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화. 밝아오는 새벽, 『동광』
홍진을 만나 국무령 취임 수락을 받아 낸 안창호는 6월 26일 남경 동명학원으로 갔다. 안창호가 부재한 동안 동명학원은 선우혁과 선우훈 형제 그리고 차리석과 장덕로가 잘 이끌어 가고 있었다. 어느새 개교 3년 차가 되었다. 그런데 동명학원 신축교사 준공을 눈앞에 두고 화재가 발생하여 모두 소실되었다는 비보가 있었다. 조상섭은 일본의 음해공작일 것이라고 했다. 흥사단 동지들은 이 일로 의기소침해 있었다.
안창호는 이들을 격려했다. “우리가 추진하는 일에 어찌 방해가 없겠소. 그렇다고 우리가 뭘 잘못한 것이 아니지 않소? 그러니 우리는 하려던 일, 교육사업에 더욱 매진합시다. ‘뜻이 있는 곳에 길이 있다.’ 나는 이 진리를 굳게 믿소. 20년 전, 1906년 4월에 샌프란시스코에서도 비슷한 해를 입었던 일이 생각나오. 우리 힘으로 마련한 공립회관이 지진으로 소실되었지. 대지진으로 누군가의 목숨을 잃지 않은 것만으로도 감사했었다오. 우리는 고종께서 일본영사를 통해서 내리신 위로금마저 거부하면서 우리 자력으로 말끔하게 회관을 다시 지었소. 자, 우리 모두 다시 힘을 냅시다!”
차리석이 동지들 앞에서 그동안 진행된 일들을 보고했다. “먼저 『독립신문』 폐간 소식입니다. 일제의 탄압이 더 거세지고 교묘해지는 데다가 재정이 극도로 어려워져 부득이 1925년 9월 25일 제189호 신문을 끝으로 막을 내리게 되었습니다. 두 번째는 국내 이광수의 보고입니다. 작년 10월부터 본격적인 논의를 시작했던 수양동맹회와 동우구락부가 11월에 전격 합동을 결의했답니다. 명칭을 수양동우회로 결정했다는 보고서를 접수하고, 올 초 1월 8일 원동위원부가 이를 승인했습니다.”
안창호가 힘없이 말했다. “그런 일들이 있었군요. 국내 ‘수양동우회’는 수양이란 두 글자를 빼면 더 좋을 뻔하였소. 나름 국내 사정이 있기는 하겠지만 정치결사로 활동할 의지가 있었으니 말이오. 『독립신문』 폐간은 짐작하고 있던 바요. 그러나 안타깝소. 정부 기관지가 없으니 정부 소식은 어떻게 알려야 하나 새로운 고민을 해 봐야겠소.”
차리석이 안창호의 기분을 살피며 말했다. “주요한이 미주 본부에서 보내온 2,500달러를 수령하여 지난달 귀국했습니다. 가서 동광사를 설립하고, 지난달 5월 20일에 『동광』 잡지 창간호를 발행하였습니다. 형님의 산상수훈, ‘동포에게 고하는 글’이 연재되고 있습니다.”
안창호는 시침을 뚝 떼고 말했다. “미주 단우들의 공이 크오. 미주 본부는 우리 원동위원부를 믿고 지지하고 있소. 『동광』을 국내에서 발행하는 이유도 분명하오. 국내 조직에 불안 요소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 종래에는 국내 조직이 튼튼하게 기반을 다져야 하는 것 아니겠소? 미주와 중국과 국내의 삼위일체. 차리석 동지가 수고 많았소. 훌륭하오. 그런데 동광이란 제호는 누가 지었답니까?”
“주요한이 전한 바에 의하면 김려식 동지가 지었답니다.” 차리석이 말했다.
“오, 김려식 동지라.... ‘밝아오는 새벽’, 희망의 그 날. 참으로 좋은 이름이오.” 안창호가 미소를 띠며 말했다.
차리석은 안창호의 표정이 밝아지자 다소 안심이 되었다. “또 있습니다. 이탁 동지가 올 초에 길림성으로 이주하고, 손정도 동지와 함께 액목현 교하부근의 수전을 탐사하고 왔다고 보고했습니다.”
