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6장. 동지를 믿고 속아라 #7/10

7화. 미의원단 방문과 작탄거사

by 은명

7화. 미의원단 방문과 작탄거사


1920년 4월 19일, 안태국의 장례식이 끝나고, 안창호는 마음을 추슬러 국무원 회의에 출석했다. 이동휘 총리는 모스크바 일로 심경이 복잡하고 혼란했다. 그러나 안창호의 위로와 조언에 힘을 얻었다. 도산은 ‘6대 사업 방략’에서 군사문제를 언급하며 이동휘 총리를 중심으로 단합해야 한다고 했다. 그때 이동휘는 ‘공산당 운동도 결국은 독립전쟁 준비를 위함이 아니던가.’라고 되새겼다. ‘더 중요한 것은, 독립전쟁 준비를 위한 통일된 군사력 확충이다.’ 이동휘는 1920년을 “독립전쟁의 원년”으로 선포한 안창호의 계획을 따르기로 했다. 그리하여 이동휘는 모스크바 외교는 잠시 내려놓고 북만주 군사력 증강을 위해 이용과 계봉우를 북간도로 파견했다.

안창호도 지방선전 총판으로서 안정근과 왕삼덕을 북간도 선전원으로 임명하고 파견을 결정했다. 왕삼덕의 본래 이름은 전병현. 안창호와 무인년생 동갑이다. 전병현은 105인 사건 때 서간도로 망명한 이후 왕삼덕으로 개명하고 경학사와 부민단에서 활동했다. 왕삼덕은 평안남도 순천군 용화리에서 개천군수를 지낸 전효순의 아들로 태어나 평남 관찰부주사와 중추관 의관을 지냈다. 김구가 전해준 일설에 의하면, 자신이 1899년경 마곡사 승려 신분으로 평양을 떠돌 때 전효순이 찾아와 왕삼덕의 교육을 부탁했다고 한다. 왕삼덕은 1905년 11월 을사늑약 반대 상소문을 작성할 때 가담했고, 1906년에는 국민사범학교 1회 졸업생으로 황해도 재령 양원학교에서 교편을 잡았다. 도인권과 함께 용강군에 충일학교를 설립하였고 10월에는 서우학회에 가입, 1907년 서북학회 활동을 하면서 신민회에 가입했다. 서간도로 망명한 왕삼덕은 김필순과 우의를 다졌고, 이동녕, 이동휘와도 의기투합하였다. 1919년 9월 의정원에서 손정도 의장과 이춘숙 부의장을 도와 통합임시정부 구성에 일조했다. 구국모험단 폭발 사고 때 현장에 있었으며, 안창호, 여운형, 황진남의 사고 수습으로 체포를 면하고 대신 북간도 파견이 결정된 것이다.


한편, 통합된 임시정부의 법통론을 놓고 북경과 노령지역에서 끊임없는 공격과 잡음이 들려왔다. 이승만 대통령은 이에 아랑곳하지 않고 워싱턴에서 구미위원부를 따로 조직하여 행정권과 재정권 등 전권을 주장하고 있었다. 마침내 상해 정부 차장과 비서장들은 국무회의에서 구미위원부 폐지를 결의했다. 대신 주미외교위원부를 두어 외교에만 전력하고, 행정권은 미주와 하와이 교민단체 국민회에 돌리고, 재정권은 상해 직할 재정관을 두기로 했다. 이들은 “첫째, 워싱턴위원부를 해산할 것. 둘째, 주미외교위원부를 설치할 것. 셋째, 주미 재정관을 따로 둘 것. 넷째, 대통령은 국무원을 경유하지 않고 교령을 남발하지 말 것”을 공포하여 이승만 대통령에 대한 사실상 불신임을 들고나왔다. 안창호는 분열 예방을 위해 이 법안 공포를 강력히 만류하는 대신 재정문제에 도움이 될 안을 제시하여 관심을 돌리려 하였다. 정부 각 사무실을 통합하여 연합사무실 집행제도로 고치자고 제안한 것이다. 이 논의가 발전하여 4월 15일에 김구가 중견 단체 조직의 필요성을 제안하였고, 안창호는 이것을 수용하여 ‘혁명 최대 간부조직’ 또는 ‘혁명당 최고기관 조직’으로 수습책을 마련코자 하였다.


