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은명 Apr 24. 2023

제9장. 민족혁명의 길 #2/10

2화. 임시정부경제후원회

2화. 임시정부경제후원회    

 

 안창호는 1926년 5월 16일 상해에 도착했다. 안창호가 미주를 순회하는 동안 일본은 1925년 ‘5.12 치안유지법’을 제정 공포하고 사회주의 운동의 억압과 식민통치의 체제 강화를 위해 사상통제법을 발동했다. 치안유지법으로 인해 민족혁명과 계급혁명의 합작을 추구하는 민족유일혁명당 운동의 험로가 예상되었다. 상해 정국은 흉흉했다. 청년 김영진이 밀정을 쏴 죽이고 상해일본영사관에 폭탄을 던지고 체포되었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안창호는 조상섭 집에서 유숙하기로 했다. 조상섭은 4월 26일, 고국에서 순종이 승하했다는 소식부터 전했다. 안창호는 조상섭 목사와 함께 간단한 추모예배를 했다. 

 순종(1874~1926)은 고종의 둘째 아들이다. 1907년 고종이 일제의 강압으로 폐위된 후 황제 자리를 물려받고 이토 히로부미와 한일신협약을 체결했다. 이후 일본인 관리가 개입하는 차관(次官)정치가 시작되었고, 군대가 강제해산되었으며 1909년 기유각서로 사법권마저 빼앗겼다. 순종은 즉위 3년 만에 황제의 자리에서 물러났고 대한제국은 국권을 상실했다. 이후 순종은 창덕궁에 거처하면서 차츰 몸이 망가졌고, 결국 1926년 4월 26일 심장마비로 비참한 최후를 맞았다. 온 국민이 울분을 토하며 애도했다. 6월 10일 순종의 장례식날 거국적인 만세운동이 일어났다. 학생 106명이 검거되었다.


 도착 다음 날, 안창호는 의정원을 찾아가 국무령 취임 거부 의사를 밝혔다. 안창호는 의정원 의장석에 앉아 있는 이강과 눈을 마주쳤다. 이강은 의정원 13대 의장이자 교민단 단장을 겸하고 있었다.  ‘이강이 이 문제를 어떻게든 처리할 것이다.’  

 그날 저녁, 이강이 조상섭의 거처로 안창호를 찾아왔다. 이강이 방으로 들어서면서 말했다. “도산, 이제 조금 쉬셨소? 나이를 먹어 갈수록 여독도 오래가긴 할거요. 미국 소식이 궁금해서 견딜 수가 있어야지. 하하.” 

 “어서 오게, 친구! 의정원 의장 자리에 앉아 있을 줄은 미처 몰랐소. 어찌나 반갑던지. ‘이제 의정원이 제대로 돌아가겠군’ 하고 생각했지.” 안창호도 먼저 찾아와 준 친구가 고마웠다.

 “우선 업무 이야기부터 하세! 국무령 후임자로 누구를 생각하고 있소?” 이강이 물었다.

 “우리 홍진을 만나서 같이 이야기를 해 봅시다. 나는 그 사람의 인품을 신뢰하고 있다오. 그래도 한성정부를 탄생시킨 지도자가 아니오?” 안창호가 신중하게 말했다.

 “좋소. 그럼 수일 내로 같이 만나 봅시다. 임시정부를 공백 상태로 놔둘 수는 없으니.” 이강이 엄격한 어조로 말했다.

 ‘역시 내 동지다. 맡은 바 직임에 빈틈이 없다.’ 안창호는 흐뭇한 표정으로 생각했다. “이제 미국 소식을 전해도 되오?” 안창호가 소년처럼 굴었다.  

 이강의 얼굴이 밝아졌다. “다들 잘 있겠지? 우리 제수씨도...! 그래, 임준기도, 차리석 동생 정석이도... 아, 황사용이 있었지. 이대위도...!” 이강은 허둥지둥 그리운 이름들을 쏟아냈다. 

 안창호는 웃었다. “그립소? 20년 세월이오! 세상을 떠난 이도 있고, 귀국한 이도 있고. 아, 혜련은... 말도 마오. 나는 늘 혜련한테 빚을 지고 있는 죄인 아니오? 떠돌이니까.... 그런데 부부가 같이 있으면 늘 투닥거리게 되더군. 잔소리가 여간 아니었소. 하하. 두세 달은 버티겠습디다. 아이들도 어색하고.... 아직 어리긴 하지. 2층 단소에서 장기 두는 것도 하루 이틀이지. 그래서 집을 벗어났소. 태만한 일상을 즐기려고 공산당원으로 모함까지 불사하고 갔던 것은 아니니까. 내가 지금 횡설수설하고 있는 것이오? 하하.”

