치했다.
안창호는 차리석을 통해 안태국 소식을 듣고 그를 상해로 초청하였다. 안태국(1877~1920)은 105인 사건 주모자로 몰려 5년간 실형을 살고 1916년 만주로 망명하였다. 그동안 농사를 지으며 심신안정을 취하고 이제는 어느 정도 회복된 상태였다. 안태국은 만주와 시베리아의 옛 동지를 찾아 왕래하면서 독립운동 진행의 정황을 살피고 있었다. 1920년 2월 13일 안태국이 시베리아에서 상해로 왔다. 다음 날 차리석은 안창호의 거처로 안태국을 모시고 왔다. 안창호는 이들의 방문이 마치 신민회 비밀결사 운동을 도모할 때처럼 각별하게 생각되었다.
“동오 형, 이렇게 다시 뵙다니 무척 기쁩니다! 5년 감옥생활이라니, 놈들의 악행과 옥중생활로 얼굴과 몸이 많이 상했군요. 건강은 괜찮으시죠?” 안창호가 안태국의 안색부터 살폈다.
“도산, 내 진작부터 상해로 오고 싶었다오. 기회를 보던 중인데 이렇게 불러 주시다니 감개무량입니다.” 안태국이 안창호를 얼싸안으며 말했다. 누가 봐도 친형제 이상이었다.
차리석이 웃음 띤 얼굴로 이들의 상봉을 말없이 지켜보고 있다가 문득 한 마디 건넸다. “도산 형님이 무척 외로우셨답니다. 여기저기서 도산에 대한 시선이 따갑습니다. 내무총장 취임 이후 수많은 업적을 이뤘는데도 그런 것들은 당연하게 여기고 말입니다.” 차리석은 더 이상의 말을 아꼈다.
안태국이 이 말을 받았다. “도산, 대충 이야기는 들었습니다. 이승만을 대통령으로 만들려고 도산이 고집을 부렸다고들 합디다. 노령에서는 아예 임시정부를 인정할 수 없다고 한다지요? 정치하는 사람들이란 원래 주도권을 놓고 시기, 질투하기 바쁘지요. 주장이 너무 세요. 독립운동을 해야지 웬 정치 운동이랍니까?”
이 말을 듣고 있던 안창호의 눈시울이 붉어졌다. “형은 역시 판단과 지력이 대단합니다. 지금 내가 큰 위로를 받고 있습니다.”
차리석이 안창호의 목멘 소리를 듣더니 한 마디 더 거들었다. “기호계를 끌어안고 가자는 도산의 전략에 대한 비난인 셈이죠. 내 동생 정석이 말로는 미주에서도 간신히 대동보국회와 통일을 이루었는데, 워싱턴과 하와이가 갈등하더니 결국 하와이국민회는 깨졌다고 하더군요. 박용만이 북경계로 이동해 반이승만 선봉장 신채호와 결합하여 도산을 괴롭히고 있는 셈입니다.”
안태국이 고개를 끄떡끄떡하더니 혀를 찼다. “노령에서도 북경계와 동조하고 있다고 합디다. 신채호가 워낙 이론과 원칙에 밝고 강경하니 노령국민의회가 북경과 결합해서 반임시정부 여론을 조성하는 듯합니다. 지금은 그럴 때가 아닌데 말이지, 기득권 다툼해서 뭘 얻자는 것인지.... 쯧쯧.”
안창호가 찻잔에 차를 따르며 말했다. “형님, 그래서 저는 핵심 각원에서 물러났습니다. 이동녕 총장이 선전위원장 자리를 맡으라고 해서 지금은 선전부 규정을 제정하고 그 업무에 매진하고 있지요. 연통제 대안으로 비밀선전부를 각처에 두고 군적 등록 운동과 군자금 모금을 하려고 합니다.”
안태국이 차리석을 바라보며 말했다. “오, 차 동지가 이사의 책임을 지고 있다는 비밀행정조직? 훌륭하오. 도산은 언제나 대안을 창안하지요. 연통제가 놈들에게 들통나니까 그 대안으로 지방 선전대를 결사한다!”
