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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은명 Apr 27. 2023

제9장. 민족혁명의 길 #5/10

5화. 길림강연회 구금사건

5화. 길림강연회 구금사건     


 이탁은 안창호의 순회 유세 이야기를 꺼냈다. 유일당 촉진을 위한 선생님의 순회 유세는 길림성 대동문 밖에서 시작합니다. 제가 사전 답사를 해 두었습니다. 1월 27일입니다.” 

 “오, 그렇소? 사람들을 모았소?” 안창호가 눈을 크게 뜨고 물었다.

 손정도가 말했다. “길림에 최명식(1880~1961) 선배가 정미소 공장을 크게 벌였습니다. 양기탁 선생께서 잘 아시는 분입니다. 저보다 1년 먼저 길림에 정착했더군요. 대동공사라고, 정미 공장 창고가 꽤 큽니다.”

 안창호는 기뻐서 들뜬 소리로 더듬거렸다. “아니, 최명식 동지가 길림에 와 있단 말이오? 잘 알고말고! 신민회와 청년학우회 회원이오. 최광옥, 차리석, 안태국과 친했소. 길림으로 와서 양 선배를 만났구려!”

 이탁이 신이 나서 말했다. “맞습니다. 안악사건 때 7년을 감옥에서 지냈답니다. 그러다가 김구 형님과 상해로 망명했고, 연통제에 매료되어 국내로 잠입해 활동하다가 다시 잡혔습니다. 그리고 감옥에서 풀려나 이번에 양기탁 선생님이 계신 길림으로 왔습니다.” 

 손정도가 말했다. “그 형님은 안태국의 태극서관 운동에 동참하여 ‘면학서포’ 간판을 걸고 유길준 선생의 『대한문전』을 발행했다고 합니다. 양기탁 선생 말로는 사업 수완이 뛰어난 분이라고 들었습니다.”

 안창호가 반색했다. “오, 빨리 만나보고 싶소. 그리운 옛 동지들 이름이 나오니 힘이 납니다.” 

 이탁은 선생님의 표정이 환해지자 덩달아 신이 났다. “그날 정의부 대표들과 남만청년총동맹 대표들이 변복 차림으로 다 오겠다고 했습니다. 선생님이 궁금해하시는 왕삼덕 형님도 현장으로 올 것입니다.”

 “오, 그렇소? 그이가 길림에 있었군! 그날 양기탁 선배는 정의부 동지들과 같이 오실까?” 

 이탁의 전언에 의하면, 양기탁은 국민대표회의가 무산되자 길림으로 이주했다. 그리고 역시 길림으로 이주한 손정도 목사를 지도자로 앞장세웠다. 양기탁은 1924년 12월, 손정도, 왕삼덕과 동우회를 결성하고 기관지 『동우』를 간행했다. 그러나 일본과 만주 군벌이 야합하여 삼시협정(1925.6.11.)을 맺고 밀정을 풀어 방해 공작을 해오기 시작했다. 이에 양기탁은 무장투쟁을 결심하고 작년 봄(1926.4.5.) 자신의 집에서 고려혁명당을 결성했다. 이 무렵 이상룡 후임 국무령에 선임되었으나 이를 고사하고 안창호를 천거했다. 고려혁명당은 정이형, 이동구, 현정경, 고활신, 김봉국, 최동희, 주진수, 오동진, 이동락 등이 활동했다. 그러던 중 작년 12월 30일, 이동락이 일경에 체포되어 조직이 적에게 노출되었다. 그래서 현재 양기탁은 은신 중이었다. 

 손정도가 걱정스러운 얼굴로 말했다. “그런데... 이곳 길림은 2년 전부터 삼시협정이 발동 중입니다. 일본군이 장작림 군벌과 야합하여 한국 독립군을 체포하면 일본 경찰에 넘겨주기로 한 것입니다. 그래서 이동이 예전 같지 않습니다.”

 이탁이 흥분한 어조로 말했다. “일본은 손 안 대고 코 풀고, 만주 군벌은 포상금을 벌고. 장작림의 얕은 수는 반드시 제 발등을 찍게 될 것입니다.”

