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화. 중국에 흥사단 설치
안창호는 1920년 1월부터 영국 조계 모이명로 빈흥리 301호에 흥사단 본거지를 마련하고, 미주 흥사단에서 박선제와 김항주를 상해로 불러들였다. 당시 안창호의 숙소와 흥사단 임시 사무소에는 많은 청년이 격의 없이 드나들었다. 독립신문 식자공이던 김산(1905~1938)도 있었고 김필순의 아들 염이도 있었다. 안창호는 청년들의 즐거움이었다. 청년들은 안창호와 토론하기를 즐겼다. 청년들은 노래도 배우고 체력단련법도 익혔다. 또 서양 고전 소설의 주인공을 화제로 대화하면서 ‘여성을 동지로 대하라’는 사랑과 여성에 대한 강좌도 들었다. 1월 중순부터는 안창호가 직접 새로 인쇄된 약법을 들고 흥사단 회원 모집을 시작했다.
흥사단 약법 제2조 목적 조항은 조직의 이념적 정체성을 분명하게 규정하고 있다. “본단의 목적은 무실역행으로 생명을 삼는 충의 남녀를 단합하여 정의를 돈수하며 덕, 체, 지 3육을 동맹수련하여 건전한 인격을 지으며 신성한 단체를 이루어 우리 민족 전도 대업의 기초를 준비함.”
강령은 2대 강령과 3대 수련, 4대 정신으로 구성되었다. 2대 강령은 건전인격과 신성단결이다. 3대 수련은 덕육, 체육, 지육이고, 4대 정신은 무실, 역행, 충의, 용감이다. 목적과 강령을 보면 흥사단 공동체의 정체성이 잘 드러나 있다. 우선 흥사단의 최종 목적은 ‘민족전도대업’ 즉, 민족해방과 문명 부강한 공화국 건설이다. 이 목적에 도달하기 위해서는 단합과 정의돈수가 필수이다. 덕, 체, 지의 분야를 동맹으로 수련하여 스스로 건전한 인격을 짓고 신성한 단체를 이룬다. 이에 남녀가 평등하다. 동맹수련은 약속이다. 따라서 거짓이 없어야 한다. 계파나 지방 분열은 없어야 한다. 흥사단이 샌프란시스코에서 처음 설립될 때 미주로 이주해 온 청년들이 각 지방의 대표를 뽑았다. 발기인 41명이 뽑은 조선 8도 대표들을 창립위원으로 구성했다. 1915년 8월에 약법이 완성되었고 1917년부터 의사부, 이사부, 검사부를 구성하여 단체의 3권분립 체제를 갖추어 민주적 조직의 틀을 마련했다. 흥사단은 비종교 단체이다. 이는 북간도의 대종교나, 국내 천도교와 기독교의 독립운동 단체와 차별된다. 또 정치는 중립이지만 개인의 신념을 인정한다.
흥사단에 가입하는 것을 ‘입단’이라고 했고, 회원을 ‘단우’로 호칭했다. 연령은 17세 이상으로 제한했다. 단우는 특별, 통상, 예비로 구분했다. 입단해서 2개월 이상 수련 과정을 거치면 문답식과 서약례를 거쳐 통상 단우의 자격을 획득한다. 통상 단우에게는 고유번호가 부여되었다. 흥사단은 샌프란시스코에 본부를 두고 있어 중국에 설치되는 흥사단 공식명칭은 흥사단원동임시위원부라 하였다. 국내, 연해주, 중국, 일본을 관할권으로 하였다.
안창호는 상해, 남경, 북경, 천진 등에서 많은 청년을 만나며 ‘흥사단주의’를 설득해 나갔다. 안창호는 입단 문답에 공을 들였다. 샌프란시스코에서 흥사단을 창립할 때도 이러한 원칙이 적용되었다. ‘그렇다. 단우 한 사람을 평생동지로 맞이하는 과정이 쉬운 일은 아니다. 기다려 주고 정성과 공을 들여야 비로소 얻을 수 있는 것, 그것이 사랑의 관계, 바로 동지애다.’ 안창호는 주체와 주체의 일대일 만남 과정에 문답의 원칙을 교본처럼 제시했다. 그래서 문답식은 결연하다. 문답자의 눈높이를 파악하고 그에 맞춰 상대방이 스스로 잠재 능력을 끌어올릴 수 있도록 묻고 답한다. 혹자는 이것을 소크라테스식 문답이라고도 했다. 문답의 내용은 흥사단 약법에 담긴 내용을 원칙으로 했다. 나이, 성별, 지위, 경력, 개성 등을 존중하여 평등한 지위에서 대화를 나눈다. 상대방의 어리석은 대답이라도 결코 꺾어 누름 없이 상대의 심경을 최대한 존중한다. 스스로 생각하고 스스로 답을 찾도록 돕는다. 잠재 능력과 가능성을 스스로 알아차릴 수 있도록 돕는다. 그리고 실천과 행동에 초점을 맞춘다. 그렇게 하여 행동 구현에 대한 의지를 북돋는다. 말 이외에 들어야 할 것을 듣는 맥락적 경청과 추궁하지 않고 질문으로 답을 유도하는 발견 질문의 과정, 종합적인 피드백과 메시지 전달, 그리고 인정과 칭찬이 문답의 핵심이다.
1920년 4월 26일, 도산 안창호는 상해에서 처음으로 문답식을 공개했다. 이 문답은 3시간 남짓 걸렸다. 문답 위원은 안창호, 문답자는 이광수였다. 많은 사람이 모여 이를 지켜보았다. 문답 과정에서 이광수는 결국 ‘흥사단주의는 진리’라고 대답했다.
안창호는 5월 23일, 창립준비위원 위촉을 앞두고 차리석에게 말했다. “동암을 미주에서 『신한민보』 주필로 초청하려는 모양인데....”
