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화. 청산리 승전과 간도참변
1920년 12월 중순, 북간도 선전원 안정근이 돌아왔다. 안정근은 1919년 7월 내무총장 직속 선전원으로 서간도를 다녀왔고, 이어 황해도 신천으로 연통제 설치 가능성을 타진하고 1920년 5월에 돌아왔다. 그리고 다시 안창호의 밀명으로 왕삼덕, 양명과 한 조가 되어 5월 17일 북만주 삼도구 지방과 노령으로 파견되었다가 돌아온 것이다. 이들은 훈춘에 도착하여 각자 파견지역의 동향을 파악하고 상해와 연결고리인 지방선전부 설치 임무를 수행했다.
안정근은 우수리스크에서 한중러연합선전부를 조직하고 선전지부장이 되어 휘하에 15명의 무장 청년들을 두었다. 이들과 훈춘에서 일본 군경의 동향을 살피고, 정찰과 방어 전투를 하면서 군자금 모금 활동을 하다가 간도참변을 피해 돌아왔다. 왕삼덕은 김좌진 부대에 남았고, 양명은 우수리스크에 남았다. 양명은 부산 출신으로 북경대학교 문과대 학생이었다. 양명은 1925년 8월 귀국, 조선일보 정치부 기자가 되어 조선공산당에 가입하여 활동했다.
안정근은 우선 홍범도가 안창호에게 보내는 안부부터 전했다. 홍범도는 임시정부가 안창호의 지도력을 따르면 될 일을 분규하고 갈등한다는 소식에 안창호를 위로한다는 말부터 전했다. 그리고 신한촌에서 벌어진 일본군의 4월 학살을 응징하기 위하여 봉오동에서 큰 전투를 준비하고 있다고 했다.
4월 신한촌 습격 사건의 전말은 이러했다. 일본은 1918년 4월 시베리아로 출병하기 위해 블라디보스토크에 상륙했다. 1920년 3월 12일, 연해주 독립군들은 러시아 적군파와 연합하여 빨치산부대를 구성하고 백군파가 점령하고 있던 스촨지방(니콜라예프스키)을 해방시켰다. 이에 대한 보복으로 일본군이 4월 4일부터 이틀간 신한촌에서 무차별 학살을 자행한 사건이 신한촌 참변이었다. 4월 참변. 이 사건으로 러시아의 지도자 최재형을 잃었다. 이후 독립군부대 적군파와 빨치산들은 극동공화국이 수립된 치타지역 자유시로 이동했다.
홍범도의 대한독립군부대와 구춘선의 대한국민회 부대는 1920년 6월 4일, 왕청현 봉오동에서 최진동 부대가 봉오동으로 유인해 온 일본군과 싸워 일본군에 큰 타격을 입혔다. 북간도 독립군의 사기는 크게 진작되었다. 그러자 일본군이 이번에는 중국 마적단을 이용하여 훈춘에 있는 일본군 영사관 공격을 사주하고, 이를 빌미로 시베리아 출병 대규모 병력을 훈춘으로 이동시켜 민간인 촌락에 무차별 학살을 자행했다. 이 사건이 10월 17일 발생한 경신참변(간도참변)이다. 일명 간도 독립군 싹쓸이 작전이다. 이때 훈춘에서 일어난 학살 사건을 취재하러 험지로 떠났던 동아일보 기자 장덕준이 일본군에 피살되었다. 장덕준은 불과 2개월 전인 8월, 동양 방문 미의원단을 취재하기 위해 북경으로 특파되어 안창호와 함께 미 하원 외교위원장 포터와 면담을 했던 인물이다.
북로군정서를 이끄는 김좌진과 이범석은 경신참변 소식에도 불구하고 예정했던 10월 19일, 화룡현 서쪽 청산리 계곡 전투를 밀어붙이기로 했다. 이 전투에 홍범도 부대가 가세했다. 청산리 전투는 20일부터 4일간의 격전 끝에 대승을 거두었다. 일본군은 보복 학살을 자행했다. 학살은 3~4개월 동안 계속되었다. 이로 인해 북간도 독립군 촌락이 초토화되었다. 버티기 어려워진 북간도 독립군은 러시아와 중국의 접경지역인 흑룡강성 밀산으로 집결했다. 이들 10개 부대는 통합과 재편성 과정을 거쳐 대한독립군단으로 거듭났다. 총재는 서일, 부총재는 홍범도, 외교부장 최진동, 참모부장 김좌진, 군사고문 지청천이었다. 총 병력 3,500여 명. 제1여단(노은 김규식), 제2여단(안무)이 구성되고, 여단 아래 3개 대대, 9개 중대, 27개 소대가 편성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대 독립군 병력을 다시 추스르기 위해서는 군자금이 절대적으로 필요했다. 지도부 서일, 홍범도, 김좌진은 코민테른의 도움을 청하기 위해 밀산에서 이만을 거쳐 하바롭스크로 갔다가 다시 자유시(스보보드니)로 이동하기로 했다.
