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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은명 Apr 26. 2023

제9장. 민족혁명의 길 #4/10

4화. 유기석과 길림으로, 3차 만주 순회

4화. 유기석과 길림으로, 3차 만주 순회     


 홍진 국무령 취임과 안창호의 임시정부경제후원회 발족으로 임시정부는 활기를 되찾는 듯했다. 무엇보다도 독립운동의 방향이 민족유일혁명당 조직으로 결집되는 분위기였다. 이동녕과 이시영을 비롯하여 조소앙 등이 적극적으로 호응해왔다. 흥사단 소속인 이유필과 조상섭, 송병조 등이 임시정부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었다. 

 안창호는 북경과 남경, 상해를 오가며 끊임없이 유일혁명당 유세와 이상촌 답사 행보를 이어갔다. 마침 동서 김창세 박사가 세브란스의전 교수를 사임하고 가족과 함께 상해로 왔다. 국내에서는 수양동우회에 적을 두고 활동했으나 안창호가 있는 상해에서 활동할 결심을 굳혔다. 김창세는 공중위생에 종사할 인재양성을 위해 미국 록펠러재단 지원을 요청하고, 상해에 위생교육 감독관으로 부임했다. 안창호는 김창세 박사의 전공 분야가 광복 이후 조국의 보건과 위생 분야에 큰 공헌을 할 것으로 믿고 김창세를 각별히 아꼈다. 안창호는 9월이 되자 김창세를 흥사단 북경과 천진 지부로 안내했다. 그리고 해전에서 농장을 경영하고 있는 안정근을 만나 보건위생 실태 파악을 하게 했다. 또한, 요동만 해변 도시 금주, 호로도 등 이상촌 후보지들로 안내하여 실태 분석을 요청했다. 이상촌 탐사 임무를 김창세에게 맡긴 셈이었다.      

   

 안창호는 북경에서 조성환, 원세훈(1887~), 장건상(1882~)을 만나 유일당촉성회 설립에 합의했다. 1926년 10월 16일에 조성환을 대표로 하여 유일당북경촉성회를 발족시켰다. 우파와 좌파를 망라하여 40명의 회원을 확보했다. 이날 북경촉성회는 기관지 『촉성보』를 발간하기로 합의했다. 이는 민족유일당 건설의 시작이요, 모범을 알리는 신호탄이었다. 12월이 되자 김응섭이 활약하고 있는 조선공산당 만주총국에서도 민족혁명당 결성을 촉구하고 나섰다. 만주를 생각하니 안창호의 마음은 다시 바빠졌다. 어쩌면 이번이 나이 50을 바라보면서 만주를 순회할 수 있는 마지막 기회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일본의 탄압은 갈수록 교묘해지고 거세졌다. 치안유지법과 삼시협정. 이는 우리의 모든 독립운동을 철저하게 탄압하기 위한 합법적 구실로 작동할 것이 틀림없었다. 


 안창호는 만주 순회의 동행자로 유기석을 뽑았다. 유기석(1905~1980)은 곧 22살로 필립과 같은 나이였다. 유기석은 여덟 살 때 동생 유기문을 데리고 아버지 유찬희를 따라 망명하여 연길, 화룡현 등 간도에서 성장했다. 소년 시절, 화룡현에 마진(1867), 남공선(남성우1888~1924) 등이 세운 창동소학교를 다녔다. 안창호는 1924년 10월 남경 협진회관에서 개최한 10차 흥사단대회 때 유기석을 청년 강연자로 내세운 바 있었다. 유기석은 ‘우리는 활동하자’라는 주제로 10분 연설을 멋지게 해냈다. 유기석은 장래가 촉망되는 흥사단 청년이었다. 이탁도 유기석을 만주 동행자로 추천한 적이 있었다. 안창호는 지난 10월 유일당북경촉성회를 조직할 때 청년 그룹에서 유기석을 다시 만나게 되었다. 마침 유기석은 1925년에 조양대학을 중퇴하고 산시성 군벌 염석산 군대에서 안창남의 통역을 담당하면서 비행술을 배우고 있었다. 


1926년 12월 하순. 안창호와 유기석은 천진에서 심양으로 가는 열차를 탔다. 안창호가 자상한 아버지처럼 물었다. “국민대표회의 이후 부친께서는 어떻게 지내고 있소?”