차리석은 미주에 동생 정석이가 자리를 잡고 있지만, 본인은 도산 곁을 떠나려 하지 않았다. “형님, 제 자리는 형님을 지키는 이곳 상해입니다. 『신한민보』는 홍언 동지가 계시니....”
“고맙소. 사실은 상해 흥사단 조직은 동암이 지켜주어야 하오. 우리는 신민회 때 청년학우회를 일으키려다가 뜻을 이루지 못했소. 이제 그 일을 나서야 할 때요.”
안창호는 차리석이 고마웠다. ‘개인의 꿈과 성장을 나에게 맡겼다. 아니, 내가 그를 붙들고 있다. 차리석은 『독립신문』 도 지켜줘야 한다. 그리고 흥사단. 흥사단 일의 전권을 위임할 수 있는 사람은 차리석이다.’
“형님, 문답 절차가 있으니 저도 그 절차를 밟겠습니다.” 차리석이 말했다.
흥사단 창립준비위원으로 위촉된 5인은 안창호, 차리석, 손정도, 주요한, 이규서였다. 이들은 1920년 9월 20일 흥사단원동임시위원부 결성을 선포했다. 그리고 12월 29~30일, 흥사단 제7회 대회(대회장 손정도)를 원동임시위원부 주최로 개최하고 본격적인 대외 활동에 들어갔다. 말하자면 재야 독립운동의 여정이 시작된 것이다.
안창호는 대회에서 흥사단 운동은 특별히 경제력 확보에 주력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우리의 주의와 정신이 아무리 좋다고 하더라도 물질과 금력이 없으면 좋은 주의와 정신을 실현하기 불가능하니 우리는 재력의 힘을 기를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공상과 허론이 되고 말 것이다.” 이는 물질적 토대를 마련하는 것이 독립운동의 기초라는 ‘흥사단운동의 실천론’을 강조한 말이다. 즉, 흥사단운동이 정신운동이나 수양운동의 차원을 넘어 독립운동으로 발전할 수 있는 기본 조건으로서 물질적 토대 형성을 강조한 것이다. 안창호는 1920년대 초, 중국의 신지식인들과 교류하면서 당시 유행하던 변증법적 유물론에 근거한 인간의 실천 활동을 탐구했다. 중국 땅을 빌려서 독립운동을 하는 한국인들은 물질적 생활 조건이 열악할 수밖에 없었다. 임시정부는 재정난에 허덕였으며 교민들은 생활고에 시달렸다. 생산과 노동의 결합 원리를 미주에서 터득한 안창호는 중국 활동에서 물질적 생산과 물질적 교통의 여러 조건에 적응하여 물질과 금력의 힘을 기를 것을 강조했다. 안창호는 의식이 생활을 규정 짓는 것이 아니요, 생활이 의식을 규정 짓는다는 사적 유물론의 사상을 빗대어 ‘흥사단주의’ 실천을 강조한 것이다. 안창호의 이러한 사상적 배경은 1920년대 후반 대공주의로 발전하게 된다.
흥사단의 입단과 서약은 1921년에도 이어졌다. 1922~1925년에는 천진과 북경에서 청년 유학생들을 중심으로 흥사단이 결성되었다. 안창호는 1922년 중반 천진에서 국민대표회의 개최를 위한 유세를 벌였다. 안창호는 북경 군사통일회의에서 제창한 국민대표회의 개최를 수용하고, 북경과 천진을 오가며 임시정부를 유지하는 길은 임시정부를 개조하는 일이라고 유세했다. 안창호는 임시정부의 체제를 해체하고 재건하자는 창조파의 주장에 대해 체제를 유지하되 인적 쇄신으로 개조하자는 안을 주장했다. 이는 임시정부의 토대인 국민적 권위가 무너질 것을 염려한 것이다. 북경지역 청년 학생들이 이에 동조했다. 이를 기회로 흥사단에 입단하는 청년들이 늘어났다.
북경지역 교민단체를 지도하던 김위택이 입단하였고, 조영과 이윤재는 1922년 6월 6일 북경 재정상업학교에서 수학하면서 입단했다. 또 유기석, 이용설, 박일경, 장병설, 박일병, 조세훈, 주현칙, 김사원, 전주한 등이 입단했다. 해전에서 농업경영을 시작한 안정근은 상해에서 입단하였고 해전으로 이주한 이탁은 만주에서 입단했다. 김승만, 이영운도 해전으로 이주하여 북경지부 단우가 되었다. 이밖에도 박관해, 송호, 백원현, 심원벽과 정의부 결사대였던 배천택, 김엄해(김성범) 등이 1922년 북경에서 단우가 되었다. 이렇게 해서 북경 ‧ 천진지부 단우는 20여 명 내외가 되었다. 북경지부는 운동, 지식배양, 도덕 수양, 분투적 수련 등의 강령을 실천했다. 그리고 실천 여부를 점검하고 점수를 기록하여 훈련의 의무와 재정의 의무를 충실히 수행하였다. 그러나 이들의 독립운동 노선과 활동은 다양했다.
중국에서 흥사단 단우의 수는 꾸준히 늘어났다. 흥사단 회원들은 흥사단주의 실현을 위해 누구나 근면 성실하게 돈을 벌었다. 금력의 힘이 뒷받침되지 않고서는 여러 방면의 독립운동을 추진하기가 어려운 게 현실이었기 때문이다. 이들은 도산 안창호가 제시한 국민의 의무사항 즉, 개납, 개업, 개병에 솔선수범하며 앞장섰다. 이것이 바로 무실역행 충의용감의 정신이다. 이들은 안창호가 앞장서는 독립운동 사업의 동반자들이었다.
(다음 화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