 “어쨌든 조심합시다. 일본이 만주 독립군 탄압을 구실로 삼시협정과 치안유지법을 발동해 다각적으로 조여 오고 있으니, 우리가 정신 차려 대동단결해야 하오. 밀정을 조심해야겠군.” 안창호가 말했다.


 1월 27일. 도산 안창호의 연설을 들으려고 길림에 사는 500여 명의 동포가 대동공사로 몰려들었다. 반가운 얼굴인 양기탁도 눈에 띄었다. 중국인 복색으로 귀를 덮는 모자를 눌러쓰고 구석에 자리 잡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보고 안창호는 안심이 되었다. ‘멋진수염이야!’ 여기저기 쭉 훑어보니 고할신, 박일병, 현익철, 김이대의 얼굴이 보였다. 김동삼 옆에 왕삼덕과 정의부의 누님, 남자현 여사(1872~1933)도 연단 앞쪽에 자리를 잡고 앉아 있었다. 

 오동진이 김일성(1912~1994)을 데리고 강연장에 들어섰다. 김일성은 당시 15세로 길림 육문중학교에 다니고 있었다. 오동진과 김일성의 아버지 김형직은 서로 친한 선후배요, 동지였다. 오동진이 평양 대성학교를 다니고 김형직이 숭실중학교를 다닐 때부터 친한 사이였다. 김형직의 갑작스러운 사망 소식에 오동진은 누구보다도 마음에 상처를 입었다. 김형직(1894-1926)은 평양에서 태어나 숭실학교를 나와 1911~13년 교편생활을 했다. 1917년 비밀결사 조선국민회에서 무력항쟁 노선으로 독립운동을 하다가 체포되었다. 그 후 압록강을 건너 길림성 백두산 근처 임강으로 건너와 순천의원을 차리고 한약사로 생계를 꾸렸다. 김형직은 길림에서 숭실학교 선배인 손정도를 만나 그의 인격에 감화되어 뜻을 같이했다. 두 사람은 띠동갑이었다. 손정도는 김형직을 각별하게 우대했다. 그러나 김형직은 1926년 6월 5일 32세 젊은 나이에 세상을 떠나면서 부인 강반석에게 손정도를 찾아가 의탁하라고 했다. 손정도는 김형직의 아들 김일성을 친아들처럼 돌봐주었다. 손정도에게는 원일과 원태 두 아들과 세 딸이 있었다. 이들은 동기간처럼 지냈다.      


 연단에 선 안창호는 ‘한국 독립운동의 미래’를 주제로 힘을 주어 연설했다. 당시 안창호는 독립운동 좌파 청년들로부터 이광수의 「민족개조론」과 「민족경륜」으로 물의를 빚은 필화사건의 사상적 배후로 오해를 받고 있던 터라 그의 연설은 초미의 관심을 불러일으켰다. 그러나 안창호 연설의 기조이자 특징은 개인의 건전인격과 민족의 신성단결이었다. 안창호는 이러한 철학에 바탕을 두고 현재 상황 분석과 미래로 나아갈 길을 결론으로 제시했다. 

 “시대는 변했고 발전하고 있다. 우리의 임시정부가 통일된 강한 힘을 가지려면 민족유일당을 구축하여 분산된 역량을 집중해야 한다. 저마다의 주장대로 편을 가르고 겨루기를 하면 힘은 분산된다. 경쟁은 민족혁명을 이룬 다음 민주적 공론과정을 거쳐 상생으로 나아가야 한다. 나는 임시정부에 있으면서 속수무책으로 간도참변을 겪은 동포들에게 아무런 꿈과 용기를 주지 못한 데에 참담함을 느끼고 동포들의 새 집단촌인 이상촌 건설에 희망을 걸어왔다. 이상촌은 문명화된 독립군 기지를 뜻한다. 적의 공격과 학살로부터 가족과 삶의 터전을 지키는 새로운 개념의 집단촌이다. 나는 이들의 생존을 위한 터전을 이상촌이라 칭한다. 대한의 만주 거주 동포도 이상촌을 건설하여 적의 공격에 대비하면서 농업과 상업, 수공업 등으로 경제자립과 문명을 일으켜 사람답게 살아갈 수 있게 돕고 싶다. 이것이 나의 꿈이다.” 