 이강은 ‘저 말을 어찌 다 참고 있었누?’ 하고 생각했다. “그래서 집을 벗어나 어디로 순회하였소? 이승만은 만났소? 서재필 선생도?” 

 “어째 이번 방문이 마지막이라는 생각이 자꾸 듭디다. 그러면서 내가 없어도 잘 돌아가고 있는 동지들의 일상을 살폈지. ‘이민자들은 결국 조국을 잃어버리고, 이렇게 타국에 정착하게 되는 것은 아닐까?’ 하는 회한도 듭디다. 조국을 빨리 되찾아야 고향을 갈 텐데.... 그래서 슬펐소. 집을 떠나기 전날 산에 올라가 실컷 울었다오.” 안창호는 수다쟁이로 변해 있었다. 

 이강이 말했다. “짐작되오. 이해할 수 있어. 도산은 흐트러진 퍼즐을 애써 맞추고 왔겠지. 그래도 그런 동지들이 잘 있다는 것이 얼마나 큰 위안이오. 국민회는 이래저래 퍼즐 쪼가리가 되었지만, 그나마 서북미 국민회가 유지되고 있어 멕시코와 쿠바까지 영향력을 갖고 있다고 하니 다행이오. 흥사단은 어떻소?”

 안창호가 속내를 털어놓았다. “흥사단은... 그동안 시카고, 아이오와, 뉴욕 지방으로도 조직이 생겼더이다. 로스앤젤레스와 샌프란시스코 주변으로도 조직이 확대되었어. 유학생들이 늘어난 덕이지. 단우들 생활기반은 주로 농장이나 상점을 꾸려 살고 있고. 단결과 인격 훈련을 위한 기초 훈련단체를 독립운동의 기반으로 하려 했던 애당초 생각이 잘못된 것 같지는 않아 위안이 되더이다. 그러나 이들의 독립운동 의지를 북돋기 위한 정치의식 훈련은 꼭 필요하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소. 미국 땅을 헤매면서 온통 만주 독립군들 생각뿐이었소. 생존하고 있다는 자체만으로도 위대한 독립군들을 어떻게 돕지? 하는 생각 말이오.”

 이강이 엄지손가락을 치켜세우며 감탄했다. “오, 역시 도산이오. 미국 땅에서 만주 독립군 생존을 걱정하는 지도자!”

 안창호가 심각한 표정으로 말했다. “자네가 말했던 이상촌에 내가 집착하는 이유도 분명해졌다오. 만주 독립군들이나 미주 개척 한인들이나 같은 시대, 같은 역사를 살아가는 게 아니던가? 미주와 만주는 너무 먼 거리로 떨어져 있지만, 이들이 하나가 되어 민족혁명에 도달해야 하는 이유는 분명하니까. 만주는 민족혁명의 군사력이 되고 미주는 민족혁명의 경제력이 되고. 경제와 정치는 평등해야 하는 것, 흥사단은 이를 위한 모범단체가 되어야 해.”

 이강은 안창호가 주도면밀하게 초기의 독립운동 방략을 보완해 나가고 있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현재 도달한 생각은 무엇인가?”

 안창호가 진지하게 말했다. “임시정부의 분열은 이승만 탓이 아니었소. 그걸 확인했지. 외교냐 무력이냐 또는 민족주의냐 공산주의냐 하는 갈등이 본질이었소. 국민대표회의도 결국은 이념대립으로 깨진 것이고.... 조국독립에 노선갈등이라니, 말도 안 되지 않소? 이념을 초월하는 민족혁명론으로 정당을 구성해야 하오. 굳이 이념이라고 한다면 대공주의라고나 할까?”

 이강이 감탄했다. “대공주의라...! 대공주의로 민족혁명의 전략을 수립한다. 오, 대단해! 바다 위를 떠돌면서 큰 생각을 정리하고 돌아온 셈이구먼. 새로운 구상과 전략을 말이야. 역시 선구자야!”