1920년 4월 24일, 안창호는 이동휘 총리 거처에서 이동녕, 이시영, 신규식 총장들과 회동하고 시국 수습책으로 혁명당 최대 간부 조직안을 제시했다. 각원 5명이 뽑은 대표와 청년 차장 그룹에서 뽑은 1인, 그리고 각계 각파의 유력 인사들이 뽑은 대표 1인으로 구성되는 공동대표단을 혁명당 최대 중심기관으로 하자는 안이었다. 이 안에 일단 모두 동의하였다.

혼란한 정국이 계속되는 가운데 1920년 4월 29일, 예기치 못한 사고가 일어났다. 구국모험단의 화약 폭발 사고였다. 단원 부인들이 다치고 현장에 있던 왕삼덕, 이규호, 김홍식 등 3명이 프랑스 경찰에 체포되었다. 설상가상으로 프랑스 경찰부장이 다리를 절단하는 사고를 입었다. 프랑스 당국에서 임시정부로 압박이 들어왔다. 이동녕 내무총장은 안창호를 급히 불러 의논하였다.

안창호는 이동녕을 일단 안심시켰다.

“폭탄을 제조하다 보면 일어날 수 있는 사고입니다. 작년 9월에도 이석의 의용대, 이칠결사대가 심양에서 폭탄 1백 개를 제조하여 국내로 밀반입하려다가 폭발 사고가 일어났었습니다. 그때는 이석, 김공집, 이한산, 이영운이 무사히 상해로 피신했는데, 이번에는 프랑스 경찰부장이 다리를 절단하는 사고로 이어져 꼼짝없이 수습하게 되었습니다. 체포된 동지들이 일경으로 넘어가지 않도록 외교 문제로 잘 수습해 보겠습니다.”


안창호는 바로 수습에 나섰다. 다음 날 안창호는 외교 수행원 여운형과 황진남을 대동하고 경찰부장이 입원해 있는 병원부터 찾아갔다. 가족을 만나 위로와 사죄의 말부터 전하고, 합의를 보았다. 치료비와 손해배상금은 1만 달러였다. 다행히 체포된 사람들은 일경에 넘기지 않고 석방되었다.

이 소식은 삽시간에 퍼졌다. 이후, 김원봉이 안창호를 만나러 상해로 왔다. 안창호는 이석을 소개했다. 김원봉은 구국모험단의 폭탄제조 기술을 배우기 위해 이석과 김성근, 문일민 등을 소개받았다. 또 한편 안창호는 정인과를 불러 손해배상금 마련을 의논하였다. 임시정부 재정 상태로는 불가능한 일이었다. 안창호의 호주머니에는 송종익과 박영순, 이재수 등이 마련해 준 농장개척 투자금이 있었다. 마침 정인과는 미국으로 돌아갈 계획이었다.

“이 난처한 일을 이재수 형님, 송종익, 박영순 등과 긴밀하게 의논해 주시오. 나는 가지고 있는 투자위탁금을 임시정부에 빌려줄 생각이오.”

안창호는 1만 달러를 보상금 비용으로 임시정부에 내주었다. 임시정부 문제는 잘 수습되었다. 미주에서 큰돈을 투자한 박영순의 소식이 전해졌다. 박영순은 이렇게 말했다. “그 돈은 벼농사에 의존하고 있는 북미실업에 몽땅 투자했으면 이번 재해 때 전부 소실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상해에서 도산이 쓸 만한 데 사용된 것이니 다행이라고 생각한다.”