 여기저기서 환호와 함께 박수 소리가 터져 나왔다. 연설 도중, 무장 만주 경찰과 헌병들이 강연장을 포위하였다. 400명은 족히 넘었다. 그중 20여 명이 포승줄을 들고 연단에 올라 안창호를 잡으려 하였다. 강연장은 아수라장으로 변했다. 현장에 있던 여성 독립군 남자현이 연단으로 뛰어올라 안창호를 막으며 소리를 질렀다. “안된다, 이놈들! 포승은 안 된다!” 그 호통치는 소리가 너무나 엄해서 만주 경찰들은 겁을 먹고 포승 끈을 슬금슬금 놔 버렸다. 

 안창호도 소리쳤다. “사태를 정확하게 알기 전에는 경거망동해서는 안 됩니다!”

 만주 경찰과 헌병들은 청중 200여 명을 연행했다. 일본 밀정이 동북 장쭤린(장작림) 부대 헌병사령 왕정우에게 안창호의 연설회가 공산당 집회라고 허위 정보를 제공하여 일어난 일이었다. 조선총독부 고등경찰 과장 쿠니토모와 간부들이 급히 길림으로 와서 이들을 심문했다. 연행된 청중 대부분은 길림 주민들로 밝혀져 풀려났다. 그러나 일본은 안창호를 비롯한 최종 42명을 삼시협정에 따라 인계하라고 만주 경찰에 요구하였다. 42명에 김동삼, 이탁, 오동진 등은 포함되지 않았다. 이들은 강연장을 무사히 빠져나와 사건 수습에 나섰다. 현장에 있었던 박일병 등은 손정도 목사와 의논하고 상해 임시정부와 흥사단에 급히 알렸다. 임시정부와 흥사단이 사태수습에 앞장섰다. 한국노병회를 대표하여 문제해결사로 이유필이 길림으로 왔다. 다행히 체포를 모면한 유기석은 자기가 소속되어 있던 국민혁명군 북방총사령관 염석산에게 도움을 청했다. 중국 언론 등도 총동원되어 비밀 삼시협정은 무효라며 불법 감금을 규탄하고 석방을 요구했다.


 안창호와 양기탁 등 40여 명은 21일 만에 모두 풀려났다. 천만다행한 일이었다. 자칫 일본에 넘겨지기라도 했다면 속수무책으로 당할뻔했다. 

 양기탁이 호탕한 목소리로 안창호에게 말했다. “도산, 큰일 날 뻔하였소. 도산의 연설은 언제 들어도 속이 시원하단 말이지. 뜨거운 여름 얼음냉수 맛이랄까? 하하.” 

 안창호도 유쾌하게 말했다. “선배님은 영락없는 중국인 노인으로 보이던데, 그래도 놈들이 체포했지. 몸은 괜찮으신 거지요?”

 “그렇지 않아도 혹시나 놈들이 나를 주목할까 봐 중국말을 더듬으며 중국 노인 행세를 했었다오.” 양기탁은 한바탕 아수라장을 방불케 했던 위험에서 벗어났다는 안도감에 안창호와 회포를 풀었다.

 안창호가 주변을 두리번거리며 말했다. “왕삼덕, 이 친구를 강연장에서 얼핏 보았는데... 무사히 풀려났겠지요?”

 양기탁이 무심하게 말했다. “무사히 풀려났겠지.” 그러나 이때부터 왕삼덕의 행방은 묘연해졌다. 


