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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은명 May 02. 2023

제9장. 민족혁명의 길 #8/10

8화. 만주 3부 통합운동과 오동진 체포

8화. 만주 3부 통합운동과 오동진 체포  

   

 영고탑 회의는 성과를 내지 못하고 모두 흩어졌다. 이탁과 김동삼이 가장 안타까워했다. 모두 신민부를 걱정했다. 김동삼과 김응섭 일행은 서둘러 각 기지로 돌아갔다. 양기탁도 김동삼을 따라 반석현으로 돌아갔다. 안창호와 유기석은 영고탑 회의에서 이탁을 다시 만났다. 이탁의 안내를 받으며 흑룡강성 남쪽 오상현 충하로 갔다. 충하는 송화강의 지류로, 곳곳에 한인 촌락이 눈에 띄었다. 멀리 보아서는 평화로웠으나 마을 안쪽으로 진입하면 콧날이 시큰해질 정도로 피폐했다. 안창호는 이들에게 제공할 이상촌의 가능성을 물색하고 주변을 살폈다. 훗날, 국무령을 사임한 홍진이 안창호의 답사 소감을 듣고는 충하에 근거지를 마련하겠노라 했다. 안창호는 유일당을 위해 모든 것을 내려놓고 마음을 비운 홍진이 감사했다. ‘홍진은 훌륭한 지도자요, 동지다.’      


 김동삼과 오동진은 정의부로 돌아와 1927년 8월에 제4차 중앙총회를 개최하여 민족유일당만주촉성회 추진을 결의했다. 간부들은 12월에 반석현에서 연석회의를 개최하여 진행 상황을 점검하기로 했다. 이 과정에서 오동진이 김종원이라는 자의 밀고로 1927년 12월 16일 체포되고 말았다. 김종원은 오동진의 부하로 친밀한 사이였는데 의주경찰서 고등계주임 김덕기에게 밀정으로 포섭되었다. 김덕기는 천여 명이 넘는 독립운동가들을 체포하여 즉석 사살하거나 고문 끝에 감옥으로 송치해온 악명높은 자였다. 광복군을 이끌던 별, 오동진이 김덕기의 덫에 딱 걸리고 만 것이다. 


 상해에서 거장 오동진의 체포 소식을 들은 안창호와 이탁은 충격에 휩싸였다. 안창호는 오동진을 생각했다. 오동진(1889~1944)은 의주 출신으로 태어나자마자 친어머니가 돌아가시고 할머니와 새어머니 밑에서 성장했다. 천성이 강직하고 정의로우며 온화한 품성을 지녀 불우한 친구들이 그를 잘 따랐다. 상대방을 대할 때 언제나 자상한 큰 형님같이 세심하게 살피고 돕는 남다른 지도력을 갖추고 있는 친구였다. 소년 김일성과 특별한 인연을 맺은 것도 그러한 연유였다. 오동진이 대성학교에서 안창호를 만난 것은 운명이었다. 그곳에서 동기생 이탁도 만났다. 오동진은 대성학교를 다니면서 기독교에 입문했고 고향에 일신학교를 개교하여 교사와 전도사 역할로 구국운동에 발을 디뎠다. 1912년 대성학교가 강제로 폐교되면서 1회 졸업생 19명이 모두 불온사상을 가졌다는 이유로 일경에 체포될 때 오동진도 끌려가 모진 고초를 당했다. 3.1운동 이후 서간도 관전현으로 망명하여 절친 이탁과 이석(본명 李濬鏞) 형제와 결합했다. 그리고 장덕진, 박태열 등과 대한독립청년단을 조직하여 무력활동을 하던 중 안병찬을 만나 대한독립청년단연합회를 결성했다. 그 후 상해에서 스승 안창호를 만나 대한광복군총영 총영장으로 활동했다. 1922년 대한통의부, 1925년 정의부를 결성하고 군사부위원장 겸 사령장으로 활약했다. 그리고 1926년 4월에는 양기탁과 고려혁명당을 설립하고 의용군을 이끌었다. 오동진은 독립군 지휘관으로 명성을 떨쳤다. 이탁이 안창호 곁을 지킨 것처럼, 오동진은 김동삼을 지켰다. 김동삼도 충격에 빠졌으리라. 그리고 안창호 뒤에는 양기탁 선배가, 김동삼 뒤에는 이상룡 선생이 있었다. ‘위대한 선배들 그리고 위대한 후배들...!’ 안창호는 생각했다. ‘김동삼과 나는 행운아다. 그나저나 오동진은 거물이라 일본이 마구 분풀이를 해댈 것이다. 잘 견뎌내면 좋겠는데....’ 

 체포된 오동진은 신의주지방법원과 평양복심법원에서 무기징역 선고를 받았다. 상고를 포기한 오동진은 서대문형무소에서 감옥살이를 하다가 1934년 7월에 20년형으로 감형, 1944년 공주형무소에서 5월 20일 옥중 순국한다.      