차리석이 말했다. “이유필이라고, 의주 출신인데 신민회와 청년학우회 동지요. 그 친구가 내무부 비서국장으로 있으면서 병역의무 규정안을 준비하고 있습니다. 안공근, 윤기섭, 이진산, 김홍서, 그리고 이유필 5인 명의로 발의한다는데 아마 의정원에서 만장일치로 통과될 것입니다. 병역의무규정을 국내로 선전하고 군적 등록 운동을 하려고 합니다. 애국부인회도 나섰습니다.”
안태국이 무릎을 치며 말했다. “참으로 대단하오. 도산, 북경이나 하와이에서 뭐라 하든 기운을 내세요. 나도 돕겠소. 나는 만주와 시베리아로 돌아가리까? 이번에는 지방선전부 비밀요원으로? 하하.”
안창호도 웃었다. “역시 형님이십니다. 안색이 좋지 않으시니 우선 홍십자 병원부터 가봅시다. 그곳에서 제 동서 김창세 의사가 잘 살펴 드릴 것입니다.”
안태국도 기분이 좋았다. “좋습니다. 병원 가보기 전에 옛 동지들을 만나보겠습니다. 백범 형도 만나고 현순도 만나서 이승훈 선생 안부도 물어보고. 이동녕, 이시영 총장도 뵙고, 필요하면 북경까지 나들이 가서 단재도 만나봐야지요. 도산이 오죽하면 이승만을 대통령으로 추대하였겠나? 이승만이 영원히 자리를 누릴 것도 아닐 텐데, 지금은 임시정부가 틀을 안정시켜야 하니 도산을 도우라고. 내 말을 들어 줄지는 모르지만 그래도 옛 신민회 동지이니....”
안창호가 감격했다. “형, 고맙습니다. 다들 형을 반갑게 맞이할 것입니다.”
안태국은 그가 말한 대로 상해에서 여러 사람을 찾아 해후했다. 안태국의 방문은 상해를 떠들썩하게 만들었다. 안태국은 이동휘, 이동녕, 이시영, 김구 등 옛 신민회 동지들과 지인들을 만났고, 모두가 그를 반겼다. 어찌 생각해 보면 안태국은 신민회 결사의 책임을 대신 지고 억울한 감옥살이를 한 셈이었다. 안태국을 맞이하는 옛 동지들의 심경이 어쩌면 새로운 단결의 기풍을 일으킬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보름여일 바쁜 일정을 소화하던 안태국은 결국 병이 났다. 심한 감기 증상이었다. 안창호는 즉시 홍십자 병원에 입원시켰다. 김창세가 나섰다. 안태국의 병증은 장티푸스였고 점점 심해졌다. 허약해진 몸에 침입한 사기가 물러나지 않았다.
안창호는 가슴 한구석이 무너져 내렸다. 안태국의 병실 수발을 돕기 위해 아예 병상 옆으로 거처를 옮기고 돗자리를 깔았다. ‘그렇게 건강하던 사람이 어떻게 이럴 수가 있단 말인가? 이제부터 내가 의지해서 같이 해야 할 일이 태산인데, 침입한 병균을 이기지 못하다니.... 마치 허약해진 우리나라 사정 같구나.’
마침내 입원 10일 만인 4월 11일, 안태국은 안창호의 품에서 눈을 감고 말았다. 안창호가 집전한 안태국의 장례식은 상해가 떠들썩하게 거행되었다. 모처럼 상해 한인들은 정부 요인들과 하나가 되어 대동단결의 분위기로 고인을 애도했다. 안태국은 만국공묘에 안장되었다.
1년 후인 1921년 같은 날, 안태국 추모 1주기에서 안창호는 이렇게 추억했다.
“누가 오늘 나더러 묻기를, 네가 믿는 사람 중에 가장 믿던 이와, 네가 사랑하던 이 중 가장 사랑하던 이가 누구인가 하면 나는 안태국 선생이라 대답하겠나이다.”
(다음 화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