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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은명 Apr 28. 2023

제9장. 민족혁명의 길 #6/10

6화. 만주 사랑, 손정도와 이상촌 운동

6화. 만주 사랑손정도와 이상촌 운동     


 안창호와 유기석은 예정대로 이탁, 손정도와 함께 양기탁 선배를 앞장세워 만주 각지 순회에 나섰다. 손정도는 이미 경박호 일대 액목현에 수전(水田) 50향을 사서 벼 농장을 시작한 상태였다. 목릉에도 3천 평의 농장을 구매해서 한인들을 불러들이고 있었다. 양기탁과 손정도는 만주농업사 건립을 추진하고 있었다. 

 경박호는 발해의 수도였던 동경성 남쪽에 있는 호수로, 경박호에서 흘러나오는 목단강이 동경성 성벽 밖으로 사방을 휘감고 있었다. 성터 내에는 동경성(발해진)을 비롯하여 6개의 마을이 있었다고 하고, 성터 주위는 수백 리가 넘는 분지였다. 손정도가 조사한 바에 의하면, 황성, 궁성, 외성으로 축조된 동경성은  궁과 마을이 어우러진 이른바 계획도시였다. 지금은 눈으로 덮여 황량하지만, 주변을 이상촌으로 개발하면 훌륭한 곳이라고도 했다. 안창호는 천혜의 수자원인 경박호를 바라보며 이곳에 전력 수급을 위한 공사를 할 수 있는지 중국 당국과 협상해 보기로 했다. 안창호는 ‘길림 일대의 지도자는 양기탁 선배와 손 목사다. 이들이 잘해나갈 것이다.’라고 믿었다. 


 안창호는 평범한 이주 한인들이 바로 독립운동의 인적, 물적 기반임을 확인했다. 그러나 이들의 생활 현실은 예상대로 비참했다. 안창호가 계획해 왔던 만주 집단농촌 건설은 손정도가 확보한 액목현의 농지로 그 첫발을 내디딘 셈이었다.      

 안창호는 손정도와 이탁에게 말했다. 

 “떠돌고 있는 한인들에게 근대 과학적 영농법을 가르치고, 기계와 기술을 도입하고, 산업 발전에 필수요소인 수력 전기를 개발하여 생산력을 증대시키고, 각처에 학교를 설립해서 민족교육과 근대 기술교육을 한다. 이들의 생활 향상과 건강을 위해 보건환경을 개선하게 하고 보건위생 교육을 하며, 병원을 설치한다. 어떻소? 우리 가까이에 위생학 전문가 김창세 박사가 중국에 와 있다오. 그리고 미주 흥사단이 자금을 다소 지원하기로 했소이다.”

 잠자코 듣고 있던 양기탁이 말했다. “도산이 만주에 있는 동안 농민 가구 중심으로 호조사를 본격적으로 추진해야겠소.”

 손정도가 말했다. “농민호조사 설치는 이상촌의 첫 삽이나 다름없겠습니다. 일단은 희망 가구에 도장을 받아 놔야겠습니다.” 

 양기탁도 거들었다. “도산이 자리에 같이 있으니 결성식 날짜를 정합시다.” 

 안창호는 양기탁 선배의 추진력에 늘 감탄했던 터라 ‘이번에도 양 선배가 밑그림을 다 그려 놓으신 모양이다.’라고 생각했다. 안창호는 양기탁을 고향에 계신 큰 형님 치호처럼 생각했다. 


 농민호조사는 만주 각 군소 단체의 연합체로 추진되었다. 준비위원은 손정도와 이탁을 중심으로 10명을 선정했다. 4월 1일 최명식의 대동공사에서 농민호조사가 결성되었다. 27명이 모였다. 김동삼, 이유필, 오동진, 김기풍, 김진호, 김원식, 김호, 김정제, 김유성, 곽종경, 곽우명, 엄영무, 이욱, 배형식, 박기백, 성태영, 안규원, 윤도숙, 윤원규, 오상헌, 오송파, 옥이성, 최석순, 최만영, 현정경 등이었다. 

 농민호조사는 주주를 모집하고 출자 자금으로 토지를 매입해 나가며, 출자액에 따라 토지를 분배하고 경작하게 하여 집단농촌을 건설할 계획을 수립했다. 집단촌 내에서는 산업 교육을 진행하고, 보호와 방위를 위한 계몽과 협동, 신용과 박애를 존중하며 청결, 미화에 힘쓰도록 규칙을 정했다. 

