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화. 안창호의 임시정부 복귀
1926년 4월 22일. 안창호는 홍콩에 도착했다. ‘누구부터 만나볼까? 여운형을 만나자. 그는 중국 사정을 통찰하고 있을 것이다.’
안창호는 시드니를 떠나 홍콩으로 향하는 배 위에서 내내 중국 일을 생각했다. 이제부터 민족유일당의 험로를 걸어가려면 중국의 사정부터 알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손문을 잃은 중국 국민당의 내부 사정이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지 궁금했다. 손문은 1924년 1월에 소련과 연합하고 코민테른의 의견을 수용한다고 했었다. 손문은 중국 공산당과 국공합작을 이루었다. 그리고 소련의 지원을 받아 혁명군 양성을 위한 황포군관학교를 세웠다. 초대 교장은 장개석이었다. 국민당은 연소용공·공농부조(聯蘇容共·工農扶助)를 제창하며 본격적인 군벌 타도에 나섰다. 손문 사후, 국민당은 1925년 7월 1일 광동에 국민정부를 수립했다. 이로써 당과 정부와 군이 성립된 것이다. 이들이 과연 이당치국의 모범이 될 것인가? 우리 민족의 혁명을 위한 이당치국의 전략적 모델이 되어 줄 것인가?
안창호는 홍콩에서 상해 타스통신사로 전보를 쳤다. 여운형은 1925년부터 타스통신에서 촉탁으로 일하고 있었다. 그는 국민당과 중국공산당에 모두 적을 두고 있었다.
뜻밖에도 여운형은 업무차 광동에 와 있으므로 홍콩 호텔로 직접 마중 나오겠다고 했다. 두 사람은 호텔 정원 해변에서 해후했다.
여운형이 활짝 웃으며 다가왔다. “선생님, 무사히 도착하셨군요! 혹시 미국에서 아예 붙들리신 것은 아닌가 했습니다. 하하.”
안창호도 화답했다. “몽양, 보고 싶었소! 마치 애인을 기다리는 심정으로 해변을 거닐고 있었소. ”
여운형이 순방 소감을 물었다. “선생님 주변은 모두 무탈하시지요? 이승만도 만났습니까?”
안창호가 미소 띤 얼굴로 여유롭게 말했다. “미국과 중국은 사뭇 다르오. 내가 모스크바는 못 가봤지만, 미국은 지나치게 소련을 적대하고 있더이다. 미국 한인들 사이에 공산주의에 대한 적개심을 키우는 이유를 모르겠소. 아, 몽양은 미국에 가볼 기회가 없었지? 다음엔 기회를 만들어 내가 꼭 수행하리다. 우리는 양 강대국을 잘 판단해야 할 것 같소.”
여운형이 웃었다. “선생님을 수행하여 미국을 방문하는 그런 날이 꼭 왔으면 좋겠습니다. 선생님은 양 강대국에 대해 균형감을 가지고 계시니... 역시 우리의 지도자십니다.”
안창호도 활짝 웃었다. “어서 대한이 광복되어 그런 날을 기대해 봅시다. 꿈을 꿔야 현실이 된다. 그렇지 않소? 나는 미국에 있는 동안 온통 민족혁명 네 글자에 매달려 있었다오. 이승만은 좌우합작은 불가할 거로 봅디다. 손문이 추구했던 이당치국에 대해 어차피 국공합작은 깨질 것이라며 부정적이었소. 그래도 우리가 갈 길은 민족유일당을 건설하는 일. 거기까지는 꼭 도달해야 하는데....”
여운형이 말했다. “참, 임시정부는 이상룡 선생님을 간신히 국무령으로 모셨는데, 내각 구성에 실패하여 간도로 되돌아갔습니다. 양기탁 선생님도 거절하였으니 도산 선생님을 차기 국무령으로 모셔야 한다는 여론이 팽배합니다. 선생님은 이도 거절하시겠지요? 정부 내에 계실 때 좀 더 잘들 할 것이지. 하다 하다 난국에 빠지니까 선생님이 다시 그리운가 봅니다.”
안창호가 눈을 크게 떴다. “내가? 국무령? 아니 되오. 절대 그럴 수는 없소. 이승만을 만나는 것으로 겨우 악평과 오해를 해명하고 왔는데.... 나는 임시정부를 어떻게든 도울 것이오. 재정이 큰 문제이니 경제후원회를 조직한다면 내가 책임자를 자임하리다.”
“저는 늘 선생님 편입니다. 선생님이 가까이 계시면 늘 힘이 나지요.”
“그 말을 들으니 왠지 으쓱해지는 것 같소. 우리는 한편이오. 하하. 광동에는 어찌 와 있는 거요?”
“아, 참, 그것을 말씀 안 드렸네요. 지난 1월에 중국국민당 전국대표대회가 광동에서 있었습니다. 2차 대회였지요. 소련대사 카라한 등의 권유로 타스통신사가 저를 파견했습니다. 제가 ‘중국 국민혁명의 전 세계적인 사명’을 주제로 영어 연설을 했습니다. 나름, 열변을 토했지요.”