 “네에, 그 후 아버지는 연해주로 가셔서 우수리스크 한인감리교회에서 선교에 집중하고 계십니다. 그런데 선생님, 임정을 둘러싼 노선갈등에 자꾸 휩쓸리게 되는 현실이 안타깝습니다. 아버지는 지역 연고 때문에 창조파 입장에 동조할 수밖에 없었을 테니까요.”

 안창호는 즉답하기가 어려웠다. ‘노선갈등. 일정한 지역에서 공론을 형성할 때 주도권을 가진 지도자의 인격이 문제다. 봉건적 유습이 아직 남아 있는 게지. 우리는 아직 민주주의 훈련이 덜 되어있다.’ 

 안창호가 불쑥 말을 던졌다.  “어른들을 닮아서는 안 되오. 청년들은 특히 각자의 이성과 양심에 따라야지 특정한 개인이나 단체에 맹종하면 안 된다는 말이오. 노예가 아니라 자유의지를 추구하는 것, 그것이 무실역행 정신이오.”

 유기석은 이 말을 곰곰이 되새기고는 말했다. “저는 흥사단 사상이 너무나 좋습니다. 소학교와 중학에서 배운 지식과는 차원이 다릅니다. 무실역행, 이 네 글자가 제 가슴을 뛰게 합니다.”

 “유 동지는 북경 조양대학 경제학과에 입학했었다고 했지요? 장하오. 민족혁명 사상을 체계화하려면 경제학 지식이 꼭 필요하오. 나는 유 동지가 대학으로 돌아가 서구 경제학을 균형 있게 공부해서 장차 해방된 조국의 경제 정책 수립에 밑거름이 되길 바라오.” 안창호는 진심을 담아 조언했다. 

 “네, 노력하겠습니다. 선생님은 언제나 멀리 앞을 내다보고 계십니다. 청년들에게는 늘 ‘놀지 마라, 속이지 마라, 거짓을 버려라, 알맹이를 추구하라’ 하셨습니다. 저는 조국광복을 앞당기는 일이라면 어디든 뛰어들고 싶습니다. 안 될까요?” 

 안창호가 신중하게 대답했다. “어떤 생각이나 사상을 행동으로 옮기려면 감정에 치우쳐서는 안 될 것이오. 대개의 감정은 열정을 동반하고 있어 자칫 위험할 수 있다오. 해서 돌다리가 안전하게 놓였는지 두드려 보고 신중하게 행동해야 하오. 목숨은 하나뿐이기 때문이지. 만일 어떤 것이 우리 민족을 위하는 합당한 길이라고 깨달으면, 그것을 붙들고 끝까지 나아가야 하겠지요. 목숨을 바친다는 것은, 선택의 어리석음을 초월하는 일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드오.”

 “네에...!” 유기석은 안창호의 말을 깊이 새겼다. 

 안창호는 필립이 생각났다. 얼마 전 혜련이 보내온 편지에서 ‘필립을 공부시키기 위해서 수양아들로 보내면 어떻겠는가’라는 내용을 보고 충격을 받았다. 안창호는 내내 이 말이 목에 걸렸다. 필립은 아버지의 독립운동과 가족 부양으로 인해 자신의 공부는 접어두고 있었다. 그러한 필립의 처지와 깊은 속도 모르고 안창호는 미주를 순회할 때 뉴욕에서 필립에게 편지를 보냈었다. 대학에 입학할 수 있도록 중등과정을 마치라고. 그러면 동부에 있는 대학 입학을 알아보겠다고. 이후 필립은 병이 났다. 아버지가 장남에게 거는 기대와 아버지의 부재중에 동생들을 부양해야 하는 현실 사이의 괴리감이 필립의 마음을 괴롭혔던 탓이다. 안창호는 유기석의 아버지 유찬희가 부러웠다. 두 아들이 모두 학업과 동시에 조국 혁명운동에 뛰어들었기 때문이다. 안창호는 자신을 탓했다. 나는 부끄러운 아빠다.’      


 1926년 12월 말, 길림에 도착한 안창호와 유기석은 길림신첩교회로 손정도를 찾아갔다. 이탁과 손정도가 안창호를 기다리고 있었다. 손정도의 얼굴은 병색이 짙어 있었다.