임시정부는 이 돈을 갚을 길이 없어, 결국 이 일은 안창호의 책임이 되었다. 그런데 엉뚱하게도 북미실업에 30달러를 투자했던 이승만계인 이순기가 ‘안창호가 북미실업 돈을 유용했다.’라고 소송을 제기했다. 상해로 부임조차 하지 않고 있던 이승만은 재무총장 이시영에게 이순기가 조사할 수 있도록 허락하라고 조치했다. 이 일로 북미실업의 재정은 재판비로 막대한 돈을 낭비했고 내부는 계파로 분열되었다.

안창호는 마침내 스스로 인책 사직을 결심했다. 이에 대해 윤현진, 김철, 이규홍은 결사 반대했다. “선생이 사면하면 임시정부는 와해될 것입니다. 안정근도 안창호가 재정을 구하기 위해 국내로 잠입하려 할 때 이를 극구 만류하면서 같은 말을 했었다.

구국모험단 청년들은 신속하고 자상하며 대범한 안창호의 지도력에 고마움과 감탄을 금치 못했다. 이들은 안창호의 지시 명령이라면 뭐든 실행할 각오가 되어있었다. 임득산, 문일민, 이석, 이영운 등은 언제라도 흥사단에 입단할 준비가 된 셈이었다.


1920년 5월 17일, 안정근은 왕삼덕과 양명을 수행하여 북간도와 노령으로 떠났다. 그리고 이탁은 서간도 선전원을 겸해서 남만 광복군사령부를 광복군총영으로 개편하는 임무를 수행하기 위해 파견되었다. 임시정부는 7월 남만 광복군사령부를 광복군총영으로 개편하고 사령관 오동진을 현장 지휘자 총영장으로, 이탁은 정부 참모장으로 임명했다. 광복군총영은 1924년 육군 주만 참의부로 발전하게 된다.

안창호에게 안정근과 이탁은 언제나 준비된, 든든하고 소중한 동지들이었다. 안창호의 독립운동, 즉 독립전쟁 준비를 위한 군사와 외교의 지방 선전업무는 소리 없이 착실히 진행되고 있었다. ‘운동은 무실역행으로 준비된 사람이 주인 정신으로 하는 것이다.’


이렇게 어수선한 정국에 미국의회 의원 9명과 비서진, 가족 등으로 구성된 동양 시찰단 38명이 중국으로 온다는 정보가 입수되었다. 국무회의에서는 6월 18일, 안창호를 시찰단 영접준비위원장으로 선임했다. 또 정부 대표로 여운형과 정인과를, 의정원 대표로 이유필을 각각 임명했다. 안창호는 ‘외교의 기회’를 놓칠 수 없었다. 안창호는 여운형, 이유필, 정인과를 불러 이 문제를 논의했다.

“아주 사소한 기회라도 최선을 다해 봅시다. 의회 발언권을 가지고 있는 의원 9명이 중요하오. 더구나 비서와 가족들이 비록 동양 여행 목적으로 나선 것이라 해도, 여행 중에 보고 느끼는 것들이 의원을 통해 미 의회 발언에 영향을 미치지 말란 법이 없소.” 안창호가 말했다.

정인과가 나섰다. “우선 시찰단 38명 모두를 초청해서 공식 환영회 만찬을 개최하면 어떨까요?”

이유필이 말했다. “의원 9명만 따로 환영회를 열 수는 없는 노릇이니.... 38명이면 예산이 만만치 않겠습니다.”

정인과가 안창호의 표정을 살피며 말했다. “그래도 일본의 비인도적 통치에 대해 자유롭게 낱낱이 폭로하려면 만찬이 있는 자리가 좋은 기회가 될 것이오.”

안창호가 정인과의 말에 일리가 있다는 듯이 잠자코 고개를 끄덕거렸다. ‘나도 수 없는 환영회를 경험한 바 있다. 어른, 아이 할 것 없이 감사한 마음으로 따뜻하고 편안한 분위기 속에서 하고 싶었던 말을 할 수 있겠지. 그런데 만찬 예산이 문제다.’ 안창호는 이유필을 바라보았다.