 구금에서 풀려난 안창호와 유기석은 신안둔에 마련한 이탁의 은거지에서 기숙했다. 한편 길림 사건의 해결사로 만주에 와 있던 한국노병회 이사장 이유필은 안창호에게 여러 가지 소식을 보고했다. 우선 임시정부는 1927년 3월 5일, 5대 국무령 김구가 이동녕 의정원 의장과 함께 3차 개헌을 통과시켜 내각책임제를 집단지도체제로 바꾸었다. 그리고 이동녕을 국무령으로, 김구, 오영선, 김철, 김갑 등 5인을 국무위원으로 구성하고 4월 11일 공포하였다고 전했다. 또한, 국무령을 사임한 홍진과 좌파 인사 홍남표 등이 가세하여 3월 21일 유일독립당 상해촉성회가 결성되었다고 했다. 국내에서는 1927년 2월 15일, 신간회가 창립대회를 개최했다는 소식을 전했다. 일본이 한국 지배정책을 자치운동으로 전환하려 하자 이에 대응하여 민족주의 세력과 사회주의 세력이 연합, 좌우합작으로 비타협적 민족주의 전선을 결성한 것이라고 했다. 발기인은 권동진, 홍명희, 신석우, 조선공산당 책임 비서 강달영과 정우회 회원 등 27명이었다. 이유필은 수양동우회가 단체 명단에서 빠졌다면서, 도산께서 이렇게 민족유일당을 위해 위험을 무릅쓰고 만주유세를 다니시는데 수양동우회는 다른 길을 걷는 것이 아니냐고 토를 달았다. 이 쓴소리에 안창호는 마음이 저렸다. 이광수가 말했던 「민족경륜」 사설이 마음에 걸렸다. 「민족경륜」의 핵심은 일제가 허용하는 범위 내에서 정치적 결사를 조직하겠다는 주장이었다. 안창호는 북경 밀회 때 타협적 정치결사는 ‘절대 있을 수 없는 일’이라는 다짐을 두지 못한 자신의 탓으로 생각했다. 

 신간회는 회장으로 이상재를 선출했다. 신간회 강령은 이러했다. ‘우리는 정치적, 경제적 각성을 촉진한다. 우리는 단결을 견고히 한다. 우리는 기회주의를 일체 부인한다.’ 신간회는 대중의 의식개발과 생존권 수호 차원에서, 노동농민단체와 합동으로 소작료와 소작권 보호, 최저임금제 확립, 민족차별 철폐 등 식민지정책 반대 운동을 해나갔다. 그러나 신간회도 1928년 코민테른의 12월 테제로 말미암아 위기를 맞았다. 공산당은 민족부르주아 진영과 결별하라는 명령이었다. 신간회는 1931년 김병로 체제에 와서 사회주의 계열과 갈등하다가 5월 15일 해산되었다.     


 구금사건이 해결되자 길림의 독립운동진영은 다시 분주해졌다. 1927년 4월 1일 신안둔 이탁의 은거지에서 안창호와 이유필이 합석한 가운데 정의부 간부들이 모여 유일독립당 운동의 기본 강령 등에 관해 난상토론을 벌였다. 참의부는 이탁이 대리했고 신민부는 지난 2월에 일어난 사고로 참석하지 못했다. 신안둔 회의를 앞두고 신민부 간부들은 중동선 석두하자에서 총회를 개최하여 회의 도중 일본과 만주 경찰 합동수색대의 기습을 받았다. 이때 유정근, 박경순, 이춘섭 등 12명의 간부가 항전 끝에 붙잡혔다. 이후로 신민부는 무장투쟁을 주장하는 군정파와 교육과 민생 정책을 주장하는 민정파로 갈라졌다. 

 이탁은 이러한 사정을 고려하여 보름 후에 다시 모이기로 하고 헤어졌다. 선생님 도산이 참여한 자리에서 만주의 유일독립당 결성의 뜻을 이루고 싶어 서두른 일정이었다. 4월 15일, 이탁은 도산을 모시고 3부 통합 회의를 다시 개최하였다. 신민부를 제외하고 모두 52명이 참가했다. 참의부는 참의장 김승학이 대표했다. 정의부에서 김동삼, 오동진, 고할신, 현정경 외 11명과 정의부 독립군 11명이 참가했다. 소비에트 만주총국 외곽단체인 남만청년총동맹에서는 박병희 외 10명이 참가했다. 조선공산당에서는 만주총국 간부 김응섭이 대표로 참가했다. 김응섭은 만주에서 1300여 명의 한족노동당을 이끌고 있었다. 김응섭은 이 회의에 신민부 불참을 예로 들어 완전한 대표자 회의는 아니라고 문제를 제기했다. 누구보다도 만주 독립군 대표들을 두루두루 잘 알고 있던 이탁이 말했다. “그렇다면 유일당 논의를 계속해 나갈 수 있는 시사연구회라도 조직합시다!” 