 오동진의 체포는 김동삼에게도 역시 큰 충격이었다. 만주 독립군 단체들은 1928년, 그 어느 때보다도 소통과 제휴, 통일의 필요성을 절감했다. 특히 오동진 체포의 영향이 컸다. 중국의 국공합작 결렬과 공산당원 색출 및 학살 소식에 만주에는 긴장감이 돌았다. 마침 유일당상해촉성회(1927.3.21.)를 결성한 홍진이 임시정부의 파견 명령을 받고 1928년 1월에 길림에 도착했다. 그리고 지도자들을 만나 유일당 결성을 촉구하고 나섰다. 

 김동삼은 1928년 3월 1일 영안현에서 32개 단체 대표들을 모아 5월에 민족유일당만주촉성회를 결성했다. 이때는 김좌진과 황학수 등 신민부 군정파가 동참했다. 본회에서 김좌진은 신민부 사정을 토로했다. 신민부는 자유시참변의 위기를 모면한 김좌진이 조성환 등과 1925년 3월 10일, 흑룡강성 영안현에서 결성되었다. 김좌진은 민생을, 조성환은 군사부장으로 역할을 분담했다. 이들은 북만지역 민족 자치기관으로 문맹 퇴치, 반일계몽, 군사훈련 등을 실시하며 자리를 잡아 갔다. 조성환은 1926년에 민족유일당운동을 촉진하기 위해 북경으로 이동했다. 김좌진은 조성환과 추진했던 목릉현 소추풍에 성동사관학교를 설립하고 독립군양성에 주력했다. 일본은 삼시협정을 빌미로 친일단체들을 양산하여 양민 수탈과 만행으로 방해 공작을 해왔다. 김좌진은 별동대를 가동하여 밀정과 친일파를 처단했다. 이때부터 군정파와 민정파로 갈라졌다. 그 틈새에서 한인들은 이리저리 군자금 조달로 심신이 피폐해졌고 신민부는 처음의 위세가 점점 약화되어 갔다. 이 틈을 타고 최창익(1896~1957) 등은 국내와 만주를 넘나들면서 1925년 신민부 내에 공산주의자동맹을 결성하고, 코민테른 회의에 서울 대표로 참가하는 등 독자적인 활동을 해나갔다. 

 이 무렵 김좌진의 사촌 동생 김종진이 찾아와 천군만마 역할을 했다. 김종진은 북경 망명으로 이회영을 만나 공산주의에 대적할 철학 사상으로 아나키즘을 수용했다. 김좌진은 공산주의자동맹에 대응하는 대안으로 김종진으로부터 아나키즘을 수용했다. 이후 신민부 지역 흑룡강성 해림(발해 유적지)에 무정부주의 단체가 결성되었다. 때를 같이 하여 이회영, 이정규, 류자영, 백정기, 정현섭, 김종진, 신채호 등은 상해에도 무정부주의 단체를 결성했다.


 한편, 박병희는 남만청년총동맹(1926년 결성)으로 돌아가서 민족유일당 결성을 촉구하는 성명을 발표했다. 여기에 고려공산청년회 만주총국과 조선공산당 만주총국 청년들이 가세하여 민족유일당협의회를 구성하고 유일당 운동에 동참했다. 이로써 만주 유일당은 촉성회파와 협의회파로 압축되었다. 촉성회파와 협의회파는 1928년 5월 12일부터 26일까지 화전과 반석을 번갈아 오가며 세 차례 연석회의를 가졌다. 민족주의 진영과 공산주의 진영이 망라된 18개 단체 대표 39명과 그밖에 30여 명이 참가하여 난상토론을 벌였다. 주장들은 좁혀지지 않았고, 여러 가지 불만들이 터져 나왔다. 만주의 3부 통합은 결렬위기에 직면했다. 

 김동삼은 이러한 상황을 충분히 예상하고 3부 통합의 본질은 좌우합작 성공 여부에 달려 있다고 판단하여 포기하지 않았다. 김동삼은 9월에 3부 통일 회의를 다시 시도하였다. 그러나 역시 좌우합작의 공론형성은 쉽지 않았다. 성과가 없자 김동삼은 11월 15일, 좌우합작 전략 수립을 위한 혁신의회를 구성하고 의장이 되었다. 혁신의회에는 신민부의 김좌진과 황학수도 참여했다. 여기에 참의부에서 김승학이 참가했고, 정의부는 김동삼과 지청천이 참여하여 3부 통합이 이루어지는 듯싶었다. 그리하여 혁신의회는 유일혁명당 구성을 위한 본격적인 활동을 앞두고 있었다. 

 그러나 이 무렵 중국은 국공 내전 사태로 돌입했고 이에 따라 모스크바도 긴장했다. 코민테른은 1928년 12월 10일, 12월 테제를 발표하면서 한국의 민족혁명 좌파들은 민족진영과 결별하고 독자 노선을 준비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공산주의 진영 참가자들은 모두 혁신의회를 빠져나갔다. 혁신의회가 이루어낸 3부 통합에 균열이 생긴 것이다. 코민테른 12월 테제로 북경과 상해를 중심으로 하는 촉성회연합회도 영향을 받게 된다.      


(다음 화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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