이유필이 말했다. “예산을 어떻게든 만들어 보겠습니다. 제가 나서겠습니다. 교민단에 호소하겠습니다.”

안창호는 이유필의 말에 힘이 났다. 그래서 구상하고 있던 계획들을 털어 놓았다.

“상해에서는 만찬과 환영회를 준비하고, 국내에서는 폭탄 거사로 반일 감정을 호소한다. 이에 격문이 필요하오. 격문을 통해 일제의 만행과 피압박 민족의 독립결의를 선전한다. 어떻소? 우리는 이미 준비되어 있지 않소?”

안창호의 말에 여운형이 즉답했다. “제가 몇몇 동지들과 함께 선전문과 서류 등을 기초해서 영어와 중국어로 번역하겠습니다. 이 격문을 상해와 북경, 국내 등으로 전달되도록 하겠습니다.”

안창호는 외무차장 여운형과 세밀한 작전을 수립했다.

“좋습니다. 그럼 나는 애국부인회 간부와 구국모험단 간부를 만나 준비시키겠소.” 안창호가 말했다.

“대표단이 필리핀에서 홍콩을 거쳐 북경으로 온다고 하니 도산께서는 수행원을 대동하고 마중하셔야지요. 통역은 황진남과 백영엽이 적임자로 생각됩니다.” 여운형의 제안이었다.

안창호가 명쾌하게 내용을 정리했다. “오, 알겠소. 고맙소. 내용을 정리해 보자면, 애국부인회 명의로 태극기와 유인물을 국내에 미리 보낸다. 국내는 시위와 환영 행사를 동시 시행하도록 준비한다. 상해는 교민단 주최로 방문객 환영 만찬을 준비한다. 필리핀에는 정부 요원을 파견하여 방문단에게 정보를 미리 알리고 선전한다. 안창호는 재미교포를 수행원으로 대동하고 홍콩에서 직접 마중한다. 이상 빠진 사항은 없소?”


안창호는 국무원 영접준비위원장 직권으로 광복군총영 참모장 이탁에게 국내 폭탄 거사 실행 명령을 내렸다. 구국모험단은 국내 작탄 거사 준비에 들어갔다. 이유필은 한진교 등의 후원으로 접대비 예산 1,400원을 확보했고, 상해애국부인회 김순애는 국내와 연계하여 시위에 쓰일 태극기 제작에 들어갔다. 시위 선전문서는 여운형을 중심으로 정인과, 이광수, 주요한 등에게 기초와 번역을 하도록 했다. 의원 영접 사무는 여운형, 여운홍, 이희경에게 위임하고, 본국으로 보낼 서류 준비는 장덕로에게 비밀리에 시켰다.

이렇게 하여 안창호는 외무부 서기 백영엽(1892~1973)과 황진남을 대동하고 7월 11일 상해를 떠나, 홍콩으로 갔으나 헛걸음했다. 태풍으로 인해 일행이 홍콩을 거치지 않고 북경으로 갔다고 했다. 안창호 일행은 8월 14일, 홍콩에서 상해, 남경, 천진을 거쳐 북경에 도착했다.

안창호 일행은 천진에서 중국혁명 지도자 풍옥상의 수석 부하 장지강을 만났고, 남개대학 총장 장백령을 회견하고 한국 학생 교육문제와 항일한중 공동연대를 토론하였다. 이후 북경에서는 본국 동아일보에서 파견한 장덕준을 만났다. 장덕준은 장덕수와 장덕진의 맏형이다. 안창호는 8월 14일부터 일주일에 걸쳐 장덕준, 여운형, 황진남을 통역으로 하여, 포터(S.G.Porter) 상원의원과 스몰(J.H.Small), 베어(W.S.Vare), 디어(L.C.Dyer) 등 9명의 상하 의원들을 개별 방문하고 회담하였다.