 안창호는 진지하게 말했다. “나는 임시정부를 포기할 수 없소. 임시정부를 살려야 해. 그래서 만주 군정부 실세들이 임시정부를 챙길 수 있게 도와주고 싶소. 홍진이 국무령 자리에 취임한다고 약속하면 나는 당장 임시정부경제후원회를 조직해서 책임을 맡을 생각이오. 홍진도 나도 민족혁명에 공감하며 유일당의 필요를 절감하고 있을 거요. 나는 미주 흥사단 동지들을 믿고 경제 평등의 정치를 위해 나서볼 생각이오.”

 이강이 고개를 끄덕끄덕했다. “미주 방문 효과가 아주 크군. 대단해. 이승만의 의중도 파악했고, 서재필의 후원도 얻었고. 무엇보다도 청년 유학생들의 호응과 지지를 받았으니 이제 도산이 지도력을 발휘하면 되겠구려. 먼저 중국 흥사단이 모범이 되어야 하겠고. 임시정부에서 일꾼이 필요할 때 언제든 나설 준비가 되어있는 흥사단이 되어야겠지. 나도 노력하겠소.”      


 안창호와 이강은 홍진을 만나러 나선 길에 만국공묘 노백린 묘소를 찾아 참배하였다. 마음이 아팠다. 동지들은 이렇게 하나둘 떠나가는데 독립의 길은 왜 이리 멀고 험할까 하고 탄식했다. 두 사람은 노백린의 집을 방문해 아직 눈물이 마르지 않은 부인과 아들을 위로했다. 그들이 앞으로 살아갈 일이 걱정되었다. 신민회로 시작된 인연. 노백린(1875~1926)은 유길준이 사숙했던 후쿠자와 유키치의 ‘게이오의숙’ 출신이었다. 노백린은 유길준의 흥사단에 가입했고, 신민회 동지이자 대성학교 명예교사였다. 그만큼 안창호와는 인연이 깊었다. 

 대한인국민회 중앙총회에서 공군창설 계획을 수립하고 1920년 7월 5일 윌로우스 비행학교를 출범시킬 때, 안창호는 애초 계획대로 통합정부 군무총장 노백린을 북미로 초청하게 하였다. 이승만 대통령 상해 부임 전이었고, 이동휘가 국무총리로 국무회의를 이끌어 갈 때였다. 노백린은 1918년 11월 하와이에서 박용만 편에 서서 『태평양시사』 사장 겸 주필로 활동하고 있었다. 임시정부의 명령을 받은 노백린은 하와이와 서북미 교민사회를 순회하면서 독립전쟁 준비에 힘을 모을 것을 호소했다. 1920년 1월 샌프란시스코 국민회 중앙총회는 노백린을 대대적으로 환영했다. 곽림대, 이재수, 김종림, 신광희 등 흥사단 단우들과 레드우드 비행사관학교 졸업반 오하림, 이용선, 이초, 한장호, 이용근, 장병훈 등이 자리를 같이했다. 비행학교는 제1차 세계대전 이후 도래할 미래 전쟁이 공군력에 달려 있다는 확신 속에서 설립되었다. 비행학교 설립은 안창호가 새롭게 도전하게 된 독립전쟁준비 전략의 하나요, 흥사단 동지들과 함께 나눈 꿈이기도 했다. 노백린은 누구보다도 그러한 생각을 가지고 준비해 온 안창호를 잘 알고 있었다. 노백린은 환영에 대한 화답으로 안창호를 치켜세웠다. <우리는 불가불 안창호의 자취를 밟을지라. 안창호는 일신의 욕망도 없고 구습의 구분적 사상도 없는 정말 애국자라. 이는 내가 공연히 사의로 하는 말이 아니오. 안창호의 과거 역사와 현금 활동은 넉넉히 나의 선언을 증명하는 바외다(흥사단 100년사 212쪽).> 노백린은 안창호에게 친형님 같은 존재였다. 노백린은 안창호와 함께 통합임시정부를 성공적으로 안착시키기 위해, 또 이승만과의 화합을 위해 부단히 노력했었다. 

 묘소를 참배하면서 이강은 노백린을 떠나보낸 안창호의 심경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다.    

   

 안창호와 이강은 홍진을 찾아가 국무령 취임 설득에 성공했다. 홍진은 안창호의 유일독립당 운동에 동의했다. 홍진과 안창호는 임시정부 안과 밖에서 서로 협력하기로 결의했다. 안창호는 임시정부경제후원회를 조직하고 책임자가 될 것을 홍진에게 약속했다. 


(다음 화에 계속) 

이전 01화 제9장. 민족혁명의 길 #1/10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