 손정도가 안창호를 반겼다. “형님, 어서 오세요. 교회가 초라하지요? 손질이 많이 필요하지만 차차 하려고 미루고 있답니다.” 

 “그게 뭔 대수겠소? 두 분이 함께 있는 것만으로도 힘이 나오. 탁 동지 심장은 무사하오? 하하. 내가 늘 걱정하고 있다오. 탁 동지의 심장에 조국의 미래가 달려 있소!” 안창호는 이탁을 향해 다소 과장되게 말했다. 

 “원, 선생님도! 미국 순방 기간이 너무 길었던 것 아닙니까? 8개월 허가받고 가신 줄로 알고 해전에서 기다렸는데.” 이탁이 응수했다.

 “그랬지. 동부를 순회하다가 시카고 당국에 체류 연장을 구걸해서 간신히 6개월 연장했었소. 이제 미국은 내가 갈 수 없을 듯하오.” 안창호가 결연하게 말했다.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무슨 변고가 생겼습니까?” 손정도가 걱정되는 표정으로 물었다. 

 “글쎄, 하와이에서 쫓겨났었다오. 그래서 호주로 에둘러 상해로 왔지. 미국 이민국은 그래도 자유와 포용의 시스템 선진국이라고 알고 있었는데, 이번에 겪어보니 반공주의에 동조하고 있는 덩치 큰 나라에 불과합디다.” 안창호가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무슨 일을 겪으셨군요!” 이탁이 놀라 큰 소리로 말했다. 

 “내가 공산주의자라는 모함이 이민국에 접수되었던 모양인데... 그 때문에 하와이 체류가 불가능할 줄은 예상하지 못했소. 누군가의 악의적인 모함을 제대로 조사해 보지도 않고 무조건 바다로 쫓아내니. 시간을 낭비했다오.” 안창호가 말했다. 

 “아니, 누가 그런 악의적인 모함을 했답니까?” 이탁이 흥분했다.

 “음, 형님은 지금 모함한 동포를 탓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대국의 시스템이 공산주의에 예민하다는 점을 지적하고 계신 것이지요? 하하.” 손정도가 안창호를 보면서 말했다.

 “맞소. 바로 그거요. 모함이야 내가 늘 당해 왔던 일이고, ‘동포끼리는 믿고 속아라.’가 내 신념인데.... 변명도 안 통하고 주장도 덧없고 해서 시간만 낭비했던 거요. 그 시간이 아까워서 바다에서 울었지. 허허, 나는 눈물이 많소.” 안창호가 웃었다.

 “원, 형님도! 로마서 5장 말씀이 생각납니다. 우리는 고통을 당하면서도 기뻐합니다. 고통은 인내를 낳고 인내는 시련을 이겨내는 끈기를 낳고 끈기는 희망을 갖게 합니다.” 손정도가 성경 말씀을 중얼거렸다. 

 안창호가 성경 말씀의 다음 구절을 이었다. “이 희망은 우리를 실망시키지 않습니다. 성령께서 우리 마음속에 사랑을 부어 주셨기 때문입니다. 맞소?” 

 “하하하, 역시 형님이시오. 혹시 바다 위에서 성경을 끌어안고 우셨나요?” 손정도는 돌아오는 주일에 도산 형님을 예배 강론자로 모셔야겠다고 마음을 굳혔다.

 “내 소지품은 간단하오. 성경과 수첩. 필수품목이지. 하하. 속상하면 성경을 펼치곤 하오. 그러면 답이 있어. 참으로 신기한 일이오.” 정말 그랬다. 안창호는 힘들고 고단할 때면 언제나 성경을 펼치는 습관이 있었다. 

 이탁이 말했다. “선생님의 내공은 성경책이 발원지군요, 하하. 참, 손 목사께서 액목현에 땅을 조금 샀습니다. 마침 양기탁 선생님께서 미리 봐둔 수전 농지랍니다. 길림 이상촌 운동의 시작이지요. 저는 목릉에 농지를 사 둘까 합니다.”