미 의원 캠벨은 “미국이 속히 어떤 빌미를 이용하여 대 일본 전쟁을 개시할 수밖에 방책이 없다.”라고 말했다. 그런데 중국대사를 지낸 랜취가 “한국은 자치운동을 먼저 해야 한다.”라고 나섰다. 안창호는 이 말에 즉시 반박하며 목소리를 높였다. 안창호는 자치론과 미국의 위임통치 부당성을 역설하고, 한국의 독립운동은 오히려 중국, 소련과도 동맹할 수 있다는 것을 강조했다. 안창호의 외교는 한국독립의 대의와 공의 원칙에서 조금도 벗어나지 않았다. ‘미 의원단은 한국의 절대적인 독립 의지를 이해했으리라.’


구국모험단은 광복군총영 오동진 총영장과 이탁 참모장과 협의하여 문일민, 안경신, 장덕진 등을 지도자로 임명했다. 그리고 80여 명의 결사대를 구성하여 미 의원단 방한 일정에 맞춰 서울, 평양, 신의주에서 폭탄 거사를 실행하기로 계획을 수립했다. 선발대는 13명을 3개 조로 나누었다. 제1조는 김영철, 김성택, 김최명으로 서울을 맡았고, 제2조는 장덕진, 박태열, 문일민, 안경신, 우덕선으로 평양을 맡았다. 그리고 제3조는 이학필, 임용일, 박치의, 김응식 등이 선천과 신의주 방면을 맡았다.

8월 23~24일 종로경찰서, 이완용의 저택, 서울역 등의 투탄 계획은 사전에 발각되어 전원 체포되었고, 최종판결 10년 형을 받았다. 이들은 1929년 만기 출옥했다.

신의주와 선천 방면의 거사를 맡은 제3조는 박치의가 던진 폭탄으로 선천 경찰서가 폭파되었으나, 박치의는 체포되어 1921년 9월 30일 사형이 집행되었다. 이때 박치의 주변 친인척과 교회 목사 등 20여 명이 공모죄로 체포되어 그중 14명이 2년에서 15년의 징역형을 받았다.

한편 제2조, 안경신 조는 평양에 입성하여 곳곳에 경고문을 발송하고 친일파 처단과 평남 도청과 파출소 등 시설물 공격을 시도하였다. 문일민과 우덕선의 투탄으로 일본 경찰 2명이 폭사하고 건물 일부가 훼손되는 성공을 거둔 뒤, 이 둘은 무사히 서간도로 돌아갔다. 안경신과 장덕진, 박태열의 평양경찰서 투탄은 빗물 때문에 불발되어 해주로 도피했다. 그곳에서 동양척식주식회사를 목표물로 거사를 계획했으나 경계가 삼엄하여 투탄에 실패했다. 당시 만삭이었던 안경신은 피신하여 다음 기회를 노리던 중 1920년 3월 20일 체포되었다. 태어난 지 10일 된 아기를 품에 안고 평양지방법원에서 사형을 구형받아 항소했다. 안경신은 최종 10년 형을 선고받았다. 3개월쯤 후에 아기를 돌봐주던 친정어머니가 돌아가셨다. 1927년 안경신은 가 출옥했다. 7년간 감옥을 살고 나와 오빠 안세균 집으로 가보니 아기는 눈이 먼 장애아가 되어있었다. 그리고 친애하던 동지 장덕진이 1924년 8월 상해에서 중국인과 시비 끝에 총상을 입고 세상을 떠났다는 소식을 들었다. 이후 안경신은 아들과 함께 행방을 감추었다.

1920년 8월 미 의원단 방문 시기에 벌인 이 같은 폭탄 거사에 대해, 경성지방법원은 궐석재판으로 이탁과 오동진에게 징역 10년 형을 각각 선고했다.


(다음 화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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