청산리 승전소식과 간도참변 소식을 접한 안창호는 북간도 동포들을 구제하기 위한 방법을 모색했다. 안창호는 임시정부 내각의 명확한 태도를 촉구하기 위해서는 역시 이당치국 체제가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독립전쟁 대비, 군 명령체계 확립, 병력 모집, 세금 징수 등을 위해 내각이 먼저 통일 단결되어야만 했다. 그러나 임시정부는 혼란을 거듭하고 있었다.
대통령 이승만은 구미위원부 워싱턴 지부에서 호령하며 임시정부의 행정권과 재정권을 장악하려고 안간힘을 썼다. 참다못한 의정원 의장 손정도는 이승만에게 장문의 서한을 보내 상해로 와서 부임하라고 독촉했다. 이승만은 워싱턴을 떠나 1920년 6월 22일 하와이에 도착했다. 이후 반년을 끌다가 마침내 비서 임병직((1893~1976)을 수행하여 12월 8일 상해에 도착했다. 임병직은 부여 출신으로 1913년 이승만의 주선으로 도미 유학한 인물이다. 이승만과 임병직은 하와이에서 중국인 시신을 나르는 배를 타고 밀항했다. 임병직은 훗날, 장택상 후임으로 외무장관에 오르게 된다.
정부 요인들과 교민단은 대대적인 환영식을 개최했다. 안창호는 내심 다행한 일이라고 생각했다. 어찌 됐든 ‘이제 그가 제 자리로 부임했으니 임시정부는 대통령의 지도력에 달렸다.’ 안창호는 현재 내각에서 벗어날 생각을 하고 있었다.
20일 후, 12월 28일 이승만은 대통령에 취임했다. 환영식장에서 이승만은 임시정부 운영에 대한 어떠한 비전이나 청사진도 제시하지 못했다. 이승만은 취임사에서 위임통치 청원 경로에 대한 변명으로 일관했다. 그리고 취임 일성으로 대통령 권한을 발동했다. 모스크바 대사로 파견 나가 있는 한형권을 즉시 소환하고, 대신 이희경과 안공근을 파견할 것을 결정했다. 그러나 때가 늦어 뜻을 이루지는 못했다.
사실, 이승만은 워싱턴에서 이동휘의 레닌 자금지원 소식을 접했다. 이승만은 워싱턴에서 구미 열강의 냉대를 받던 중, 소련을 상대로 200만 달러 차관 조건과 담보 조건을 제시한 바 있었다. 철도부설권, 광산채굴권, 관세 등이었다. 차관 목적은 군사비와 외교선전비, 기업자본 조달이었다. 상환 기간은 독립 이후 5년으로 하였다. 이러한 문건은 이승만의 「상해체류기」(1920.12~1921.5)라는 문서로 알려졌다.
그러는 사이에 이동휘 총리는 레닌의 지원자금을 소리 없이 기다리고 있었다. 이승만 측과 이동휘 측의 이기적인 구도는 청년 국무위원들을 분노하게 했다. 그리고 그 혼란은 독립운동 자금 조달 문제로 표면화되었다.
1920년 다사다난했던 경신년 한 해가 저물어 가고 있었다. 안창호는 한 해를 돌이켜 보았다. 안창호는 국제정세를 통찰하여 이에 대응한 거시적 전략을 수립했다. 좌우를 망라한 치밀한 외교활동, 내각 통합, 독립전쟁 선포, 자금 확보 비전, 선전 활동 등이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이승만과 이동휘의 화합을 위해 온 힘을 다했다. ‘일은 사람이 한다. 진리는 따르는 자가 있다. 그러므로 정의는 반드시 이루는 날이 온다. 악평에 휘둘리지 말고, 소심하게 뒤로 물러서지 말자.’ 안창호는 결심했다. ‘정부 참여는 본디 내가 원했던 자리가 아니다. 나는 흥사단에 공을 들여 모범적인 공동체를 만들어 갈 것이다. 임시정부뿐만 아니라 독립운동 어떤 분야에서든 전문성과 창의력을 가진 인재가 활동하도록 흥사단이 도울 것이다. 이것이 내가 할 일이다.’
그러나 안창호는 임시정부에 없어서는 안 될 존재였다. 혼미하게 돌아가는 임시정부 사정은 안창호를 자유롭게 놓아주지 않았다.
(다음 화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