 “오, 반가운 소식이오. 내 그렇지 않아도 떠돌면서 부단히 이상촌 부지를 탐색하고 다녔다오. 혹시 중국 토루라고 아시오? 홍콩에서 상해로 올 때 복건성을 둘러보고 왔다오. 놀라운 공동주거지를 살펴보고 왔소.” 안창호는 흥분해서 말했다.

 “이상촌의 주택 모델을 보셨군요.” 손정도가 말했다. 

 “그렇소. 만주지역과는 완전 딴판인 중국이 거기 있습디다.” 

 “말씀해 주세요. 궁금합니다.” 이탁이 재촉했다.

 “청의 지배를 피해서 살아가는 한족들인데 객가인으로 칭한다고 합니다. 손문 선생도 객가 출신이라고 합디다. 그들의 공동주택은 참으로 놀라웠소.” 안창호는 수첩을 꺼내 보였다. 

 손정도와 이탁은 수첩에 그려진 그림에 집중했다. 

“이들의 공동주택은 집짓기에 따라 수백 가구에서 수천 명까지 살 수 있는데, 적의 침입을 방어할 수 있는 구조로 지어진 것이 핵심이라오. 간도참변을 생각해 보오. 공동촌락의 방어태세는 필수요. 토루는 건축 소재가 진흙인데 두께가 웬만한 총알은 삼켜버릴 것 같더이다.”

 손정도가 그림을 보며 감탄했다. “우리 이상촌 설계에 큰 도움이 되겠습니다. 험준한 산악지대에 이런 공동주택을 짓는다면 좋겠군요. 농사는 토루 밖에서 지으면 되니까요.”

 “내가 이상촌 답사를 다녀 본 결과 남중국인들의 공동주택 개념은 적의 침략에 대한 철저한 방어태세를 갖추는 것입디다. 부유한 사람들의 주택도 이중 삼중 구조요, 빈민 농가촌락도 공동체가 단결할 수 있게 설계된 점이 참 부러웠소. 간도참변 같은 속수무책의 상황을 염두에 두고, 우리도 이제는 단결 수단을 찾아야 하오.” 안창호가 결연하게 말했다.

 “단결을 위한 동기부여, 단결했더니 삶의 질이 높아졌다. 이런 자각을 깨워주는 일이 지도자가 할 일인 듯합니다.” 손정도가 말했다. 

 안창호는 단결의 동기부여라는 말에 감탄했다. ‘나는 여태 단결은 의무라고 강조했다. 그런데 번번이 실패했다. 내 생각과 타인의 생각은 언제나 일치하지 않는다. 그래서 나는 경청을 답으로 생각했다. 그랬는데도 단결은 실패했다. 손 목사 말이 옳다. 단결은 동기부여로 시작되는 것이다. 단결하면 생존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어야 한다.’ 

 “손 목사, 단결된 집단이 이상촌을 이루고 있는 현장도 가 봤소. 미국 유타주 주도인 솔트레이크시티요. 이번에 일부러 찾아갔었소. 척박한 곳이었는데 모르몬교 집단이 이상촌으로 만들어 놓았습디다. 그들은 박해를 피해 집성촌을 이루며 그곳을 공동체 도시로 개조하였소. 내 그곳에서 만주 대종교 독립군을 생각했지. 서일 장군이 생각나서 눈물도 훔쳐 가면서 말이오. 도시가 아름답게 가꾸어져 있었는데, 산업을 일으켜 자급자족하면서 사람답게 살아가더이다.”

 “오, 선생님! 우리 민족은 언제 그런 이상촌을 갖게 될까요? 이곳은 남의 땅.... 안타깝습니다.” 이탁이 말했다.

 “우리는 남의 땅에서 우리 민족의 현재 역사를 살아가고 있지 않소? 우리가 일군 이상촌은 역사 속에서 살아 숨 쉬겠지.” 안창호가 말했다.    

 

 유기석은 세 사람이 주고받는 대화를 조용히 경청하며 감탄하고 있었다. ‘역시 흥사단 선배님들은 대단하시다. 언제나 대안을 갖고 말씀을 나눈다.’ 

 안창호와 손정도, 이탁은 1927년 1월 ‘도산의 강연회’가 끝난 후에 동경성과 경박호 일대에 답사 일정을 잡았다. 유기석이 이를 수첩에 기록했다.


(다음 화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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