안창호가 차분한 어조로 말했다. “손정도 동지가 동명학원 개원식 이후 길림으로 이주한 사실을 알고 있었소. 가서 이상촌 부지 탐사와 목회 활동에 전념하기 위해서라고 했지만, 사실은 건강이 좋지 않아 걱정이오.”
“이탁의 전언에 의하면 손정도 동지는 길림에 신첩교회를 세우고 활동에 들어갔다고 합니다.” 차리석이 보고했다.
“내 조만간 길림을 방문해야겠소.” 안창호는 이탁과 손정도를 만나보고, 민족유일당 유세를 위해 만주 방문계획을 세웠다.
홍진은 7월 8일, 임시정부 국무령에 취임했다. 이날 밤, 안창호는 상해 삼일당에 140명이 모인 자리에서 ‘임시정부 존립과 대혁명당 조직’을 주제로 강연했다.
“우리가 성취하려는 것은 민족혁명이다. 장래 건설될 정체를 위하여 싸우지 말고 주의를 다투지 말고 이천만 동포가 공동 일치하여 이민족과 싸워야 한다.”
강연이 끝나고 임시정부경제후원회 발기회를 결성했다. 이 자리에서 108명이 찬성하고 후원을 결의했다. 열흘 후인 7월 19일, 삼일당에서 임시정부경제후원회 창립총회를 개최하였다. 집행위원장은 안창호가 스스로 자임했다. 조상섭, 진희창, 김보연, 하상린, 전광호, 김순애, 최승봉, 조마리아 여사가 진행위원에 나섰다. 안중근의 어머니 조마리아 여사는 안창호가 종종 챙겨드리곤 했는데, 안정근이 해전 농장일로 바빠서 대신 모금위원으로 나섰다고 했다. 최승봉은 특별히 이강이 애틋하게 챙기고 있던 고향 후배인데 건강이 좋지 않았다. 조마리아 여사와 최승봉은 이듬해인 1927년 7월과 12월에 각각 세상을 떠났다. 이유필, 임필은, 염온동이 회계검사로 뽑혔다. 흥사단 동명학원이 있는 남경에서도 뒤따라 임시정부경제후원회가 조직되어 선우훈이 끌고 나갔다.
틈새에 광주에서 돌아온 여운형이 남경을 다녀갔다. 임시정부경제후원회에 4백 원을 헌납하면서 안창호에게 중국 정세에 대한 정보를 전했다. 여운형에 따르면, 장개석이 7월 9일 국민혁명군 총사령관에 취임하고 본격적인 북벌을 시작했는데 조만간 상해로 진군하여 아지트를 상해에 설치할 것 같다고 했다. 여운형은 또한 국공합작이 깨질 것 같다고 우려했다.
국무령 홍진은 8월 18일 스스로 외무장을 겸직하고, 조상섭, 이유필, 최창식, 조소앙, 김응섭으로 내각 구성을 마쳤다. 김응섭(1877~)은 안동 출신이며 평양지방법원 판검사를 역임하다 조선공산당 만주총국 간부로 활동하는 좌파 인사였다. 홍진 국무령은 3대 시정방침을 선포하였다. “비타협적 자주독립의 혁명운동, 전 민족을 망라한 유일 정당조직, 전 세계 피압박민족과 협동전선 조직” 등이다.
홍진은 만주에서 적극적으로 민족유일당 운동을 촉진하기 위해 1926년 12월 10일 6개월 만에 국무령을 사퇴했다. 같은 시기에 김응섭, 최원택, 조봉암 등은 만주지역에 당원 훈련과 사회주의 교육을 위해 흑룡강성 목단강 시 영고탑에서 조선공산당 만주총국을 조직했다. 이들은 ‘조선민족해방운동의 근본문제’라는 문건을 발표하고, 민족유일당 전선의 시급함을 강조하면서 민족혁명당 결성을 촉구하고 나섰다.
홍진 국무령이 사퇴한 후, 13대 의정원은 12월 14일, 새 국무령으로 김구를 선출했다.
(다음 화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