안창호가 감탄사를 날렸다. “오, 장하오! 역시 몽양이오. 그래, 연설의 요지는 무엇이었소?”
여운형이 으쓱해서 연설의 요점을 말했다. “중국의 연소용공, 공농부조의 정책을 지지한다고 말문을 열었습니다. 아세아 대륙은 지금 반일 민족혁명의 과제를 안고 있다. 그러니 대국인 중국이 일본을 넘어 어떤 나라를 세울 것인가 하는 문제는 작은 나라들의 초미의 관심사다. 특히 대한민국은 상해에 임시정부를 두고 있다. 우리는 중국의 영향을 받지 않을 수 없다. 도와 달라. 반제, 반일의 통일전선을 형성해서 반일운동의 과제부터 해결해 나가자.”
안창호가 경청하면서 연이어 감탄했다. “오, 역시 몽양이오! 좋소. 손문 사후에 지도권은 장개석이겠지? 공산당 지도자는 누구요?”
여운형이 대답했다. “국민당은 당분간 장개석과 왕정위 연합체계로 갈 거 같고, 공산권은 주덕과 주은래가 주목됩니다. 주은래는 황포군관학교 내에서 2인 자로 군법회의 위원장입니다.”
“주은래라...!”
“주은래는 프랑스 파리대학 정치과 출신입니다. 유학하면서 유럽의 다양한 혁명 사상을 공부했다고 합니다. 특히 공산주의에 심취했는데, 본국에서 1921년에 공산당이 창당되자 이듬해 파리에서 중국공산당지부를 결성했습니다. 독일, 벨기에 등 유럽 각지에 유학 중인 중국 청년을 규합했지요. 그리고 1924년에 귀국한 인재입니다. 1898년생이라고 하더군요.”
“1898년생? 우리의 김원봉 동지가 생각나오. 인물이지.” 안창호가 말했다.
여운형이 웃었다. “그렇습니다. 떠오르는 세대들입니다. 대한의 혁명사업을 이끌어 나갈 차세대 지도자들이지요. 게다가 주은래는 아주 미남 청년입니다.”
안창호도 큰 소리로 웃었다. “그렇소? 옛말에 ‘인물값’이라고 하지 않소. 빈말은 아닐 터, 하하.”
여운형은 말을 이었다.
“대회가 끝나고 장개석을 독대했습니다. 한인 청년들을 황포군관학교에 입교시켜 달라고 했더니 흔쾌히 수락했습니다. 임정과 한국노병회도 노력을 많이 했습니다. 임정 경무국장 손두환이 1925년에 광주(광저우)로 활동무대를 이동했습니다. 그의 공이 큽니다. 중산대학 입학이 수월해졌지요. 김원봉은 김성숙과 같이 손문을 직접 만난 후 입교했습니다.”
안창호는 왠지 먹구름에서 빠져나온 듯한 기분이 들었다. “만주 통의부나 노령지역 청년들도 입교하면 좋겠군. 이런 분위기가 계속된다면 우리의 혁명사업에도 청신호가 되는 셈이지. 아무튼 그동안 몽양이 수고가 많았소. 초점을 흐리지 않고 유일당 운동에 매진할 수 있는 기반이 된 셈 아니오?”
여운형이 사려 깊은 눈빛으로 조심스럽게 말했다. “국공합작의 지속성이 관건이지요. 국공합작으로 혁명이 완수된다면 우리 민족혁명에도 큰 힘이 될 것입니다.”
안창호와 여운형은 해변을 걸었다. “임시정부가 빨리 안정되어야 할텐데.... 참, 노백린 장군이 돌아가셨다는 소식을 들었소. 맞소? 그 양반 심장병이 있었는데....” 안창호가 걱정스럽게 말했다.
여운형이 담담하게 소식을 전했다. “네, 임시정부 사회장으로 만국공묘에 안치했습니다. 임시의정원은 정족수가 미달되는 파행을 거듭하고, 노백린 국무총리는 사임서를 제출했었지요. 사람이 없으니까 다시 군무총장, 교통총장 등을 떠안았지만, 임시정부의 재정이 너무 열악한 상황이다 보니.... 그 누구라도 힘들었을 것입니다.”
안창호의 얼굴이 다시 어두워졌다. “대안을 빨리 찾아야 하오. 임시정부를 이렇게 놓아둘 수는 없소.”
안창호는 여운형과 헤어져 배편으로 상해로 출발했다. 여운형은 광동에서 할 일이 더 남아 있다고 했다.
그동안 상해에서는 1926년 2월 28일 의정원이 열렸다. 의정원에서는 초대 국무령 이상룡을 면직 처리하고 이상룡이 추천한 양기탁을 임명했었다. 그러나 양기탁은 만주를 떠날 수 없다면서 안창호를 추천하고 즉각 사퇴했다. 의정원은 1926년 4월 29일 양기탁을 해임 처리했다. 그리고 5월 8일 안창호를 새 국무령으로 선출했다. 한동안 무주공산이던 정부와 의정원은 12대 의장으로 이강이 취임하면서 다소 안정되어 갔다.
(다음 화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