 김동삼과 오동진이 동의한다는 뜻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이를 지켜보던 안창호와 김승학도 고개를 끄덕였다. 

 김동삼이 입을 열었다. “단숨에 유일당만주촉성회를 조직하기에는 무리가 있었나 봅니다. 이탁 동지의 말대로 논의를 지속할 수 있는 시사연구회 조직을 우선 추진합시다.” 

 김응섭이 의견을 제안했다. 김응섭은 홍진 내각에서 활동하다가 홍진이 국무령을 사임했을 때 만주로 왔다. “유일당의 쟁점은 결국 계급혁명이냐 민족혁명이냐 하는 문제라고 봅니다. 자유와 생존권을 유린당한 조선의 노동자와 농민의 계급적 각성이 민족해방을 촉진할 수 있을 것입니다. 시사연구회가 조직된다면 이러한 쟁점을 공론에 부쳐야 할 것입니다.”

 남만청년총동맹 대표 박병희가 나섰다. “제가 말을 보탠다면 민족해방은 곧 계급혁명과 동시적 개념이라고 생각합니다. 다만 혁명의 주체 세력이 누구냐 하는 것이 문제라고 봅니다. 이는 분열의 소지가 많은 쟁점이기도 합니다. 독립군 1세대 선배들이 민족독립과 해방 투쟁에 전력투구했다면 지금은 다릅니다. 지금은 혁명의 주체 세력에 계급적 관점이 부각되었다고 할까? 여하튼 우리의 독립은 이중과제를 안고 있는 것입니다.”

 이탁이 말했다. “나도 의견이 있소. 민족유일당 구축에 있어 이념 문제는 첫 단추가 아니란 말이지...! 그러나 좋소. 시사연구회에서 차근차근 다루어 나갑시다.”

 본디 말수가 없던 오동진도 나섰다. “그렇게 합시다. 그냥 이대로 흩어질 수는 없소. 우리가 이번에 놈들에게 겪은 어처구니없는 일을 봐서라도 말이오.”

 안창호는 이들의 토론을 경청하면서 생각했다. ‘민족혁명이냐, 계급혁명이냐? 군사력을 보유하고 있는 만주 1세대는 절대 독립인 비타협적 민족주의를 주장하고 있고, 계급혁명을 강조하는 차세대들은 코민테른의 영향을 받고 있다. 차세대 진보 청년들이 민족주의를 경시하는 경향이 염려된다. 혁명의 주체 세력은 어쨌든 식민지 노예살이를 하는 평범한 사람들이다. 그렇다면 만주 유일당은 단체중심, 단체 본위의 정당이 가능할까? 어쩌면 지도자 중심으로 조직이 구성되어야 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지도자 개인 본위로 정당이 구성된다면 이는 약점이 될 수 있다. 지도자가 체포되면 조직 와해라는 위험이 따를 수도 있다. 어쨌든 만주 유일독립당은 이들을 포함하는 지도자 그룹과 단체 모두를 아우르는 정당이 되어야 한다. 그것이 현 단계다. 현 단계의 혁명이념은 대공주의여야 한다.’ 안창호의 머릿속은 복잡해졌다. ‘상해로 돌아가는 길에 김규식이나 여운형을 만나봐야겠다.’


 이날 토론 끝에 이탁을 중심으로 안창호와 김동삼, 오동진, 김승학, 박병희, 현정경, 김원식, 이광민 등이 이름을 올린 시사연구회가 조직되었다. 이탁, 최동욱, 이일세, 김응섭을 집행위원으로 선출하고, 민족유일당을 추진해 나가기로 했다. 시사연구회는 신민부 입장을 배려하여 7월 15일 흑룡강성 영안시 영고탑에서 2차 회의를 약속했다. 영고탑은 대종교의 성지나 다름없는 곳으로, 신민부는 그곳에 본부를 설치하고 자주 회의를 열고 있었다. 


(다음 화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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