 농민호조 운동의 선구자 손정도는 4년여 동안 경박호와 액목현 주변을 떠나지 못하고 이상촌 운동에 열정을 다했다. 손정도의 만주 사랑은 남달랐다. 

 “형님, 일전에 솔트레이크시티를 보고 대종교 집단의 이상촌을 생각했다고 하셨지요? 그들이 동경성 가까이 이주하면 어떨까요? 그들과 함께 농민호조 이상촌을 건설한다면...!”

 “거, 괜찮은 생각이오. 종교집단의 응집력은 대단하오. 일치를 이루고 있는 힘. 힘은 공고한 단결에서 난다. 그런데 그 힘의 발원은 일치된 신념에서 난다. 종교의 힘은 참으로 대단하지 않소? 가서 사정을 살펴보겠소.” 안창호가 말했다.

 “일치를 이루는 것보다 아름다운 것은 또 없지요. 형질이 각기 다른데도 형형색색으로 조화를 이루는 자연을 보면 저것이 천국이구나 하는 생각이 든답니다. 우리 다음 세대들이 떠안을 독립운동도 노선 일치를 이루면 얼마나 좋을까요?” 손정도가 화답했다. 

 안창호가 의미심장하게 말을 받았다. “지성이면 감천이라고 했소. 나는 이 말을 믿소. 다만 내가 바라는 것은 오직 하나, 대한의 독립. 독립의 그 날까지 우리는 살아있어야 해. 특히 당신, 체력 관리를 잘하세요. 나는 또 오겠소. 유일당이 만들어지기만 한다면 나는 이상촌 운동으로 남은 생을 보내고 싶소. 손 목사, 당신과 함께 말이오.”

 손정도가 빙그레 웃었다. “그날이 빨리 오기를 기도해야겠습니다. 형님도 건강하셔야 합니다. 뒤에 오는 후손의 행복을 위해 걸레질 같이 하게요.” 손정도는 스스로 걸레 목사를 자처했다.      


 안창호가 길림을 떠난 뒤 손정도는 양기탁의 도움을 받으며 농민호조 이상촌 운동에 열정을 다했다. 그러나 그의 건강은 점점 나빠졌다. 고문 후유증이었다. 

 손정도(1882~1931)는 신민회 때 전덕기 목사의 상동교회를 출입하면서 안창호를 알게 되었다. 안창호와는 같은 고향 강서 출신이었으나, 서로 바빠서 가까이하지는 못했다. 손정도는 감리교신학대학 출신으로 교단이 주목한 인물이었다. 1910년 5월 북만주 순회 선교사 활동 중에 북경에서 조성환과 망명객 안창호를 만났다. 조성환과는 1912년 7월 일본이 조작한 ‘가쓰라 암살 음모 사건’에 연루되었다. 손정도는 하얼빈에서 체포당해 서울로 압송되었고, 모진 고문을 당하고 진도로 유배되었다. 그 후 동대문교회와 정동제일교회 목회 활동 중 홀연히 귀향했다. 1919년 3.1운동 기획에 참여하고 2월 상해로 망명했다. 임시정부 수립과정에 의정원 부의장과 의장 소임으로 참여한 후, 통합임시정부 추진 과정에서 안창호의 지도력에 반해 흥사단 원동위원부 창립 단우가 되었고, 이후 흥사단 동지들과 궤도를 같이 하면서 독립운동을 했다. 손정도는 고문 후유증이 심해 건강이 늘 좋지 않았다. 안창호와는 만주 난민구휼을 위한 이상촌 운동에 공감하여 길림으로 낙향, 목회 활동과 이상촌 부지확보 및 농민호조사 결성에 주력했다. 

 손정도는 1931년 2월 북경에 있는 가족을 방문하고 돌아와 피를 토하고 쓰러져 길림 동양병원에 입원했다. 그는 결국 많은 사람의 애끓는 기도에도 불구하고, 2월 19일 49세 일기로 타계했다.     

 액목현과 목릉의 농민호조 이상촌은 일제의 방해 공작에 시달리다가 1931년 9월 18일 일제의 만주침략으로 기반을 빼앗겨 미완에 그치고 말았다. 


(다음 화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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